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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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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은지’, 뜨겁게 안녕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를 보낸 ‘이별 3일’
회한과 죄책감, 천만번 ‘미안합니다’
등록 2014-03-19 14:45 수정 2020-05-03 04:27
지난 3월10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영결식장에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지난 3월10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영결식장에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토요일이던 지난 3월8일 새벽.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또 한 명의 젊은 활동가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평소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에 젖었다. 곁에서 그를 지켜봐왔던 독자 한 분이 에 글을 보내왔다. 공식적인 헌사나 추도사보다는, 그를 마지막 떠나보내는 3일간의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노라는 소망과 함께. _편집자
첫쨋날 - 버림

토요일 아침 8시, 메시지가 떴습니다. 박은지 부대표가 세상을 버렸습니다. 비보는 머리에 입력되지 않고 자꾸만 튕겨나갑니다. 빈소에는 부모님과 동생, 아들 은혁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표정에는 분노와 슬픔과 원망이 섞였습니다만. 은혁은, 아홉 살 먹은 은혁은, 도무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이 무표정합니다. 고인의 얼굴이 흰 국화꽃 사이에서 이쪽을 측은한 듯 쳐다보고 있습니다. 2014년 3월8일,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낯선 시간, 낯선 공간입니다.

벽에다 머리를 붙이고 빙빙 도는 아이

만삭의 당원이 휘적휘적 달려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웁니다. 세 살배기 딸아이는 엄마의 통곡이 의아합니다. 새벽에 엄마의 주검을 봐버린 은혁이는 벽에다 머리를 붙이고 빙빙 돌다가, 아빠 품에 안겨서야 흐느낍니다. 부자의 울음이 빈소를 채우면서 서른다섯 먹은 그이의 죽음은 현실이 되어갑니다. 컴컴한 슬픔을 토해버린 은혁은 잠에 빠져듭니다.

딸의 장례를 마주하는 부모님은 어찌할 줄 모릅니다. 납골당을 어디로 할까, 조문객은 어떻게 맞을까, 마치 허공에다 묻는 것 같습니다. 초대하지 않은 종합편성채널 TV의 촬영 카메라가, 미처 준비가 끝나지도 않은 빈소에 맨 처음 나타나 우리의 슬픔을 염탐합니다. 당직자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지만, 한숨과 눈물에 대화는 자꾸 끊깁니다. 어느새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비보 밑에는 야차 같은 악플도 달라붙었지만, 그런 것에 분노할 겨를이 없습니다.

오후 3시가 지나면서 밀물처럼 조문객이 몰려옵니다. 한솥밥을 먹다가 갈라섰던 옛 동지들도 착잡한 얼굴로 울음을 삼키고, 멀리서 가까이서 서로 손잡아주던 여러 곳의 동지들이 주먹으로 눈가를 훔칩니다. 지금은 슬픔으로 연대하는 시간입니다.

추모연대와 민주노총에서 장례 절차를 도우러 나섰습니다. 슬프게도, 많이 겪었던 일이기에 익숙합니다. 장례위원회가 꾸려지고,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김종철 위원장(노동당 동작당협)이 호상을 맡았습니다. 장례는 모든 진보 진영이 함께하는 사회장으로, 그이의 몸은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키로 합니다. 부모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분노의 빛깔이 얼핏 사라집니다. 모두는 그이를 붙잡지 못했다는 회한과 죄책감에 빠져듭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천만번의 ‘미안합니다’를 읊습니다. 저녁이 되자 은혁은 아빠의 품에서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번에는 가냘픈 어깨를 들썩이며 몹시 오열합니다.

먼 데서 달려온 동지들이 밤늦은 시각에 도착합니다. 자정이 지나자 누군가 밖에 봄눈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까만 밤하늘에서 흰 눈이 퍽퍽 쏟아집니다. 진보신당(노동당으로 재창당)의 젊은 대변인 시절, 그이는 반듯하고 재치 있는 글로 빛났습니다. 부대표로 전국을 누빌 때는 씩씩하고 다정했습니다. 그러기에 진보의 좌절은 얼마나 자주 그이의 무릎을 푹푹 꺾이게 했는지, 힘에 부쳤던 개인사는 그이의 우울을 언제부터 깊게 했는지 모두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젖은 눈을 보며 누군가는 담배를 붙이고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며 그이를 그립니다. 그이가 없는 첫날이 지납니다.

둘쨋날 - 별똥별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하늘은 파랗습니다. 빈소를 지키는 이들은 보수 언론의 저열함에 대해 잠깐 말을 나눕니다. 천박한 펜 끝에서 진보정치에 대한 고인의 열정이나 안타까운 좌절은 사라지고,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엄마, 실패한 아내가 되어버리는 오물을 뒤집어썼지만 영정 속 그이는 그저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떤 설계도가 있었을까

저녁에 영안실 로비에 그이와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이 가득 모여 추도식을 올립니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을 부르고, 그이의 화사함, 순수한 열정과 강고한 의지를 얘기합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때의 열망과 짧았던 교사 시절의 소망과 즐거움을 짐작해봅니다.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들 때 A4용지 10장에 적었다던 것은 어떤 세상을 그리는 설계도였을까 생각해봅니다. 누군가에게 그의 삶을 묻는 일은 너무 늦은 것이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고인의 친척들은 밀려드는 조문객과 그들의 뜨거운 눈물을 보면서 ‘우리 은지’를 새삼스럽게 다시 보았노라고, 뒤늦은 아쉬움을 말합니다. 누군가는 별똥별이 떨어졌다는 세상 소식을 전합니다. 가라앉은 마음은 그저 남의 행성에서 벌어진 일인 듯 무감합니다. 이렇게 둘쨋날이 지납니다.

셋쨋날 - 보냄

아침에 발인을 하고, 오전 10시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사회장의 영결식이 열립니다. 그이가 깃발을 앞세우고 숱한 나날을 보냈던 바로 그곳입니다. 그이가 외쳤던 구호, 촛불의 흔적이 흐린 눈 속에서 일렁입니다. 백기완 선생의 글이 낭송되고, 추도사와 조사가 이어집니다. ‘참으로 반가운 봄바람’ 같던 그이에게 고마움을 전하던 이용길 당 대표는, 어려운 시기에 당의 고통의 짐을 짊어지게 했던 미안함에 목이 멥니다. 그이가 좋아하던 박준 동지의 노래가 퍼지자 큰 걸개그림 속 박은지가 흔들립니다. 누군가에게 모진 짓을 한 것처럼 마음이 떨립니다.

그이의 영정이 서교동 당사를 들릅니다. ‘우리는 길을 이어가는 사람들, 미래로 한 발 또 한 발….’ 함께 부르는 당가는 처연합니다. 누군가 작은 어항 속 물고기에게 그이 대신 밥을 줍니다. 문득 그이의 고양이들은 어찌 있을까 궁금합니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야트막하고 아늑한 평지에 그이의 몸을 누입니다. 휘장이 덮이고, 널이 덮이고, 회를 섞은 흙이 뿌려집니다. 평토가 끝나도록 은혁은 울지 않습니다. 문득 은혁이 제 아빠 말고 다른 이 앞에서는 울지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라 슬퍼집니다. 은혁은 엄마의 몸을 잠시 뉘었던 관에다 코를 대고는 ‘여기선 엄마 냄새가 안 나’라고 말했습니다. 서른다섯 살의 엄마를 잃은 아이의 마음은 오직 엄마 냄새만이 위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청계피복 노조원이었노라”

마지막 인사말을 하던 그이의 아버님은, 자신과 아내가 전태일 열사의 청계피복 노조원이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두에게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버님이 거대 보수정당의 시의원을 지냈고, 그래서 정치적 입장에 따른 갈등이 있었으리라 짐작했던 모든 이들은 뜻밖의 사실에 놀랍니다. 아버님은 결연한 목소리로 진보좌파운동의 앞날에 힘을 북돋으며 모두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수 있습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그이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길, 모두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말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일상을 이어가야 할 것을 알기에, 이 순간 옆에, 앞에, 뒤에 앉은 모든 이가 애틋합니다. 실연, 그 앞에서 일상은 때론 못 견디게 비루합니다. 그러나 우린 그걸 같이 견뎌낼 것입니다. 내일은 기온이 조금 오르고, 봄비도 좀 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지가 떠난 세 번째 날이 저물었습니다.

김종옥 노동당 당원·동작당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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