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을 ‘음모’하진 않았지만 ‘선동’하긴 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RO’(Revolution Organization·혁명조직)의 실체도 인정할 수 없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내란음모라는 주요 혐의는 ‘유죄’(1심)에서 ‘무죄’로 판단이 뒤집혔다. 그러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1심과 같이 유죄로 판단했다.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이민걸)는 지난 8월11일 이석기 의원에 대해 징역 9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1심보다 징역은 3년, 자격정지는 5년 줄었다.
“RO 존재를 인정하기 부족하다” 판단판결에 대한 평가, 나아가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해석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이석기 2심, 내란음모 면죄부 준 것 아니다’(), ‘李 구하려다… 제 발등 찍은 통진당’() vs ‘내란음모 무죄, 검찰과 국정원은 뭐라 답할 텐가’(), ‘법무부 ‘진보당 해산심판’ 위헌논리 궁색해졌다’().
재판장인 이민걸 부장판사는 판결 선고에 앞서 “이 재판을 진행하면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법원이 제시한 ‘균형추’가 아전인수 격 해석들에 휩쓸려 갈팡질팡한다. 판결문에 나타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RO]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통합진보당을 이끄는 핵심세력으로 ‘RO’를 지목한다. 이석기 의원을 정점으로 한 지하혁명조직인 ‘RO’가 존재하고, 이들이 체제 전복을 꾀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두 차례 회합에 모인 130여 명은 RO 조직원으로 꼽혔다.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은 “현 정세에서 정치군사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강연을 했다. 분반토론에서는 총·폭탄 제조와 통신·철도 시설 파괴 방법 등이 논의됐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제보자 이아무개씨의 진술과 녹음파일이 주요 증거다. 이씨는 2004년 자신의 RO 가입 과정과 이후 경험을 바탕으로 RO 조직의 성격과 총책(이석기 의원), 조직체계 등에 대해 진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씨의 진술은 개인적인 의견, 추측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진술만으로는 RO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RO가 존재하고 130여 명이 RO 구성원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본 것이다.
[내란음모와 내란선동] 대한민국 형법을 보자. 내란이란, 국토를 참절(대한민국 일부 영토에서 불법적 권력을 행사)하거나 국헌을 문란(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전복)할 목적으로 폭동을 저지르는 것(형법 제87조)이다. 내란을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돼 있다. 내란 선동 또는 선전한 자에 대한 형도 같다(형법 제90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판결은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연방제에 의한 통일을 꾀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뒤 34년 만에 처음이다. 칼집에서 잠자고 있던 ‘낡은 칼’을 새삼 꺼낸 셈이다.
‘자극 주는 일체 행위’라는 선동 범위 너무 넓어항소심 재판부는 내란음모가 성립하려면 “범죄의 실행에 합의했는지가 관건”이라고 봤다. 여기선 ‘합의’가 핵심이다. 이석기 의원의 강연이나 분반토론에서 참석자들이 “네”라고 답하거나 박수를 친 것은 합의가 될 수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폭력적인 방안까지 논의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면서도 “내란 행위의 시기, 대상, 수단, 방법, 역할 분담 등의 윤곽을 정하지 않아 어떤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1심보다 엄밀한 법의 잣대가 들이밀어졌다.
하지만 내란선동에 대한 잣대는 달랐다. “내란선동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시기, 대상, 수단 등이 구체적으로 특정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반도 전쟁 발발시 기간시설을 파괴하자고 말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폭동을 부추겼다는 점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판결 직후 성명을 내어 “내란음모를 무죄로 하면서 내란선동을 유죄로 한 것은 매우 기교적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구체성이나 실질적인 위험성이 없는데 내란선동이 인정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은 같은 법조항에 있고 법정형도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요건을 요구한다. 막연히 ‘범죄를 저지르라’고 하는 정도를 선동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내란음모와 비슷한 정도로 범죄 대상이나 방법, 시기 등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성이 증명돼야 한다. 대법원에서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은 “내란음모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음모’의 범위를 굉장히 좁게 해석했다. (법원 판단처럼) 기간시설 파괴 등 구체적인 임무가 주어지려면 전시 상황에나 가능하다”(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는 논리다.
최종 판단은 이제 대법원의 몫으로 넘겨졌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77년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법원 판례를 보면, 내란선동에 대해 ‘폭동에 대해 고무적인 자극을 주는 일체의 행위’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장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발언했던 과거 극우 교수들도 다 내란선동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내란선동의 범위가 너무 넓은 판례 자체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풍전등화’ 처지에 놓였던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은 항소심 판결로 시간을 조금 벌었다. 새누리당은 9월 정기국회에서 이 의원 제명안을 처리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최종 판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한 태도로 돌아섰다.
이번 판결이 헌법재판소가 심리 중인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심판 청구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법무부는 그동안 ‘통합진보당 핵심=RO 조직원’이라는 논리를 펴며 정당 해산을 주장해왔다. 판결 다음날인 지난 8월12일 헌재에서 열린 공개변론에서 정점식 법무부 위헌정당대책전담 TF팀장은 “판결문에도 ‘국가의 지원을 받는 정당 모임에서 이런 논의가 이뤄진 건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없다’고 분명히 적시돼 있다.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행사에서 내란선동이 이뤄졌다는 것만으로도 위헌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헌정당해산심판에 미칠 영향, 극과 극 해석반면 통합진보당 쪽 변호인들은 이석기 의원 개인의 일탈행위가 확실해진 만큼, 정당 해산청구는 기각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하주희 변호사는 “설령 이석기 의원의 개인적인 문제(내란선동)가 있다 하더라도 정당 해산 전체에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항소심 판결문에서도 정확한 문구는 ‘(5월 회합이) 통합진보당 강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지, 통합진보당을 대표하는 모임이었다고 인정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헌재의 다음 공개변론은 8월26일에 열린다. 헌재는 올해 안에 최종 결정을 내놓을 예정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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