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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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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뒤 꽃핀 ‘비영리+영리’ 콜라보



비영리단체(NPO)에 몸담으며 투자기금 유치,
기업과의 협업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 꿈꾸는 일본의 청년 혁신가들
등록 2014-06-13 17:03 수정 2020-05-03 04:27
지난해 11월 일본 후쿠시마현 반다이고원 지역에서 홀 어스 자연학교 주최로 진행한 ‘가을 어드벤처 캠프’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숲 속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제공

지난해 11월 일본 후쿠시마현 반다이고원 지역에서 홀 어스 자연학교 주최로 진행한 ‘가을 어드벤처 캠프’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숲 속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제공

0.19μSv/h(마이크로시버트 퍼 아워).

지난 5월19일 오전, 일본 후쿠시마현 고리야마 기차역 앞 광장 한가운데에선 방사선량 측정기의 빨간 액정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고리야마 시내에서 3년 전 동일본 대지진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 회색빛 방사선량 측정기뿐인 듯했다. 이제는 서울의 2012년 방사선량 연평균치(0.11μSv/h)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사고 직후만 해도 고리야마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이었다.

방사능 오염이 덜 된 곳을 찾아

“후쿠시마현 안에서도 고리야마시와 후쿠시마시 사이의 방사선량이 가장 높았다. 산맥이 이어지고 계곡이 많은 지역으로 방사성물질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날 역 앞에서 만난 ‘후쿠시마 홀 어스(Whole Earth) 자연학교’ 교사인 와다 유키가 말했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덮친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전원 상실로 원자로 온도가 급격하게 치솟았다. 지진 하루 뒤, 원자로 폭발로 누출된 방사성물질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50km 가까이 떨어진 고리야마·후쿠시마시까지 옮겨왔다. “이곳 사람들은 사고 직후 열흘 넘게 실내에만 머물러야 했다. 모자·마스크에 방진복을 착용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건강상 문제가 생겼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헝클어진 상황이 됐다.”

이곳이 고향인 와다는 사고 당시 핵발전소 근처인 이와키시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운영을 시작한 건 사고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홀 어스 자연학교’는 설립된 지 올해로 33년이 넘은, 일본에서 환경체험 교육을 전파하는 비영리단체(NPO)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굴 체험, 등산, 농업, 가축 기르기 등 도시 생활에서 하기 어려운 체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생명체에 배려심을 갖고, 세상에는 다양한 세계와 가치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홀 어스 자연학교’는 ‘유목민 캠프’ 등의 프로그램이 알려져 있다.

와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대학 시절 오스트레일리아 롱아일랜드 지역의 무인도에서 두 달 가까이 머물렀던 경험 때문이다. “그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2009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후지산 밑에 자리잡은 ‘홀 어스 자연학교’ 총괄본부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그가 가장 걱정했던 건, 자연 체험의 기회를 박탈당한 어린이들이었다. “고리야마시 전체에는 실내 놀이터가 60곳 정도 있다. 그러나 방사능 오염 탓에 자연을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방사능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이 덜해 안전한 곳에서 누구나 자연 체험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현재 그는 고리야마시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이나와시로 호수 근처 고난 지역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의 방사선량은 0.067μSv/h 수준이다. 6월 말부터 신청받아 캠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 지역의 오래된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쓸 계획이다.”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가 문을 열고 지금까지 활동하게 된 건 단순히 와다의 ‘헌신’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곳곳에 있는 NPO가 동일본 대지진 피해를 입은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금전적·물질적 후원을 하는 ‘월드 인 아시아’(World In Asia)의 프로그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011년 9월 문을 연 ‘월드 인 아시아’는 동일본 지역의 NPO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법인이다.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난 뒤 수많은 NPO와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피해자들을 도왔다. ‘월드 인 아시아’는 이런 NPO의 잠재력에 투자하려는 이를 물색해 연결해주고, 피해 지역에서 공동체 복원에 기여하는 사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재단법인 ‘기브 투 아시아’(Give2Asia)가 지난 2년 동안 19만2625달러(약 2억원)를 투자했으며, 일본국제교류센터(JCIE)와 뉴욕의 재팬소사이어티, 그 밖의 개인 후원자들도 있다. ‘월드 인 아시아’의 투자 유치로 모인 후원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현재 동일본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등 NPO 9곳을 지원하고 있다. “동일본 지역은 3·11 지진·쓰나미로 산업 인프라를 잃었다. 지역의 존속 가능성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주 고통스럽고 심각한 상황에서 기업가의 도전 정신이 발휘될 수 있고, 이들이 뛰어들고 있다.” ‘월드 인 아시아’의 운영이사를 맡고 있는 가토 데쓰오(35)의 말이다(상자 기사 참조).

고통일지라도 뛰어드는 청년 기업가들

3·11 피난민이 몰린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도 ‘월드 인 아시아’의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고향을 떠나 가설 주택에서 생활하는 피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벌이고 있는 NPO ‘아스이쿠’(Asuiku)가 그 주인공이다. 2011년 오하시 유스케(35) 아스이쿠 대표는 3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센다이 시내에 있는 한 피난처를 찾아가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앉혀두고 교과서 과외를 시작했다. 재난을 겪은 고향을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가설 주택이 지어진 뒤에도 자원봉사 교사들은 종이상자를 가운데 둔 채 학생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강의를 했다. 이들은 동일본 이외의 지역 사람들에게 지진의 심각성과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피해 지역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인터뷰한 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정된 인원과 자원 탓에 활동은 늘 빠듯했다.

마드레 보니타가 2012년 6월 동일본 피해 지역에서 순회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가 지난해 8월 연 ‘후쿠시마 들판의 힘 캠프’ 참가 어린이들이 과일을 먹고 있다(오른쪽 위). 아스이쿠의 자원봉사자들이 센다이 지역에 머물고 있는 피난민 학생들을 상대로 학습지도를 하고 있다(오른쪽 아래). 마드레 보니타,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아스이쿠 제공

마드레 보니타가 2012년 6월 동일본 피해 지역에서 순회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가 지난해 8월 연 ‘후쿠시마 들판의 힘 캠프’ 참가 어린이들이 과일을 먹고 있다(오른쪽 위). 아스이쿠의 자원봉사자들이 센다이 지역에 머물고 있는 피난민 학생들을 상대로 학습지도를 하고 있다(오른쪽 아래). 마드레 보니타, 후쿠시마 홀 어스 자연학교, 아스이쿠 제공

“그때 활동이 한계점에 봉착하면서 자원봉사자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내가 하고픈 일이나 목표를 이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21일 저녁, 일본 센다이시 쓰쓰지가오카역 근처에 있는 아스이쿠의 학습지원센터에서 만난 오하시는 그렇게 말했다. 아스이쿠의 활동이 돌파구를 찾은 건, ‘월드 인 아시아’가 학생용 온라인 교육 콘텐츠 이러닝(e-learning) 업체인 ‘스라라’를 설득해 아스이쿠가 저렴한 비용으로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하면서다. 오하시는 “우리의 경우, 한 번에 여러 학생들에게 강의를 제공하고 남는 시간에 학생들의 생활 상담을 할 수 있게 됐다. 스라라도 그동안 중산층 자녀를 상대로만 해오던 사업 모델을 빈곤층·피난민 등으로 확대해 새로운 시장을 찾는 효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산후우울증 산모에게까지 뻗친 손길

지난해부터 센다이시와 함께 수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아스이쿠는 센다이시의 다른 기업들과 함께 생활협동조합 성격의 ‘조인트 벤처’를 세워 피난민 어린이들에게 학습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의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사업으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본 재해 지역에서 ‘월드 인 아시아’가 벌이고 있는 실험은 ‘NPO+비즈니스’의 조합이다. 가토 상임이사는 NPO와 일반 기업이 결합한 경영 모델을 제시한 이유로 “기업은 빈곤층 피해자를 지원하고 싶으나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황이 생기고, 자원봉사자는 할 일이 많지만 서비스의 질이 낮아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투자 영역은 철저하게 재해 지역에서 정부가 담당하기 어려운 공공서비스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월드 인 아시아’의 투자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고 있다. 우선 5개 사업 분야를 정해뒀다. 의료, 교육, 쓰나미 재건, 마을 만들기(마치쓰쿠리), 일자리 창출 등 5가지다. 동일본 지역의 경우, 행정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NPO의 혁신으로 돌파해보려 했다.”

‘월드 인 아시아’를 통해 제공하는 서비스로는 마코 요시오카(41)가 운영하는 산후 케어 프로그램 ‘마드레 보니타’(Madre Bonita)가 있다. 산후우울증 등을 겪는 여성이 대상인 이 서비스는 출산 경험이 있는 공인 강사가 각 지역을 방문해 댄스 스튜디오 등을 빌려 체조와 심리 지원 강의 등을 진행한다. 15년 넘은 이 서비스는 전국 50곳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만 5천 명이 참여했다. “일본은 임신·출산 등에 대한 공공서비스는 발달해 있지만, 출산 이후 산모에 대한 케어는 전혀 없다. 전국적으로 산후우울증을 겪는 산모가 10명 중 1명인데, 재해로 스트레스를 받는 동일본 지역에서는 5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월드 인 아시아’의 투자를 통해 이 지역에 진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현재 일본 안에서 산후 케어 프로그램 전파에 집중하고 있는 마드레 보니타는 도쿄 스기나미구와 함께 복지 시스템과 연결해 90%의 비용을 지원해주는 바우처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장애아·쌍둥이·싱글맘 등 큰 어려움을 겪는 산모를 지원하는 3100만엔(약 4억원) 규모의 ‘마드레 기금’도 운영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공공서비스 편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시아 문제 해법이 될 수도

동일본 지진을 계기로 이뤄진 ‘월드 인 아시아’와 여러 NPO의 조합에 참여한 이들은 “잘할 수 있는 전문가가 영역을 나눠 도전해야 한다는 점을 교훈으로 얻었다”고 말했다. 가토 상임이사는 “3·11 같은 재해를 겪었을 때 공익적인 일에 나서려 한다면, 타이밍과 준비 작업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자원봉사자들은 3월에 곧바로 재해 현장으로 향했고, 정확히 6개월 뒤 투자가 이뤄질 수 있었기에 지속 가능한 운영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3·11 같은 사회적 문제가 언제든지 국경을 넘어 아시아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시작해 편서풍을 타고 한국과 일본에 미치는 대기오염은 동아시아 공동의 문제이고, 먹을거리 문제는 중국·인도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결국 동일본 지역에서 적용했던 해법처럼 아시아의 새로운 사회에 펼쳐지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고리야마·센다이·도쿄(일본)=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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