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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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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증가는 가장 작은 변화



삼륜 택시 기사에서 콜센터 노동자로, 쓰레기더미에서 끼니 구하다

생산 관리자로… 재교육·유통혁신으로 빈민 탈출 돕는 필리핀 사회적 기업들
등록 2014-06-13 17:11 수정 2020-05-03 04:27
필리핀의 사회적 기업 래그스 투 리치스에 고용된 여성들이 수공예로 러그를 짜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이들의 소득수준뿐 아니라 삶 전체를 바꾸고 있다. Rags2Riches 제공

필리핀의 사회적 기업 래그스 투 리치스에 고용된 여성들이 수공예로 러그를 짜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이들의 소득수준뿐 아니라 삶 전체를 바꾸고 있다. Rags2Riches 제공

“어두운 구름 뒤에,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박수를 음미하려는 듯 마크(36)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난 5월 열린 ‘동창회’의 밤은 그에게 특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삶이 그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마크는 트라이시클(오토바이에 보조 좌석을 매단 필리핀의 삼륜 택시)을 몰았다. 많은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그러하듯 오늘의 풀칠을 위해 거리를 헤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최근 마크는 콜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300달러의 월급을 받는다. 필리핀의 평균적인 대졸자 초임 월급 이상이다. 처음으로 꿈도 생겼다. 지역에서 가장 큰 쌀 수매상이 되는 것이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마크의 삶을 이렇게 바꾼 건 싱가포르에서 온 3명의 젊은이다.

가치와 수익 다 잡는 영리형 사회적 기업

“필리핀에선 아웃소싱 방식의 콜센터들이 채용을 대폭 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회사들이 필요로 하는 스킬을 갖추지 못하고 있죠.” 지난 6월2일 필리핀 메트로마닐라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바고스피어’(BagoSphere)의 최고경영자(CEO) 지한 리(28)의 설명이다.

바고스피어는 2011년 필리핀 중부 네그로스섬 해안가의 작은 도시 ‘바고’에서 출발한 사회적 기업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을 졸업한 지한과 그의 친구들은 졸업 뒤 대학 시절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던 바고를 찾아 회사를 차렸다. 이들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고급 영어와 컴퓨터 사용법, 고객 응대 기술 등을 가르쳐 콜센터에 취업시키고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필리핀에서는 최근 몇 년 새 영어권 국가들의 콜센터 아웃소싱이 급증하는 중이다. 이미 1조원대 시장이 형성돼 있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필리핀의 블루오션인 셈이다. 2016년까지 이 분야에서만 8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걸로 예상된다.

단순한 직업훈련만은 아니다. 자존감과 스트레스 저항력을 높이기 위한 상담과 요가, 재무설계 수업 등도 병행한다. 대물림된 가난으로부터 젊은이들을 견인하기 위한 종합서비스 기관에 가깝다.

대신 이 모든 서비스를 위한 학비는 꽤 비싸다. 2개월치 수업료 390달러는 꼬박 석 달 동안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사회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비정부기구(NGO)가 아니라 ‘영리형’(for-profit) 사회적 기업입니다. 질 좋은 수업을 위해 훌륭한 강사를 고용하려면 비용이 들지요.” 사회적 목적을 띤다는 이유로 사기업보다 뒤떨어진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한다면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많은 아시아의 사회적 기업들이 쉽게 고사하는 이유다. 지한은 “바고스피어는 비슷한 콜센터 직업훈련 학원이나 영어 학원에 견줘 취업률도, 졸업 뒤 임금 상승률도 높다”고 설명했다.

‘비용’은 수혜자 자신에게도 중요하다. 쉽게 손에 쥔 기회는 쉽게 놓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학할 때 학생으로부터 500페소(약 1만1600원)를 미리 받아요. 이건 공짜가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죠. 돈을 내고 나면 학생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돈이 없다고 해서 바고스피어에 등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이 취업하고 나면 2년에 걸쳐 저리로 상환할 수 있도록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고스피어를 졸업한 167명 가운데 80%가 졸업 뒤 2개월 안에 관련 분야에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수강료 상환율은 100% 수준이며 2015년부터는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지한은 덧붙였다.

일반 기업보다 엄혹한 사회적 기업의 생존

우후죽순 생겨나는 필리핀의 사회적 기업들 가운데서 바고스피어처럼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춘 곳은 손에 꼽힌다.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낸 1986년의 ‘피플파워’ 이후 필리핀 사회에선 NGO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너무나 많은 돈이 미국과 유럽에서 흘러들어왔고 넘쳐나는 지원 속에 NGO들이 비용과 관련된 부분은 소홀하게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낙후 지역의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LGT 벤처 필랜스러피’(LGT Venture Philanthropy)의 동남아 지역 투자 매니저 조안 야오의 설명이다.

LGT는 기관에 따라 적게는 20만달러에서 많게는 1천만달러를 투자하거나 기부한다. 관련 영역의 전문가로부터 지속적인 멘토링도 제공된다. 다만 요건이 아주 까다롭다. “우리는 단순히 초기의 아이디어만으론 지원하지 않습니다. 기준이 있습니다. 1~2년 정도 운영해 성장 단계일 것, 풀타임 노동으로 헌신할 것, 초점 분야가 명확할 것,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갖출 것 등입니다.” 해마다 LGT에 지원을 신청하는 기업 가운데 단 2%만이 이 기준을 통과한다. 사회적 목적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사회적 기업에 생존은 일반적인 기업 영역에서보다 더 엄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까다로운 기준을 뚫고 LGT의 지원을 받은 사회적 기업은 필리핀엔 세 곳뿐이다. 지난 6월3일 산후안의 ‘래그스 투 리치스’(R2R·Rags2Riches) 공장에서 만난 리스 페르난데스(29)도 그중 한 명이다. 리스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곧바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빈곤 지역을 돌아다닌 그는 자연스럽게 필리핀의 빈부 격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

R2R는 ‘쓰레기섬’으로 유명한 파야타스 등 빈곤 지역 여성들의 소득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은 손수 짠 러그 하나를 팔아봐야 몇백원도 손에 쥐기 힘든 처지였다. 중간도매업자 때문이었다.

리스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여성들에게 소비자와 직접 거래할 창구를 열어주었다. 2007년부터 900여 명의 여성이 R2R와 함께 일하고 있다. 리스는 그들로부터 물건을 납품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예 기술을 가르치고 사업 수완과 재무설계까지 교육하고 있다. 5명의 자녀를 키우며 쓰레기더미에서 끼니를 구하던 아드닝은 2007년 R2R를 만난 뒤 수공업자로 일하기 시작해, 지금은 생산라인 매니저를 맡고 있다. 리스는 “그녀의 두 아이는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귀띔했다.

“빈곤의 구조는 굉장히 복잡해요. 그들의 소득이 증가한 것은 그들 삶의 변화에서 가장 작은 부분입니다. 거기서 멈추면 안 되지요. 당장 내일 일도 생각할 수 없던 이들이 삶의 로드맵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랍니다.”

R2R의 특별한 점은 무엇보다 잘나가는 디자이너들을 설득해 ‘신상’ 디자인을 만든다는 데 있다. 싸구려 수공예품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핸드백, 지갑 등의 소품을 매 시즌 선보이는 것이다. R2R의 소품은 100~150달러 수준으로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가치를 창출하지요. 그들이 만들어낸 가치가 가난한 수공업자들의 삶을 바꾸고 있는 거예요.”

로드맵 있는 삶이 가능토록

그런 의미에서 리스는 자신이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통역자나 대변인에 가깝다”고 전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디자이너, 시장과 정부, 돈이 필요한 사람들과 후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소통한다는 것은 욕구를 읽는 일이다. 수혜자, 후원자, 정부, 시장의 욕구를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없으면 사회적 기업가로서 목표를 성취하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리스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린 정말 그런 일을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재빨리 공장이 있는 2층으로 사라졌다. 아직 수천만 명의 가난한 필리핀 여성들이 ‘Rags to Riches’(무일푼에서 부자)가 되길 꿈꾸고 있는 까닭이다.

산후안·파식(필리핀)=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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