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하지 않는 것일까, 사퇴할 수 없는 것일까. 그만두기 싫은 것일까,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역대 어느 사장보다 사내 안팎의 거센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길환영 KBS 사장은, 정말, 물러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러날 때가 아니라는 답을 받은 것일까.
세월호 참사가 공영방송 KBS의 참사로 폭발하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KBS·청와대 항의(5월8~9일)→보도국장 사퇴 및 사장의 사과(9일)→보도본부장·보직부장 사퇴(16일)→기자협회 제작 거부(19일)→양대 노조 파업 찬반투표(21일부터)로 이어져온 ‘KBS 사태’가 길 사장 퇴진의 중대 고비를 오르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새노조)는 5월23일 ‘압도적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으로 사태가 촉발된 이후 청와대로 향하는 분노의 길목을 길 사장이 ‘버티며’ 막아내고 있는 형국이다.
‘사내 파워게임’으로 읽는 고기술길 사장은 여러 차례 밝혔다. “때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물러날 것”이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선동과 폭력에는 절대로 사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5월21일 사내 특별담화) 퇴진을 촉구하는 사내 구성원들을 향해 강경 대응도 천명했다. “정치적 선동으로 또다시 KBS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불법적인 시도가 있다면 제 직을 걸고 그 누구보다 엄중하게 사규와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것이다.”(5월21일 담화) ‘청와대 면접’ 논란을 일으킨 뒤 일주일 만에 사퇴한 백운기 전 보도국장 후임에 이세강 보도본부 해설위원(MB 정부 시절 친이명박 방송 지휘 논란)을 앉히는 ‘강공 인사’로 퇴진 불가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화법을 따라가면 KBS 사태는 인과의 맥락에서 이탈해 사내 파워게임으로 전환된다. ‘사장을 매개로 한 청와대의 공영방송 보도 개입 의혹’이란 사태의 핵심을 길 사장은 자신과 반대 세력 간의 대결로 좁혀내고 있다.
길 사장의 ‘프레임’이 제대로 먹혀드는 것 같지는 않다. KBS 안팎에선 그의 ‘불퇴전의 사정’을 달리 읽는 시각이 많다. 길 사장이 몰린 상황이 과거 사장 반대운동 때와 여러모로 다른 까닭이다.
첫째, ‘2008~2009년 이명박 정부의 이병순·김인규 사장 임명’ 과정에서 벌어진 KBS 구성원들의 투쟁은 정권의 ‘낙하산 사장’ 임명과 ‘방송 장악’ 논란이 발화점이 됐다. 길 사장 퇴진운동은 재난을 폄훼하는 재난 주관 방송사를 향해 피해 가족과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며 시작됐다. 정권의 방송 개입이 전자는 역대 정권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경로’를 따랐다면, 후자는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과 맞물려 ‘돌출’했다. 지켜보는 눈도 많고 사퇴를 원하는 여론도 월등하다.
둘째, 노조나 젊은 기자들이 아닌 보도국 최고 지휘자로부터 ‘청와대 보도 개입’ 의혹이 터져나왔다. 과거 아래로부터 제기된 보도 공정성 논란 때마다 보도본부 책임자들은 의혹을 부인하며 사장을 보호했다. KBS의 한 기자는 “보도국장이 청와대 개입 사실을 먼저 폭로하며 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부장과 팀장들이 일제히 보직 사퇴로 동참하는 일은 KBS 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은 5월9일에 이어 16일에도 ‘청와대의 해경 비판 자제 지시 및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 정황’을 추가 폭로했다. 길 사장은 기자회견과 사내 담화를 통해 김 전 국장의 폭로를 거듭 부인했다. 모두 개인적 판단이었고 청와대와 무관하다는 얘기였다.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의 전화(5월9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예방 자리에서 “사안이 굉장히 심각해 KBS에 최대한 노력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힘)도 김 전 국장의 사퇴 및 자신의 청와대 앞 사과와 관계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홍원 국무총리의 국회 발언(5월21일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세월호) 사태가 위중하니까 수색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쪽(해경) 사기를 올려달라는 취지의 뜻으로 요청했다”)에서마저 ‘보도통제’를 ‘보도협조’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인식이 드러났다.
우군 없는 외로운 고립무원셋째, 길 사장은 고립무원이다. 과거 어떤 사장보다 우군이 없다. 간부들 대다수가 사장을 따르고 사원들 내에서도 뜻이 갈렸던 이병순·김인규 사장 반대 때와는 크게 다르다. 기자협회(5월19일부터)·PD협회(23일)가 제작 거부에 나섰고, 전에 없는 규모의 간부들(23일까지 본사·지역 합산 부장급 49명, 팀장급 232명)이 직을 던지며 퇴진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사장의 입 역할을 했던 홍보실 팀장 2명이 보직을 버린 점(22일)도 상징적이다. 브라질 월드컵 중계를 책임진 스포츠국 부장들(23일 5명)까지 현장을 떠났고, 메인 뉴스 진행자를 포함한 앵커들(23일까지 14명)과 특파원들도 마이크를 놨다. KBS의 한 기자는 “부·팀장들이 대부분 제작 현장에 남아 공백을 메웠던 2012년 새노조 파업 때와도 크게 다르다”고 했다. 보도본부의 한 관계자는 “심의실 인력 등이 에 영상을 붙이는 수준으로 뉴스를 제작하고 있다. 제작 거부의 파장이 어느 때보다 크다”고 전했다. “과거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대동단결”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KBS 밖에선 언론학자 137명이 길 사장 퇴진 촉구 성명(22일)을 발표했다.
기자-PD 간 직종 갈등을 사태의 원인으로 몰아가려는 길 사장(PD 출신)의 전략(21일 “직종 간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조그만 갈등이 시간이 가면서 누적됨으로써 엄청난 오해와 불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도 먹히지 않는다. 한 PD는 “웃기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KBS PD협회가 길 사장을 회원에서 제명(19일)하고 제작 거부에 동참한 것은 직종 이기주의가 사태의 발단이 아니란 사실을 입증한다”고 했다.
넷째, 노조의 단결이 결정적이다. KBS 양대 노조가 사장 퇴진운동에 힘을 합하고 있다. “2009년 KBS노조(1노조)와 새노조가 갈라진 뒤 동시 파업을 추진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사장 퇴진에 사내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새노조 관계자는 말했다. 각자 총파업 찬반투표에 들어간 양대 노조는 5월26일 전후로 파업 돌입 날짜를 맞추기 위해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그래서다. 길 사장은 사퇴하지 않는 것일까, 사퇴할 수 없는 것일까. 새노조가 최근 실시한 신임투표에서 길 사장은 97.9%의 불신임을 받았다. 길 사장은 콘텐츠본부장이던 2011년 불신임률 88%를 기록했다. 이승만과 백선엽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휘해 PD 사회 내에서 ‘길완용’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퇴진 거부를 두고 KBS 내에선 ‘청와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란 견해가 많다. 한 기자는 “길 사장은 KBS를 정상화시킨 뒤 때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물러날 것이라고 하는데, 그 ‘때’를 청와대로부터 받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냐”고 했다. 중견 기자도 말했다. “노조의 출근 저지 탓에 회사에 나오는 것도 어렵다. 간부들도 줄줄이 돌아서고 있다. 회사는 이미 통제 불능이다. 기자와 PD를 잃은 방송사 사장이 무슨 사장인가. 사장 역할이 불가능한데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 봐야 한다.”
적어도 28일 해임안 표결청와대가 길 사장의 퇴진을 막는 이유. 목전에 닥친 지방선거와 연계한 해석이 나온다. “길 사장과 청와대의 ‘관계’가 드러난 지금 KBS 사태는 여권의 지방선거에도 도움이 될 리 없다. 그러나 길 사장이 물러나서 KBS로부터 권력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상황은 훨씬 부담스럽다.” KBS 보도본부 관계자의 풀이다. “길 사장이 사퇴하면 사장-사원 간의 갈등이 아니라 청와대-사원·국민의 충돌 구도가 된다. 길 사장이 정권이 받을 충격을 흡수해주는 게 상대적으로 낫다.” 길 사장의 ‘때’가 지방선거 이후 머지않아 닥칠 것이란 관측이 이 견해에 깔려 있다.
그의 역할에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전망도 있다. 전규찬 언론연대 대표는 “파업 대응을 빌미로 노조의 힘을 빼고 사내 비판 목소리를 진압했던 김재철 전 MBC 사장의 역할을 정권이 기대하고 있을 수 있다”고 봤다. 길 사장의 조기 퇴진을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KBS가 MBC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사내에도 적지 않다. 사장 퇴진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한 기자는 “사태가 장기화되면 ‘시용기자’ 채용과 징계·보복 인사로 비판 목소리를 제거한 MBC의 오늘이 우리에게 닥칠 수도 있다”고 했다.
청와대의 뜻은 KBS 이사회의 길 사장 해임안 표결에서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사회는 5월21일 임시이사회를 열어 26일 길 사장 해임안을 상정키로 합의했다. 야당 이사들(4명)은 당일 표결을 요구하고 있으나, 여당 이사들(7명)은 5월28일께 표결을 추진할 것으로 전해졌다. 사장의 거취를 결정하는 역대 이사회에선 청와대의 의중이 여당 이사들을 통해 드러났다.
해임안이 상정됐다는 점에서 여권 이사들의 기류 변화를 감지하는 전망도 있다.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한 야당 추천 이사는 “이사회가 해임하는 방식으로 길 사장을 정리해주길 청와대는 바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길 사장은 박근혜 정권에서 임명한 사람이 아니다. 세월호 국면에서 KBS가 ‘청와대 방송’으로 낙인찍힌 마당에 지방선거에도 해가 된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길 사장이 자진 사퇴하면 (그가 막아주던) 불똥이 청와대로 바로 튈 것이므로 이사회 차원에서 길 사장을 정리하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한 여당 추천 이사는 “지금 상황에서 개인 의견을 말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파업을 막는 길, 길 사장의 선택보직 사퇴한 일부 간부들과 여권 이사들의 움직임을 ‘차기 주자들’과 연결지어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KBS 안팎에선 길환영 이후를 노리며 뛰는 사람들의 이름이 벌써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여권 이사들과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표결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경우의 수가 복잡해지고 있다. 길 사장 퇴진을 둘러싼 ‘동상이몽’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양대 노조의 파업은 길 사장에게 큰 위협이다. 길 사장은 사내 담화에서 “4700여 직원들 중 침묵하는 다수가 양 노조의 명분 없는 투쟁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강변했다. KBS노조(기술직 중심·2500여 명)와 새노조(기자와 PD 중심·1200여 명 소속)의 조합원만 합쳐도 3700여명에 이른다. 해임안 처리의 열쇠는 이사회가 쥐고 있으나 파업 동력에 따라 이사회도 압박받을 수밖에 없다.
5월23일까지 진행된 새노조의 파업 찬반 투표 결과(재적 조합원 1131명 중 1052명 투표·투표율 93%) 94.3% 찬성으로 파업이 가결됐다. 새노조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파업 일정 논의에 들어갔다. 1노조는 5월27일까지 투표가 예정돼 있다. 새노조 관계자는 “26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바로 파업에 들어갈 수도 있으나, 1노조와의 사상 첫 동시 파업 성사를 위해 상호 간에 일정을 맞추려고 한다”고 5월23일 말했다. 새노조는 5월28일 KBS 이사회의 이사장 해임 제청안이 가결되지 않을 경우 즉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KBS 사태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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