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6일 중소기업중앙회의 ‘통상임금 설명회’에는 노사 관계자 200명이 참석해 북새통을 이뤘다. 고용노동부가 1월23일 새로운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통상임금 지침)을 내놓고 처음 설명하는 자리였다. 26년 만에 대폭 변경한 통상임금 지침을 임금근로시간 개혁추진단의 강검윤 사무관이 설명한 뒤 질의를 받았다. 질문은 ‘정기상여금의 재직요건’과 ‘근로 관행’으로 집중됐다. 노동부가 대법원 판례를 확대해 지급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주도록 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서 제외(재직요건)한다는 기준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근로 관행만 있어도 신의칙 법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노동부 지침도 대법원 판례를 크게 확대한 부분이다. 노동부가 또다시 기업 편에 서서 ‘통상임금 방패막이’로 나선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순진하게 믿었다가 국가 상대 손해배상 하면?</font></font>
통상임금은 각종 법정 수단을 계산하는 기준임금이다. 통상임금이 오르면 연장·야간·휴일 수당 등 각종 수당이 인상된다. 문제는 통상임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로기준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1988년 노동부가 통상임금 지침을 내놓았다. 기본급은 통상임금이지만 상여금·가족수당 등 생활보조적·복리후생적 급여는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게 핵심이었다. 그 해석은 지난 26년간 유지됐다. 그 결과 기업은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기본급을 고정하고 상여금·복리후생비를 추가하는 편법으로 임금 총액을 올려왔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임금 총액에서 기본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도 못 미치는 기형적 구조가 탄생한 이유다.
노동부와 달리, 대법원은 1990년대부터 통상임금 범위를 점차 확대하는 판례를 내놓았다. ‘평균적 노동의 대가’라는 통상임금의 본래 취지를 반영한 조처였다. “구단주가 프로야구 선수와 연봉 계약을 맺을 때 선수의 능력이나 성실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운동의 대가로 미리 정한 연봉, 그것이 통상임금이다.”(김지형 전 대법관·현 지평지성 고문변호사) ‘명칭이 무엇이든’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이라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게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법률 해석의 최종 기관인 대법원이 이렇게 판단했지만 노동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통상임금 지침이 제정된 뒤 네 차례나 개정됐는데도 체력단련비·통근수당·가족수당·교육수당 등 대법원이 인정한 통상임금을 하나도 포함하지 않았다. 당시 노동부 관계자의 말이다. “(대)법원 판결로 통상임금 범위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섣불리 (통상임금 산정 지침을) 변경하면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통상임금 지침은 법적 구속력도 없는데 대법원 판례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노동부의 ‘직무유기’ 때문에 기업 쪽은 대법원 판례를 거부할 명분을 얻었다. 이에 정기상여금과 수당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은 한국GM·현대자동차 등을 상대로 근로자들이 ‘체불임금’ 집단소송에 나섰다. 이철수 서울대 교수(법학)는 “현대차의 사례처럼 순진하게 노동부 예규만 믿었다가 2조원 이상의 임금 부담을 새로이 안게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라고 비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재직요건 적용하면 포함되는 정기상여 1/3 돼</font></font>
손해배상 책임이 두려웠던 것일까? 노동부는 새로운 ‘묘안’을 내놓았다. 바로 재직요건이다. 대법원 판례는 명절상여금·휴가비 등 복리후생비가 지급 시점의 재직자에게만 지급되는 경우 통상임금에서 제외한다(지급요건)고 판결했을 뿐이다. 그런데 노동부는 통상임금 지침에서 재직요건을 정기상여금에 확대 적용했다. 퇴직자에게 지급하지 않는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못박은 것이다. 그러면 통상임금에 포함되는 정기상여금이 3분의 1로 줄어든다. 노동부가 지난해 6월 정기상여금을 주는 578개 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38%만 퇴직자에게도 근무일에 비례해 정기상여금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가 규정한 근로자의 임금 청구권을 제한할 수 있는 ‘어떤 경우’도 노동부는 넓게 해석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18일 전원합의체에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도 신의 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위반했을 때는 근로자가 체불임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신의칙 법리). 신의칙 법리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정기상여금을 대법원 판결일(12월18일) 전 노사가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합의해 임금 조건으로 정했다. 둘째, 뒤늦게 근로자가 합의 무효를 주장하며 추가 임금을 청구한다. 셋째, 추가 임금 때문에 회사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발생한다.
노동부는 첫 번째 조건을 집중 공략했다. 통상임금 지침을 보면 통상임금과 관련한 노사 합의에 노동부는 ‘묵시적 합의나 근로 관행’까지 포함시켰다. 대법원 사건(갑을오토텍)은 노조가 단체협약을 통해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명시적으로 합의’한 사건이었는데도 말이다. 김성수 지평지성 변호사는 “명시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근로 관행이 있다는 이유로 신의칙 적용을 단정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월25일 국민총파업</font></font>
노동부가 꼽은 근로 관행의 대표적 유형은 ‘취업규칙’이다. 취업규칙은 노동자의 임금 산정 등 노동조건을 적은 문서지만 노사가 합의하는 단체협약과 달리 회사 쪽이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정한다. 노동부는 취업규칙에 노동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신의칙을 적용하라고 명시했다. 다만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밟으라고 주문했다.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취업규칙은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규정(94조) 때문이다. 권혁 부산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기업 쪽에서 이번 노동부 지침을 통상임금 쟁점을 간편하게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신의칙 법리가 적용되는 기간도 늘렸다. 대법원은 12월18일 판결을 기준으로 ‘이후 합의’부터 신의칙이 적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노동부는 ‘노사가 과거 합의한 임단협이 만료되는 시점 이후’로 새 기준을 세웠다. 임단협 교섭이 3월부터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기업 쪽에 유리한 지침이다.
‘기업가 정부’의 본색이 드러나자 노동계는 대정부 투쟁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월25일 국민총파업을 열고 이후에도 정부의 통상임금 정책에 변화가 없으면 또다시 총파업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부의 통상임금 노사지침에 대한 대응 전략을 전달하고 노사 임금 지침에 대한 행정소송도 제기할 방침이다. 떼인 임금을 받는 게 참으로 험난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구민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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