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는 기억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보여준다. 10분 이상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며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처절한 노력을 한다.
심리학에서 이런 유형을 ‘선행성 건망증’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그 반대로는 ‘과다기억증후군’이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무엇 하나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증상이다. 주인공과는 정반대일 그 고통은, 실제 이러한 증상을 겪는 질 프라이스가 자서전을 써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은 누구나, 어떤 것이든, 디지털로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또는 타인에 의해 알게 모르게 기록되기도 한다). 인터넷이 모든 것을 저장하고 검색 사이트로 분류·추적할 수 있게 되면서, 기억은 디지털 메모리로 전환된다. 이로 인해 누구나 과다기억증후군을 겪을 수도 있는 환경이 완성됐다.
프라이버시를 연구하는 영국 옥스퍼드의 저명한 학자 빅토르 마이어 쇤버거는 질 프라이스의 사례를 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과거를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다.” 디지털 메모리 시대에는 ‘잊혀질 권리’가 보장돼야만 우리가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디지털 기록에 대한 개인정보 주체의 삭제나 정정 요청권이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중요한 인권 중 하나로서 말이다. 이유는 쇤버거의 주장과 같다. 최근에는 유럽사법재판소에서 중요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font size="3">과다기억증후군에 걸린 사회 </font>기념비적 판결을 이끈 글은 의외로 짧은, 36단어의 신문 공고문이었다. 재판은 스페인 변호사인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가 제기했다. 현재는 구글과 맞서 승리한 사람으로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그의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하면, 1998년께 그 공고문만 나왔다. 경매 기일과 대상 부동산의 현황, 채무자를 알리는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의 부동산도 경매 대상이었다. 현재 58살인 그는 16년 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세금을 못 내는 바람에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 뒤 밀린 세금을 갚고 신용도 회복했다.
하필이면 신문사가 과거 신문을 온라인에 디지털화하면서 수년 전 공고문을 올렸다. 구글 검색으로 공고문이 나오자 그는 신문사와 구글에 이렇게 요청했다. “공고문이 이제 부적절한 정보가 됐다. 경매 정보를 빼거나 개인정보를 가려라. 아니면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 구글과 신문사는 거절했다. 그는 2009년 스페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AEPD)에 개인정보 삭제와 처리 중지를 청구했다. 스페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신문사를 상대로 한 청구는 기각했다. 공고문이 고용사회보장부 장관의 명령으로, 법적 근거를 갖고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구글에 대해선 검색에서 보이지 않게 하라고 결정했다. 구글은 이에 불복해 스페인 고등법원에 소송을 냈다. 스페인 고등법원은 유럽사법재판소에 해석을 요청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구글 같은 검색 사이트도 개인정보처리자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구글이 개인정보를 처리할 때, 개인정보보호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맞서 구글은 단순히 검색 결과만을 보여주고 개인정보를 통제하지 않으므로 개인정보처리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검색했으며, 그 결과를 특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했기 때문이라고 판결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개인정보처리자의 행위라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사실 유럽사법재판소는 과거에도 몇 차례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이번 판결로 유럽의 최고법원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font size="3">유럽서만 적용될 구글 검색에서 잊혀질 권리 </font>구글이 지켜야 할 의무가 늘어났다. 이제 검색 사이트는 개인정보 주체의 동의를 받거나 정당한 사유에 따라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부정확하거나 부적절한 정보의 삭제나 정정 요청권을 보장해야 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자기 정보의 처리를 거부할 권리를 줘야 한다. 이 대목에서 유럽사법재판소는 검색 사이트의 독특한 특성을 주목했다. 개인정보란 원래 정확해야 한다. 내용이 바뀌면 최신의 것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하거나 부적절하다. 하지만 검색 사이트는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 따라서 정보의 정확성과 적절성 등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 주체가 검색 사이트에 처리 중단을 요구했다고 하자. 사이트 운영자가 그 요구를 거절하려면 알 권리나 표현의 자유 같은 공공의 이익이 정보 주체의 이익보다 크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길지 않은 판결문에서 유럽사법재판소는 개인정보 주체의 자기 정보에 대한 처리 중지 요청권이나 정정·삭제 요청권이 인터넷에서 불완전·부적절·부정확한, 때로는 과도한 개인정보의 처리를 제어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 보호 수단이라는 점을 인지했음을 보여준다. 보도 목적이거나 학술·예술적 표현이라면 자기 정보 처리 중지 요청권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16년이나 지난 경매 공고문은 검색 결과에 나올 공익적 필요성이 크지 않다. 오히려 부적절한 정보로 당사자 곤살레스가 겪는 불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로 전세계 언론이 들썩였다. 특히 유럽 검색시장의 80%를 차지하는 구글은 정책을 변경했다. 구글의 검색 결과로 나타나는 정보가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부정확하거나 과도한 경우에는 검색 결과에서 보이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는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요청 대상은 유럽인으로 한정했다. 유럽국 신분증 사본을 구글에 보내야만 신청을 처리해준단다. 그럼에도 첫날부터 엄청난 신청이 쏟아졌다.
유럽인이 아니라면?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구글 검색 결과에서 정보를 삭제해달라는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다만 누군가 자기의 주민등록번호, 신용카드번호, 은행 계좌번호를 웹사이트에 노출한 경우에는 검색 결과에서 가려주거나 빼주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도 곤살레스처럼 소송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font size="3">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 인정해야 </font>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한쪽에선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의 위축을 걱정한다.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검색 결과에서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개인정보 주체의 요구가 인정돼선 안 된다거나, 검색 사이트에 개인정보보호법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면 이는 사이트 운영업체의 이해만을 지나치게 고려한 입장이다. 위축 효과를 우려해 언론중재 신청이나 정정·반론 보도 소송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개인정보 주체의 검색 사이트에 대한 권리가 일단 인정돼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의 균형을 지혜롭게 찾아나가야 한다.
이은우 변호사·법무법인 지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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