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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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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악몽을 쫓아내주세요

3월15일 유성기업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당신을 ‘요정’으로 초대합니다
등록 2014-03-12 14:19 수정 2020-05-03 04:27
이정훈 전국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장(오른쪽)과 홍종인 아산공장 지회장이 지난해 10월14일 충북 옥천읍 옥각리 옥각교 옆 광고탑에 올라 유시영 유성기업 사장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이정훈 전국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장(오른쪽)과 홍종인 아산공장 지회장이 지난해 10월14일 충북 옥천읍 옥각리 옥각교 옆 광고탑에 올라 유시영 유성기업 사장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목이 아팠다. 잠시 올려다본 것뿐인데 뒷목이 당겼다. 남의 속도 모르는 차들은 고속도로 위를 질주했다. 냇가엔 버들강아지가 봄을 재촉했고 묵은 밭 비닐은 낡고 해진 모습으로 처량하게 바람에 나부꼈다. 20m쯤 될까. 아래에서 위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눈대중으로도 20m는 넘어 보였다. 광고탑은 대형 트럭이 지날 때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이런저런 일을 핑계 삼아 100일을 코앞에 두고 찾게 됐다. 아니, 의무적인 방문이 맞는 말이다. 지난 1월15일 유성기업 홍종인 지회장과 이정훈 지회장이 함께 농성 중인 충북 옥천 광고탑에 갔다. 미안한 마음에 가는 길이 거북했다.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물가에 내려가 괜히 물수제비를 떴고 돌팔매질로 애꿎은 얼음을 깼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광고탑 아래 드림캐처가 눈에 들어왔다. 인디언들이 악몽을 쫓아내기 위해 걸어둔다는 설명이 있었다. 이들에게 악몽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이들은 악몽을 걷어낼 수 있을까. 악몽에 시달리는 그 야속한 시간 속에 외면하고 데면데면했던 지난 시간 생각에 머릿속은 노을처럼 빨갛게 물들고 달리는 차량만큼 복잡했다.

한진중공업으로 희망버스가 한창 달리던 2011년, 지금부터 3년 전 일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부산까지 천 리 길을 걸었다. 9일 동안 450km를 뛰다시피 걸었다. 물집이 생기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낙오자 없이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9일 동안 9편의 글을 매일매일 쓰겠노라 한 언론사와 약속하고 떠났다. 그 가운데 두 번째 글이 유성에 관한 글이었다. 돌이켜보면 유성기업 투쟁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쓴 것 같다. 쌍용차 투쟁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희망버스에 더 많은 승객을 모시기 위해 유성 얘기를 한 것이 아닌가 죄송한 마음이 크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투쟁하는 동지들의 이야기를 애정 있게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게 유성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뭔가 불편함이 있는 사업장이다.

유성기업은 충남 아산과 충북 영동에 사업장이 있다. 아산은 쌍용차와 지척이다. 집이 충남 천안인 나로서는 생활권도 겹친다. 천안지법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날이면 1인시위 하는 유성기업분들을 마주친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지만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용역깡패의 폭력에 머리가 깨지고 구속자는 여전히 감옥에 있다. 탄원서 쓰는 일이 업무인 내가 그 흔한 탄원서 한 장 써주지 못했고 면회 한번 가지 못했다. 염치없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흔한 탄원서 한 장 못 써주고

희망버스가 유성기업으로 3월15일 출발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마음은 복잡하다. 연대를 호소하고 유성기업의 모진 탄압을 알리는 글을 써야 함에도 그럴 자신이 없다. 오히려 옷 벗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고 어떤 도움의 손길을 건넸는지 내게 물어본다. 그러나 기억은 조각나 있다.

파편 같은 기억을 더듬으면 이렇다. 가 2011년 5월24일치에서 유성기업 파업을 두고 ‘알박기 파업’이라 규정하며 맹비난을 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보고 노동계가 학습효과를 얻었다는 논리 비약까지 동원했다. 핵심 부품사를 멈춰 완성차 생산 차질을 벌이는 알박기 파업이란 것이다.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7천만원 받는 고액 연봉자들이 파업한다는 둥 얼토당토않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밤엔 잠 좀 자자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주장은 동료들의 죽음에서 비롯된 요구안이었다. 야간노동으로 인한 과로사로 동료들이 죽어갔다. 노동조합은 적어도 심야노동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주간연속 2교대제를 합의하게 된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올빼미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회사는 합의를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노조를 깨는 수순을 밟았다. 노조 파괴 전문업체인 창조컨설팅이 등장했고 원청인 현대자동차까지 개입된 증거가 확인됐다. 노조를 깨기 위해 공격적인 직장폐쇄에 이은 공권력과 용역깡패의 합동작전까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이같이 숨 돌릴 틈 없이 진행된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굳건하게 지켜냈다. 흩어지고 깨지는 노조를 지켜내기 위해 지회장 홍종인은 머리도 제대로 들 수 없는 굴다리 위와 광고탑 위에서 280일을 버티며 단결을 호소했다. 지회장 이정훈은 150여 일을 옥천 광고탑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국정감사를 3년째 하고 있지만 사업주 처벌은 없다. 국회의 권위가 자본 앞에서 한 줌 재로 변하는 순간이다. 힘을 모으고 응원의 기운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3월15일 1박2일 동안 유성기업이 있는 영동과 아산으로 희망버스가 달려간다. 모순이 집적된 곳으로 향하는 희망버스가 이번에는 유성으로 가는 것이다. 나 또한 승객으로 버스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유성에 대해 차분하게 그리고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민주노조를 다시 세우고 싸우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보고 싶다. 쌍용차 투쟁을 하면서 연대를 받은 만큼 타 사업장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 내게 차분하게 질문해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악몽 같은 시간을 이번엔 끝낼 수 있을까

내겐 9살짜리 사내아이 한 명이 있다. 이 녀석은 4살 때부터 자기 전 꼭 주문을 외운다. ‘꿈을 먹는 요정아’로 시작하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옆에서 들으면 옥천 광고탑 아래 걸려 있는 드림캐처가 생각나곤 한다. 유성 동지들의 악몽과 같은 시간을 이번엔 끝낼 수 있을까. 아니, 그 악몽의 뿌리인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을까. 희망버스 승객이 요정이 되어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악몽을 이참에 걷어갔으면 좋겠다.

밤마다 외우는 주문은 이렇다. “꿈을 먹는 요정아, 꿈을 먹는 요정아, 뿔로 된 작은 칼을 들고 나에게 오렴. 유리로 된 작은 포크를 들고 나에게 오렴. 작은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몽을 얼른 먹어치우렴. 하지만 아름다운 꿈, 좋은 꿈은 내가 꾸게 놔두고. 꿈을 먹는 요정아, 꿈을 먹는 요정아, 내가 너를 초대할게.”

유성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당신을 요정으로 초대한다.

이창근 쌍용차 해고자·트위터 @nomad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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