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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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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아, 학교 가자

자신을 밀어낸 학교로 인권강사 돼 돌아간 장애인 K
짊어진 짐의 무게만큼 그의 삶도 땅속에 뿌리박을 것
등록 2014-03-14 14:51 수정 2020-05-03 04:27
장애인이 직접 ‘장애인 인권’에 대해 강의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노들장애인야학 제공

장애인이 직접 ‘장애인 인권’에 대해 강의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노들장애인야학 제공

K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참새떼처럼 재잘대던 아이들이 멈칫한다. 와, 장애인이다! 담임선생님이 뒷목을 잡는다. 그러나 그녀 역시 K를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K는 낯설다.

그건 K 역시 마찬가지다. 8살, 취학통지서를 받아들고 엄마는 K를 업고 학교에 찾아갔다. 혼자 다닐 수 없는 아이는 받을 수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가 말했다. 동생 입학할 때 함께 보내주마. 그때가 다가오자 이번에는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나무랐다. 동생까지 학교 다니기 곤란하게 만들면 어떻게 해. 입학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K는 무엇보다 심심했다. TV를 보다 지루하면 동네를 돌아다녔다. 빈 놀이터가 모두 K의 것이었지만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학교에 간 친구들이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꼬마들 소리만 들려도 달아나던 그 아이

긴 사춘기가 시작되었을 즈음, K는 멀리서 가방 멘 꼬마들이 몰려오는 소리만 들려도 방향을 바꾸어 달아났다. 엄마, 저 형은 왜 저래? 그 악의 없는 손가락질에도 마음이 훅 베이던 시절, 알 수 없는 적의를 누르느라 고통스러웠다. K는 꼬마들이 싫었다. 지금, 마흔 줄에 들어선 K가 10살 꼬마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2008년 노들장애인야학은 초·중·고등학교를 찾아가는 장애인 인권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초 ‘산’에서 ‘평지’로 내려온 야학이 야심차게 기획한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 야학은 15년 동안 정립회관에 더부살이로 얹혀 지냈다. 회관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면서도 아차산에 자리잡고 있어서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동네에서 밀려난 장애인들은 그 높은 곳까지 꾸역꾸역 잘도 올라왔다. 2007년 야학이 정립회관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교육청은 야학을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30년 전 자신들이 보낸 취학통지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도 그들은 미안함을 몰랐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사람들은 벼랑 끝에서 회관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대신 종로 한복판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우리는 ‘종로 100평’을 요구했다.

‘산’이 아니라 ‘평지’에서, ‘변두리’가 아니라 ‘도심의 한가운데’서 교육받을 권리. 15년을 공짜로 얹혀 지내다 쫓겨난 신세들치고는 그 요구가 발칙했다. 고작 40명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그 많은’ 국민 세금을 달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교육청이 코웃음을 쳤다. 그 지당하신 경제관념 덕에 수많은 K들이 학교와 동네에서 밀려나 눈부신 성장의 시간을 놓쳤다. 우리는 묻고 싶었다. 장학관님께서 다닌 초등학교는 평당 얼마였는지. 그렇다면 ‘비싼 땅’에는 학교가 없는지. 왜 어떤 이에게는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에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답을 해야 하는지. 80일간의 농성 끝에 기어이 우리는 대학로의 100평 교실을 ‘쟁취’했다.

이제 이곳에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호시탐탐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밀어내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먼저 이곳의 토양이 바뀌어야 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변화해야 하는 곳, K들을 추방했던 최초의 그곳, 학교로 가자. 장애인 인권교육 사업은 그렇게 기획되었다.

인권강사 K 만들기

K를 교단에 세우기 위한 속성 코스에 돌입했다. 대학교수가 법조문을 해설하고 베테랑 인권강사가 아이들을 사로잡는 비법을 전수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K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가슴 뛰는 혁명을 노래하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고, 수십 명의 천둥벌거숭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기에는 그의 팔이 너무 얌전했다. 무엇보다 K에게는 활동보조 서비스도 충분하지 않았고, 아직은 글을 읽는 것조차 버거웠다. 강의 준비는 물론이고 당일 아침 활동보조와 이동까지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야학 교사인 내가 K의 짝이 되었다. 1시간의 인권교육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K의 인생 전체가 필요했다. 우리는 오직 K만을 위한 강의안을 만들었다.

처음 중학교로 인권교육을 나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전날부터 숙식을 함께하며 연습했다. 글을 빨리 읽을 수 없는 K는 커닝 실력이 부족했으므로 대사를 통째로 외워야 했다. 나는 밤새 그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었고 동이 틀 무렵에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K의 활동보조를 했다. 봉고차 가득 중증장애인 강사들을 태워 용역처럼 ‘출동’하는 그 피곤했던 아침에는 이 사업이 이렇게 오래, 번창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분, 공부하기 힘들지요?” 아동의 ‘놀 권리’로 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동들은 잠시 들어주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찧고 까불며 권리 실천에 들어간다. 놀 권리가 금세 나의 목소리를 잠식한다. 그러다 K가 입을 떼는 순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 이 교실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장면이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든다. 잘 들리지 않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갖다 대고, 놓친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려고 미간을 찌푸리고 눈동자를 굴린다. 아이들의 오감이 활짝 열린 이 틈을 타서, 나는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같은 멋있는 말로 뒤통수를 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K가 내 뒤통수를 더 자주 친다. 자기 차례인데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천장만 바라보거나, 간신히 입을 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예상에 없던 질문을 받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늘어놓는 대답이 줄줄이 반인권적일 때, 나는 밤샘 노동의 본전 생각이 난다. K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기억력은 비상하게 뛰어나고, 차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인권의식만은 기가 막히게 균형 잡힌, 그런 사람이면 좋았으련만. K는 그저 범상하다. 내가 그러하듯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생고생을 몇 년간 사서 했다. 그것은 이 인권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차별받은 장애인 당사자를 교육자의 위치에 세우는 것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나에게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들을 넘느라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응원하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 걸음 내딛고 두 걸음 머뭇거리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K가 자신을 밀어낸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의 어깨가 조금 떨리고 있어서 좋다. 어깨에 진 짐의 무게만큼 K의 삶은 땅속으로 뿌리박을 것이다. 어떤 뿌리도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 조금씩 내려가면서 단단해지고 굵어질 것이다. 삶은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다.

사회적 약자, 주변인이라는 상징

익숙한 사고의 회로를 거꾸로 돌리고 결속의 방식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할 수 있게’ 되고, ‘비정상’의 것들이 ‘정상’이 된다. 약자를 배려하고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깨야 한다. 약자에게 주어야 할 것은 권력이고,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의 자리, 자기 울음을 우는 주체의 자리다. 오래전 밀려나고 사라진 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조합은 낯설다. 그것을 기획하는 건 상상력이지만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용기 있는 실천이다. 낯선 조합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 인권의 힘이다. 서울 대학로 한복판의 장애인 야학은 아름답다. 그리고 중증장애를 가진 인권강사 K는 힘이 세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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