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환자는 거수.” 고된 훈련 뒤 군의관이 순회진료를 돌며 병사의 안전을 살핀다.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이등병에겐 찜질팩이 처방되고 독한 감기에 걸린 병사에겐 현장에서 직접 주사를 놓아준다. MBC 예능방송(‘진짜 사나이’)의 한 장면이다. 예비역들은 살풍경한 내무반에서 이뤄지는 훈훈한 왕진을 댓글로 성토한다. “저런 거 처음 봄ㅋㅋ.” “영화 찍나요?” “보통 점호를 9시 반쯤 하는데…. 그때까지 영내에 군의관이 있겠냐.” 방송의 무대가 된 육군 화룡대대 등 일부 부대에선 순회진료가 ‘실화’라지만 대부분의 부대에선 겪어본 적 없는 친절이기 때문이다.
노충국 사건, 그 후 10년왕진하는 군의관보다 현실에 가까운 것은 면박 주는 선임병이나 간부다. 2011년 2월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정아무개(20)씨는 중이염으로 외진 신청을 했다가 소대장으로부터 폭언을 들었다. “왜 자꾸 떼를 쓰냐. 야 인마! 군의관이 문제없다고 하는데 왜 자꾸 가려고 해. 너 앞으로는 귀 아픈 것으로 외진 갈 생각 하지 마.” 폭언 이튿날 정씨는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 해 4월에는 육군훈련소에서 야간 행군 뒤 고열에 시달리던 노아무개(23)씨가 호흡곤란으로 숨졌다. 노씨는 당시 뇌수막염을 앓고 있었지만 의무병으로부터 타이레놀 두 알을 처방받았을 뿐이다. 노씨가 생사를 넘나든 새벽 3시께 당직 군의관은 퇴근한 뒤였다.
징병제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병사들의 건강권은 오랜 숙제다. 2005년 군에서 오진을 받고 제대한 뒤 위암으로 숨진 노충국씨 사건으로 군대 내 건강권 문제가 환기된 이후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바뀐 것은 많지 않다. 2008~2012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군 관련 인권침해 진정 1070건 가운데 건강·의료권 침해 관련 진정은 전체의 16.8%(180건)를 차지한다. 그 수도 2008년 10건에서 2012년 43건으로 4배나 늘었다.
군 의료에 대한 불만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2013년 7~11월 인권위가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에 의뢰해 훈련소 3곳, 군부대 5곳, 군병원 5곳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군 의료관리 체계에 대한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군병원 입원 경험이 있는 응답자 312명 가운데 48.1%는 ‘입대 뒤 군 의료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군 의료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원활한 진료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38.2%)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군의 1차 진료는 대대 의무실, 사단 의무대에서 이뤄진다. 전방이나 오지에서 근무하는 경우 간단한 1차 진료조차 제때 받기 어렵다. 육군 전방 경계초소(GP)에는 군의관이 없다. 전방 관측부대(GOP)에서도 군의관 한 명이 여러 부대를 담당한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병사는 “GOP 순찰 중 발목을 삐고도 순찰을 돌았다. 의무병을 부를 여건이 안 돼 파스를 발랐다. 다친 지 6일 뒤에 의무병이 와서 파스와 붕대 조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군의관 만나려 한 달 넘게 기다리기도정해진 외진 날짜도 군인들의 건강권을 위협한다. 사단 의무대 등으로의 외진은 대개 일주일에 한 차례 허용된다. 외진 차량에 탈 수 있는 인원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운 좋게 외진을 가더라도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진료를 받지 못하거나 진단에 필요한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재방문까지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이등병 시절 허리디스크 증상이 나타난 ㄴ씨에게 1년여 치료 기간의 대부분은 ‘대기시간’이었다. ㄴ씨는 첫 GP 근무 중 요통을 느꼈다. 두어 달을 참다 의무대를 찾았다. 허리디스크가 의심된다며 자기공명영상(MRI)을 찍도록 했지만 대기자가 많아 한 달 뒤에나 찍을 수 있었다. 날짜가 근무 일정과 겹쳐 포기했다. GP 근무 투입 뒤엔 심해진 통증에도 불구하고 제설작업까지 맡았다. 걷지 못할 지경이 된 뒤에야 소대장에게 철수 의사를 밝혔지만 “앰뷸런스 후송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듣고 약에 의지해 누워 지냈다. 열흘 뒤에야 순회진료 온 군의관을 만났다. 이후 군병원에 후송된 뒤에도 MRI 촬영을 위해 한 달여를 기다려야 했다.
ㄴ씨가 특별한 경우는 아니다. 조사에 참여한 병사 10명 중 4명 이상은 ‘진료를 신청한 뒤 군의관을 만나기까지 이틀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답했다. ‘하루 안에 진료를 받았다’는 응답자는 55.7%, ‘2~3일 지난 뒤 진료를 받았다’는 응답자는 19.5%다. ‘한 달 이상 기다렸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4.2%를 차지한다. 적절한 진료를 받기도 전에 병의 경과가 나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군 의료인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실태조사에서 의무병의 43.9%, 군의관 등 의료인의 71.1%는 ‘군 의료인력 수급이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절대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업무는 그나마 있는 효율을 해친다. “아침 일과 시작 후 1시간 반, 저녁 일과 종료 전 1시간, 총 2~3시간의 회의가 매일 있다.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에는 진료실을 비울 수밖에 없다. 그 원망은 모두 군의관이 들어야 한다.” “이런저런 훈련을 모두 나가다보면 의무실을 지키는 시간은 전체 일과 시간 중에서 절반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군의관이 한 중대의 훈련을 따라나가 대기하면 남은 중대의 환자들이 의무실을 찾아도 이들을 봐줄 군의관이 없다.” 군의관들의 하소연이다.
복잡한 행정 절차도 응급진료의 걸림돌로 꼽힌다. 진료의 촌각을 다투는 긴급 상황에서도 ‘보고’를 강요하는 군대 문화 때문이다. 한 군의관은 이렇게 말했다. “병사를 헬기로 후송한 적이 있는데 일이 끝나고 나서 살펴보니 그날 받은 전화가 70통이 넘었다. 5분씩만 통화를 해도 6시간 동안 통화한 꼴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응급처치란 말인가?” 또 다른 군의관 역시 조사에서 “군의관 판단보다 비의료인인 간부의 판단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있다”고 토로했다.
진료보다 회의·보고가 우선시되는 현실무엇보다 군대 내 집단주의 문화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백약이 무효하다. 군 의료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한 병사의 45.8%는 ‘아프다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아프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아프다고 하면) 선임들이 꾀병이라고만 하고 혼을 내며, 진료를 받고 오면 ‘꿀 빠네’(팔자 좋네) 이런 식으로 질타를 합니다.” “아프면 죄짓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병영 문화를 서둘러 개선하기 어렵다면, 건강과 관련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 절차부터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실태조사 책임자인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은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장병들은 부상과 질병에 직면한다. 신속하게 대처해 장병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1차적 의무다. 아울러 군 전력 강화와 같은 안보 차원에서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라고 지적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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