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공기업 부채는 누구 책임인지 꼬리표를 달아야 한다. (중략)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공기업은 정부를 대신해 대형 국책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부채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2010년 10월4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
“부채 증가가 누구 책임이냐, 이런 것을 따지기보다 공공기관 스스로 개혁해나가고 정부와도 긴밀하게 협력해나가는 게 중요하다.”(2014년 1월7일 국무회의)
<font size="4"><font color="#008ABD">수익 사업 민간에 넘기겠다는 것 </font></font>공공기관의 빚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이 3년여 만에 확연하게 달라졌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공공기관 빚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한 뒤 개혁에 나서야 한다더니, 이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개혁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책임 소재를 가릴 길이 없으니 개혁 대상도 정부와 정치권은 제외되고 공공기관으로 수렴된다. 한발 더 나아가 박 대통령은 “(공공기관의 고질적인 문제를) 발본색원한다는 각오” “공공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상황이 될 것”과 같은 험악한 말을 쏟아내며 공공기관을 몰아세웠다.
칼날 위에 선 공공기관이 대답을 내놨다. 지난 2월2일 기획재정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전력공사 등 18개 부채 감축 중점관리 공공기관으로부터 제출받은 ‘공공기관 정상화대책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들 기관은 박근혜 정부 임기인 2013~2017년에 증가할 총부채를 45조9천억원으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지난해 9월 작성된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에서 추정됐던 부채 증가액(85조4천억원)보다 39조5천억원(46.2%) 줄인 수치다. 현 정부 5년간 부채가 불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 규모를 당초 우려보다 절반 가까이 줄이겠다는 뜻이다. 기재부가 지난해 12월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을 발표하며 공공기관에 지시한 감축률(30%)을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부채 증가를 주도하는 18개 중점관리 기관이) 이번 계획을 실행하면 공공기관 전체(295개)의 부채비율은 2012년 220%에서 2017년 200%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빚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공공기관이 선택한 방식은 ‘제 살 깎기’다. 간단하다. 예정된 사업은 가능한 한 늦추되, 그럴 수 없는 사업에는 민간자본을 유치해 사업비를 낮춘다. 공공성을 띤 사업을 미루거나 축소하겠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공공성 후퇴다. 이런 ‘사업 조정’이 실현되면 5년간 총 17조5천억원의 빚이 줄어들게 된다. 공공기관이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추진하거나 미루기로 한 사업이 무엇인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제출된 부채 감축 계획은 현재 ‘정상화 지원단’이 검토 중에 있으며 2월 말이나 3월 초 열리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확정된다. 그 전까지는 세부 내역을 말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다만 공공기관이 부채 규모 축소에 혈안이 된 점을 감안하면, 사업 조정의 최우선 판단 기준은 공공성이 아닌 수익성일 가능성이 높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손해가 많이 나는 사업은 늦추고, 민간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수익이 많이 나는 사업은 민간에 넘기는 것이다. 추가 부채 감축 목표(11조4천억원)를 가장 높게 제시한 LH 노조 관계자의 설명이다. “경영진이 세부 계획을 보여주지 않아 예측이긴 하지만, 임대주택은 지을 때마다 한 가구당 8600만원씩 빚이 쌓인다. 아무래도 축소되거나 순연될 수 있지 않을까. (신도시 개발사업 등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건설사는 들어오려 하지 않을 거다. 만약 이들에게 넘길 만큼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면 우리가 하는 게 부채 감축에 더 도움이 될 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공기관 금싸라기 부동산 헐값 매각 우려</font></font>에너지 공기업이 내놓은 계획에 대해선 공공성 후퇴를 넘어 우회 민영화 논란이 나오고 있다. 한국전력과 발전자회사, 한국가스공사 등이 민간과의 공동투자를 부채 감축 대안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전은 자회사 등의 지분도 민간에 팔기로 했다. 기재부는 이에 대해 “해외 자원 개발 과정에서 민간 재무적 투자자를 일부 유치하는 것은 민영화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전문가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현 정부가 공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가스 도매·판매 부문과 전력 판매 부문에도 민간사업자 참여를 확대하고 경쟁 체제를 도입하려고 해왔기 때문이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의 비판은 이렇다. “정부는 민자 발전 활성화를 통한 전력 민영화, 가스 경쟁 도입을 통한 가스공사 우회적 민영화 등을 통해 (에너지 부문에서) 공기업의 비중을 축소하고 민간자본의 몫을 키우려는 일관된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정상화 이행계획에 제시된) 민간자본 유치 역시 우회적인 민영화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의 진단도 비슷하다. “(민간에) 부분적으로 자산을 매각하거나 (민간이) 자금을 들여와서 경영에 참여하다보면 공공기관 민영화에 대한 우려가 나올 수 있다. 공기업이 이윤 획득을 추구하면서 본래의 공적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
자산 매각 계획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공기관은 본사 부지 등을 팔아 7조4천억원의 빚을 갚겠다고 밝혔다. 지방으로 옮겨가는 공공기관이라면 어차피 혁신도시특별법에 따라 이전한 뒤 1년 안에 기존 본사 부지를 매각해야 한다. 대부분은 제대로 값을 받기 위해 파는 방식과 시기를 고민해오다 이번에 매각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은 터라 서울이나 수도권 한복판에 있는 대규모 부동산을 제값 받고 팔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가격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수백억~수천억원대를 웃도는 부동산을 살 여력이 있는 매수자는 외국자본이나 국내 대기업 정도다. 오는 11월 전남 나주로 이전하는 한전이 이번에 매각 대상에 포함시킨 서울 강남구 삼성역 인근 본사 사옥은 장부가만 2조원이 넘는다. 이곳을 두고 벌써부터 삼성역 일대를 ‘삼성타운’으로 조성하려는 삼성그룹과 모든 계열사가 입주하는 신사옥을 지으려는 현대차그룹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부동산 업계에 파다하다. 강 교수는 “한전의 본사 사옥처럼 공공기관의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는 건 결국 한국에선 재벌이나 대기업이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제값을 받지 못하고 급하게 팔면 특혜 논란이 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민의 비용 부담만 증가할 것”</font></font>공공기관들은 올해 교육비·보육비·의료비·경조사비·주거비·퇴직금 같은 복리후생 제도를 손질해 1년 전보다 1600억원(방만 경영기관 20곳 포함 총 38곳)을 아끼겠다고도 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공공기관 파티는 끝났다”며 공공기관 개혁의 명분으로 과도한 복리후생 등 방만 경영을 내세워왔지만, 실제 이를 바로잡은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논란에 휩싸인 공공기관 부채 감축안에 대해 정부는 공공기관이 스스로 준비한 ‘셀프 개혁’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기재부는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의 첫 번째 원칙으로 공공기관의 자구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은 짜인 각본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기재부의 ‘부채 감축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면 사업 조정과 관련해 “민간자본을 활용할 수 있도록 사업 방식을 변경하라”고 적극 권고하고 있다. 자산 매각과 관련해서도 “공공서비스 제공을 위해 필수적인 자산 이외의 자산은 원칙적으로 매각 계획을 부채 감축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고 정한 뒤 “시장가격으로 매각 가능한 우량 자산을 우선 매각하라”고 지시했다. 알짜 부동산·지분부터 팔라는 뜻이다. 특히 법적·제도적 절차를 준수했다면 자산 매각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해도 책임을 면제해주겠다고 명시했다. 헐값 매각 논란에 휘말릴 걱정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자산을 팔라는 것이다.
개별 공공기관이 세부 이행계획을 짤 때도 정부는 깊숙이 개입했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주무부처와 계속 상의했다. 그쪽에서 ‘이 정도 수준은 최소한 돼야 한다’는 게 있어서 협의를 통해 (실행계획을) 넣거나 뺐다”고 했다.
국가채무를 뛰어넘는 공공기관 부채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넓다고는 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급하게 개혁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속내는 뭘까.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의 분석은 이렇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등으로 공공부문 부채가 많이 급증했다. 여기에 선을 긋기 위해 공공개혁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게다가 언론도 (개혁에) 박수를 치고, 국민은 공공기관에 돌을 던지고 있지 않나. 국민적 지지를 받기에도 좋다.”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루기 쉬운 공공기관에 채찍을 휘두르며 개혁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실리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원래 민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에 공공기관 자산 등을 매각하면 세외 수입을 얻을 수도 있다. 지지율과 돈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식 공공기관 개혁이 단기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어도 결국 공공서비스가 축소되면 국민의 비용 부담만 높아질 것이라고 진보 진영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부채 감축 대안은 공공기관 거버넌스 혁신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공공기관은 기재부 주도하에 나랏빚을 대신 짊어졌다. 그러니 공공기관 내부에서만 부채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면 답을 찾을 수 없다. 개별 공공기관 이사회와 (공공기관을 통제하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관료가 아닌 소비자 등 이해 관계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박통 “진돗개 정신으로 해야 한다”</font></font>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모인 ‘양대 노총 공동대책위원회’는 2월5일 성명을 통해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 이행계획을 “국부 유출과 민영화 사전 작업”이라고 비판하며 총파업, 단체교섭 거부, 경영평가 거부 등 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철도노조 파업을 단번에 제압한 성공 경험이 있는 정부는 눈 깜짝하지 않고 계획을 밀어붙일 기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정부 합동업무보고에서 공공기관 개혁이 첫머리에 들어가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해 “진돗개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나갈 때까지 안 놓는다고 한다. 진돗개 정신으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해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정부의 공언대로 공공기관의 파티는 끝났다. 그러나 칼춤을 추며 잇속을 챙기는 정부의 파티는 이제 시작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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