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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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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시켜놓고 ‘대박’ 바라는가

인천 아시안게임 인공기 소지 금지로 드러난 정부의 대북 인식…
남북이 서로 인정하고 응원하는 유일한 공간마저 닫히나
등록 2014-09-24 18:07 수정 2020-05-03 04:27
지난 9월19일 인천 아시안게임의 막이 올랐다. 북한 인공기 거리 게양에 보수단체가 항의하자 정부는 경기장·선수촌 등에만 인공기를 걸도록 제한했다. 지난 9월18일 인천 남동구 구월동 아시아드선수촌에서 열린 북한선수단 입촌식 모습.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 9월19일 인천 아시안게임의 막이 올랐다. 북한 인공기 거리 게양에 보수단체가 항의하자 정부는 경기장·선수촌 등에만 인공기를 걸도록 제한했다. 지난 9월18일 인천 남동구 구월동 아시아드선수촌에서 열린 북한선수단 입촌식 모습. 한겨레 이종근 기자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

9월19일 닻을 올린 제17회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게임)의 구호다. 더 자세히 소개하면 ‘이념과 종교, 민족의 갈등을 녹이는 평화’ ‘화합과 나눔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감동’이 그 목표다.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45개 회원국이 모두 참가한다. 아시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목표로 할 만하다. OCA 회원국이 모두 참가한 것은 2006년 카타르 도하대회가 최초인데, 이번에 3회 연속 회원국 전체 참가 기록을 세웠다.

내동댕이친 글로벌 스탠더드

그러니 도시가 화합과 축제의 열기로 들썩여야 마땅하지만 인천 시내의 온도는 미지근하다. 평화보단 갈등이, 따스함보단 냉랭함이 도드라진다. 경기장 밖 거리에선 국가 간 화합의 상징인 만국기를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의 ‘인공기’ 게양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불화의 조짐은 닻을 올리기 전 명백했다. 지난 9월6일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가 열리는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 주변에 내걸린 만국기 가운데서 인공기를 확인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항의하자 대회 조직위원회가 참가국의 국기를 모두 거둬들인 것이다. 이어 검찰은 9월11일 통일부·국가정보원과 함께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인공기 게양 ‘가이드라인’을 정해 발표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인공기를 소지하거나 흔드는 등의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국가보안법상 이적성이 인정될 경우에는 엄정하게 사법처리하겠다.” 대신 경기장·시상식장·선수촌 등 필요한 장소에서만 인공기를 게양하고 북한 국가 제창 역시 대회 진행에 필요한 경우에만 허용하기로 했다.

정부 방침은 OCA의 규정과 충돌한다. OCA는 규정 제58조에서 “경기장 및 그 부근, 본부 호텔, 선수촌, 공항 등에는 OCA기와 해당 올림픽위원회 회원들의 국기가 게양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이전에 국제 규정이 있는 겁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다가 정작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코리안 스탠더드’를 내세워버리니 국제사회가 볼 땐 촌극인 것이죠.”

정부의 이같은 조처는 북한 인공기가 남한 땅에 처음 ‘합법’ 게양된 12년 전보다 반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수준이다. 해방 뒤 1947년 김일성의 지시로 인공기를 제작하기까지는 북한도 태극기를 사용했다. 1948년 제정된 북한 국기는 남과 북의 심리적 거리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부침을 겪어왔다. 실정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다.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아우른다. 북한의 실체를 부정한다.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 나라의 상징인 깃발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우선 남한 사람들이 부르는 그 이름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인민공화국기’의 줄임말로 부르는 임의적인 이름이다. 북에서는 붉은색, 푸른색이 어우러진 가운데 별 문양이 들어가 있다는 뜻에서 ‘홍람오각별기’ ‘남홍색기’ 등으로, 또는 ‘공화국기’로 부른다.

가망 없어 보이는 남북 간 외교

우리 사회에서 인공기가 ‘해금’된 시점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다.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 무드가 고조된 뒤다. 북한이 참가하는 한국 내 첫 국제 경기대회인 만큼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조직위원회, 프레스센터, 선수촌 등으로 제한했지만 부산 시내 공공장소 26곳에 인공기가 합법적으로 게양됐다.

예술작품에 들어간 인공기 이미지마저 경찰의 ‘국가보안법’ 수사를 받던 때였다. 대회 전엔 인공기를 훼손하겠다는 협박전화가 쇄도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우리 국민의 인공기 소지를 신고하는 ‘인공기 감시단’과 김정일이 방한할 경우를 대비해 ‘체포조’를 운영했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신 대회가 진행되는 열여섯 날 동안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온통 북쪽 응원단에 쏠렸다. 국제사회의 눈길이 쏠리면서 대회도 흥행했다. 입장권 예매율은 50%를 넘겼다. 인천 아시안게임 입장권 예매율이 18%(9월17일 기준) 수준에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이후 ‘스포츠’는 남과 북이 껄끄럽지 않게 서로를 인정하고 응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동시입장한 것을 시작으로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안경기,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도하 아시안게임 등에서 남북한은 코리아라는 이름을 나눠가졌다. 그러나 9차례나 이어졌던 남북한 동시입장은 2007년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이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그해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동시입장이 이뤄지지 않았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후퇴 일변도 남북관계에서 스포츠 외교도 얼어붙었다. “인천은 남북관계 악화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스포츠의 공간에서 대북 적대감을 토해낼 것까지는 없다. 주최국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 남북관계에서 외교의 부활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야만으로 타락해야 하는가?”(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9월15일치)

2008년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에는 인공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내걸렸다. 바로 지난해 평양의 국제역도대회에서는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됐고 우리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남북이 스포츠 교류를 시작한 지 23년 만의 일이다. 이대로라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정부의 ‘관용’이 전체주의 독재왕조인 북한 정부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정욱식 대표는 “오히려 보수 정부이기 때문에 과거 DJ·참여정부 때보다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국민의 협조를 구하기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인공기 게양 문제는 대통령의 전향적 의지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 “평창도 참여 장려하면 될 것”이라지만

‘평화의 제전, 감동의 대회’에서 북한팀을 목하 ‘왕따’시키면서도 대통령은 여전히 ‘통일 대박’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을까. 지난 9월18일 박근혜 대통령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이 참여율 면에서 서울올림픽을 훨씬 더 압도하기를 희망한다. 북한팀의 참여도 희망한다”는 바흐 위원장의 말에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이 참여하도록, 국제 스포츠계의 관례대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해나가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

바흐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화답을 박 대통령이 귀담아들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북한팀이 한국에서 따뜻하게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2018년 올림픽 참가 문제에 대한 결단을 훨씬 더 쉽게 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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