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무보트 1척이 표류 중인데,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1월18일 오전 9시45분께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앞바다. 악천후 속에 바다낚시에 나선 선박으로부터 해상보안청에 신고가 들어왔다. 관할 구역의 해상보안청 순시정이 급히 출동했다. 10시를 약간 넘겨 도착한 순시정 요원들은 빨간색 고무보트 안에 사람 1명이 엎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기상 조건 탓에 접근할 수 없었다. 시속 12m의 바람과 높이 2~3m의 파도, 강풍주의보와 풍랑주의보가 동시에 내려져 있었다. 그때 고무보트가 갑자기 뒤집혔다. 그 안의 사람은 물에 잠기고 말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트업체에 홍콩 출신이라고 속여 </font></font>이틀 뒤 해상보안청은 7m 깊이 바닷속에서 주검을 건져올렸다. 키 175m의 20~30대 남성, 외상은 없었다. 애초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지품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한겨울에 고무보트를 타고 낚시하러 나섰던 한 사내의 조난 정도일 수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2월1일부터다. 일본의 일부 언론이 사망자가 내각부 소속 직원이라고 보도하면서부터다. 주검 발견 당시 상황도 전해졌다. 신원 확인의 단서가 된 소지품은 신용카드였다. 현금도 있었는데, 한국돈 25만3200원이었다. 그가 입은 점퍼엔 한글 태그가 붙어 있었다. 한국이 등장했다.
2월3일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가 나왔다. 해상보안청은 1월22일 사망자 부검 당시 숨진 지 1~2주가량 지난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사인은 저체온증 또는 익사라고 했다. 발견 당시 보트 근처에서 한국산 엔진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같은 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 직원이 1월7일 한국에 체류 중이라고 내각부로 보고해왔으나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1월8~10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사회과학학회(APSSC)에 참석하겠다며 내각부의 승인을 구해 ‘출장’을 온 것이었다. 언론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이름도 밝혀졌다. 도쿄대 출신인 ㅅ(30)씨는 2010년 내각부에 채용돼 싱크탱크인 경제사회종합연구소에서 일했다. 지난해 7월엔 정부 지원을 받아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2년 예정으로 유학하던 중이었다.
미국에 유학하다가 학술회의를 이유로 한국에 온 그는 어쩌다 고무보트를 타고 후쿠오카 앞바다까지 흘러왔을까. 일본 언론이 전하는 그의 행적은 수상하기 그지없다.
ㅅ씨는 지난해 12월 초 APSSC 주최 쪽에 연락해 대학원생 신분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등록비 250달러도 미리 카드로 결제했다. 그는 일정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 열정을 보였다. 대학 방문 때 대학 박물관에 가서 근대 경제·역사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할 기회가 있느냐는 등 매우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한 달 뒤 1월3일 ㅅ씨는 한국에 입국했다. 서울 북창동의 ㅇ호텔에서 우선 하룻밤을 묵은 뒤, 이튿날 서울역 앞 후암동에 있는 ㅋ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옮겼다. ㅅ씨는 이곳에 1월4~11일 기간(7박) 동안 묵겠다며 인터넷에서 미리 예약하고 방값 지불도 해뒀다.
이틀 뒤인 1월6일 ㅅ씨는 서울의 한 보트업체를 직접 찾아갔다. 검정색 점퍼에 마스크 차림으로 낚시용 고무보트와 선외기(모터)를 샀다. ㅅ씨는 홍콩 출신의 ‘알렉스 포’(Alex Po)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를 좋아하는데, 홍콩에서는 작은 보트 낚시를 못한다”며 원하는 모델을 특정했다. 일부 구하지 못한 품목은 부산에서 살 거라고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여행 중이라, 물건은 1월8일에 부산의 한 호텔로 배송해달라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트를 어떻게 바다로 옮겼을까?</font></font>이날 오후 4시께 서소문파출소에 가서 여권 케이스 분실 신고를 본명으로 했다. 동시에 자신이 묵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호텔에 짐가방 3개를 맡기기도 했다. 이땐 가명 ‘알렉스’를 썼다. 짐을 맡은 호텔에선 여권을 엿보고 일본인임을 눈치챈 직원들이 일어로 말을 걸었으나, 영어로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짐가방엔 컴퓨터·카메라가 들어 있었고 여권과 신용카드도 있었다.
저녁엔 친구로 알려진 한국인 남성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서울에 왔으니 만나자”고 했고, 다음날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함께 시내 관광을 했다. ㅅ씨는 친구에게 “유학 중엔 일본에 돌아갈 수가 없어 미국 생활에 고민이 많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날인 1월8일은 학회 개막일이었다. 주최 쪽은 ㅅ씨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날 오후 부산 시내에서 엔진, 배터리, 케이블 등 관련 부품과 방한복 등을 카드로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에서도 ㅅ씨는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영어를 쓰며 홍콩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서울에서 주문한 보트와 모터는 예정했던 대로 이날 저녁 부산의 한 호텔에 배달됐다.
확인될 수 있는 그의 행적은 여기까지다. 1월10일 ㅋ게스트하우스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그의 모습이 찍혔다는 국내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 확실치 않다. 게스트하우스 쪽은 1월11일까지 방값을 이미 지불한 그가 퇴실 절차를 따로 밟은 게 아니어서 언제까지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남는 의혹은 무수히 많다. 보트를 어떻게 바다까지 가져갔을지부터가 의문이다. 길이 230cm에 무게 34kg인 고무보트와 엔진 및 각종 부품을 혼자서 옮기는 건 간단치 않은 일이다. 과연 일본에 가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쓰시마까지도 약 50km 거리다. ㅅ씨가 사용한 엔진의 연료 사정 등을 감안하면 길어야 7km밖에 갈 수 없었을 거라고들 한다. 부산에서 출발해 어디서부턴가 표류한 거라면 왜 후쿠오카에서 발견됐는지도 아리송하다. 기상 전문가들은 최근 해류 흐름상 훨씬 더 북쪽인 시마네현이나 돗토리현에 도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큰 배로 인근까지 접근해서 고무보트로 옮겨탄 거란 관측도 있다. 이에 근거해 ㅅ씨가 실은 중국·북한·한국 등에 고용된 스파이라는 주장도 일본 누리꾼들 사이에서 나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국으로 돌아갈 생각 없었다는 뜻 </font></font>그가 1월부터 시작하는 새 학기의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수상한 부분이다.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서울에 남겨놓은 짐은 서울에 돌아올 계획 또는 서울에 있는 척하려는 알리바이성 의도라는 추측이 있다. ㅅ씨는 정부 지원으로 유학 중이어서 합당한 사유가 없으면 귀국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대안으로 한국의 학회를 핑계로 고무보트 밀입국을 시도했다면, 그처럼 급박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여자 문제 같은 개인사와 연계짓는 이들은 이런 배경에서다.
일본 정부는 2월6일 인터폴을 통해 한국에 공조 수사를 요청해왔다. 미네소타대학에 함께 유학 중인 또 다른 내각부 직원은 동료 ㅅ씨의 사망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평범한 청년이었는데.”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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