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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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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버려야 협상? 원하는 게 투항인가

카친 반군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 “우린 정치 협상 위해 무장투쟁
앞뒤가 틀렸다”
등록 2014-01-15 15:15 수정 2020-05-03 04:27
카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를 방어하는 라와양 전선에서 반군 병사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카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를 방어하는 라와양 전선에서 반군 병사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카친주에서 피란민(IDPs)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반군 수도 라이자다. 거주민의 2배를 웃도는 약 2만 명의 피란민이 정착한 이 도시에서는 1961년 이래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여온 카친독립기구(KIO)가 사실상 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 경찰서, 이민국, 법원 그리고 마약·인신매매 사범 등이 갇힌 보호감호소와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라이자 병원까지 모두 ‘KIO 정부’ 관할이다.

KIO의 중추적 존재는 군사부인 카친독립군(KIA)이다. 카친주 일부와 샨주 북부에 총 5개 여단 1만여 명의 정규군이 포진해 있고, 비슷한 규모의 예비군과 ‘카친민병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 이미지가 강한 테인세인 대통령은 2010년 9월 총리 시절 이 카친반군을 “뿌리 뽑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8년 통과된 신헌법에 따라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을 국경수비대(BGF)로 전환시키려는 정부 계획에 KIO가 반발하며 데드라인을 넘긴 탓이다.

“우리가 1994년 휴전을 맺고 헌법 기안을 위한 ‘전민족대표자회의’에 10여 년간 참여해온 건, 자치를 일궈내기 위한 정치 협상의 지난한 과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 접경지대에서 펼쳐지는 고지전

KIA 부사령관 군모 소장은 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인터뷰 기사 참조). 그러나 14년이 걸려 기안한 헌법은 소수민족 자치보다는 버만족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추구했고 카친은 이에 반발했다. 금광·목재·옥 등 카친주의 풍부한 자원까지 분쟁의 촉매제가 됐다. 2011년 6월9일, 정부군이 카친 동남부 모막 타운십을 공격하면서 17년 휴전은 막을 내렸다.

2013년 11월 중순, 라이자에서 8km가량 떨어진 라와양 전선으로 향했다. 라와양은 KIA 2여단 관할이지만 현재 ‘수도방위특별사령부’가 철통 방어 중이다. 전선은 평지 마을과 이를 둘러싼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군과 반군이 봉우리 대 봉우리로 대치 중인 그 틈새에서 중국 업체 하나는 금광 채굴 사업을 하고 있었다.

2012년 12월 중순부터 격화된 교전에서 정부군은 공습까지 감행하며 라이자를 집중 압박했다. 봉우리와 산등성을 오르내리는 게릴라식 지상전까지 벌이며 양쪽은 ‘봉우리 탈환전’을 펼쳤다. 2013년 1월18일, 라이자에서 10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라자양 전선이 정부군에 함락됐다. 그제야 테인세인 대통령은 ‘라자양 휴전’을 선언했으나 의미 없는 휴전은 불신만 더 키웠다. 이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카야 붐(Bum·봉우리라는 뜻)까지 정부군에 넘어갔다. 카야 붐이 넘어가면 라이자도 위험해진다고 예견했던 바지만, “공습 때문에 저항이 불가능했다”는 게 전략 사령관 자우콩 소장의 설명이다. 이후 KIA는 1~2km 떨어진 라와양으로 후퇴해 전선을 재정비했다.

“우리는 사정거리 1~2km밖에 안 되는 60mm 박격포를 하루 10개쯤 쐈는데 버마군은 사정거리가 그 10배가 넘는 120mm 곡사포를 하루 1천 발도 더 발사했다. KIA 생활 35년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라와양 전선만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며 자우콩 소장이 덧붙였다. 냉정히 말해 더 밀릴 곳은 없어 보였다. 중국 국경이 코앞이라는 사실이 정부군의 공격을 상쇄시킬 뿐, 라이자 시내가 전선이 될 판이다. 실제로 전선에서 10km 안팎에 위치한 라이자는 정부군이 쏘는 120mm 곡사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2013년 1월14일 민간인 3명이 목숨을 잃고 4명이 치명상을 입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정부군 참모총장 민아웅라잉은 “최대한 자제하다가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전 재발 뒤 정부군 1천여 명 사망

봉우리들을 탈환한 정부군도 큰 대가를 치렀다. (SHAN)가 정부군 동북부 사령관 아웅소 준장의 말을 간접 인용한 바에 따르면,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정부군 병사 1천여 명이 사망했다. 아웅소 준장은 “경험 부족으로 병사를 많이 잃었지만 중화기와 공군력의 도움으로 주요 거점을 탈환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묘사였다. 미성년 납치를 포함해 강제징집으로 40만 대군을 채워온 버마군의 국방비는 2011년 현재 국가 예산의 23.6%나 된다. KIA 쪽 사상자 통계는 출처에 따라 진폭이 크다. 내전 재발 뒤 2012년 9월까지 1년3개월간 약 7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었고, KIA 부사령관 군모 소장은 기자에게 367명 사망, 700여 명 부상이라는 수치를 줬다. 반군의 ‘사전 경보’ 시스템으로 민간인 사망을 최소화했지만 영토를 잃고 10만여 피란민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고려하면 카친족이 치르는 대가 역시 혹독한 것이다.

그러나 내전 재발이라는 위기 상황은 지난 2년여간 카친족을 전례 없이 단결시키고 있다. 한때 KIO로부터 협박까지 받았던 한 카친 언론인의 표현을 빌리면 KIO는 요즘 “역사상 최고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흩어져 있던 카친 젊은이들도 제 발로 반군 영토를 찾고 있다. 2013년 11월, 군사훈련을 포함해 45일간의 ‘청년교육경제개발과정’(EEDY) 훈련을 받던 200명가량의 젊은이들도 그런 경우다.

라와양 전선 둘쨋날, 이른 아침 마셍 붐에 올랐다. 이곳에서 5분가량 더 들어가면 버마군 초소가 나온다고 봉우리 대장 카렝다우콩 대위가 귀띔했다. 봉우리를 하나씩 탈환하던 정부군의 공습은 이 마셍 붐에서 멈췄다. 이후 마셍 붐은 수도 방어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서로 목소리가 들릴 만큼 근거리 대치 중인 양쪽 병사들은 “치킨커리 만들었는데 좀 먹을 테냐?”류의 농담도 주고받는단다.

“11월8일 저녁 8시35분께 버마군 쪽에서 소총을 몇 발 쐈는데 대응하지 않았다.” 2여단 6대대 소속 모론노아웅 대위는 이 도발이 2013년 1월 대전투가 잠잠해진 이래 두 번째라고 말했다. 첫 번째 도발은 2월4일 오후 1시께, 중국 정부의 중재하에 KIO와 정부가 중국 쪽 국경도시 루이리에서 휴전을 논의하던 중에 발생했다. 1월 정부군 총탄 세 발이 중국 영토 안에 떨어지자 이에 격노한 중국은 버마 정부에 항의한 뒤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이후 협상 테이블과 교전 현장은 여전히 따로 가고 있다.

2013년 10월 이래 전투가 치열한 3여단 구역 만시 타운십을 보자. 10월8일부터 3일간 카친주 주도 미치나에서 열린 협상에서 정부 쪽은 KIO 쪽에 남부 ‘만시제캄’ 도로에서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목은 ‘대중교통이 무난히 다닐 수 있게 하자’였다. 이 도로는 KIA 3여단이 관할하는 카친 남부와 4여단이 관할하는 샨주 북부의 연결로이자 벌목재들이 지나는 주요 통로라 KIO 쪽에 통관세를 많이 안겨주던 곳이다. 그러나 KIO는 정부 쪽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들이 통치하던 인근 마을 10곳에서도 철수했다. 그 빈자리를 ‘대중교통’ 대신 정부군 트럭과 물자들이 서서히 채우기 시작했다. 이내 벌어진 정부군 공격은 10월22일 뭉딩파에 이어 11월17일 피란민 캠프가 있는 남림파까지 이어졌다(제991호 세계 ‘카친의 평화, 정글에서 길을 잃다’ 참조).

‘공익’ 앞세워 반군 철수 요구하더니…

“이미 9월부터 버마군이 그 부근으로 이동 중이었고 10월8일 미치나 협상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거라 예상도 했다. 협상 전 KIO 대표단에게 그 도로를 내주는 게 위험하다고 브리핑도 해줬다.”

3여단장 통라 대령의 강변은 카친 진영에서도 현장 사령관들과 협상 대표 간에 간극이 없지 않음을 암시했다. 동시에 위험을 알고도 정부 쪽 요구에 응한 카친의 딜레마도 반영돼 있다. 통라 대령조차 도로를 내준 게 실수라기보다는 국제사회가 환영해 마지않는 평화협상 과정에 KIO가 적극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변호했다.

2014년 1월 현재,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지 않은 소수민족 무장단체는 KIO와 규모가 작은 팔라웅해방전선(PSLF)뿐이다. 2013년 7월 영국을 방문 중이던 테인세인 대통령은 “전국 휴전(Nation-wide Ceasefire)이 몇 주 안에 가능할 것”이라며 듣기 좋은 연설을 했고, 카친 남부 교전이 악화되기 시작한 10월 전후로는 ‘전국 휴전’이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단 듯 보였다. 군사적 열세에 거점을 잃어가는 카친으로서도 휴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 17년의 휴전 기간에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내전으로 되돌아온 경험이 있는 탓에 카친 사회에서는 ‘무늬만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휴전에 서명한 10여 개 단체 중에는 ‘자치’를 의제로 제대로 된 ‘정치 협상’을 벌이는 곳도 없다.

“휴전 기간에 총성만 잦아들었을 뿐 더 많은 정부군 초소와 군인들이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했다. 군인들이 종교(기독교) 행사장에 난입하는가 하면 여성들은 성폭행에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수많은 KIA 병사들이 잡혀갔지만 휴전 상황이라 KIA가 할 수 있는 대응은 거의 없었다.”

한때 포터로 끌려가기도 했던 라이자 성당 응비 조셉 노(57) 신부의 증언은 ‘휴전 사인 행사’의 위험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KIO가 2013년 10월30일부터 4일간 20개 무장단체를 라이자로 초청해 ‘전 소수민족 무장단체 회의’를 주최한 것도 이런 고민에서 나온 전략의 일환이다. ‘전국 휴전’에 앞서 소수민족들이 요구해야 할 정치적 의제를 단일화해 ‘정부 vs 전 소수민족연합’이 협상하자는 것이다. 이 회의 결과 중 단연 주목할 건 ‘10만 명 규모의 연방군 창설안’이다. 그러나 ‘연방군’ 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현재로선 제로다.

‘정치 협상’ 전제조건은 무장해제

‘라이자 회의’를 앞둔 10월25일 정부 협상단이 미얀마평화센터(MPC)를 통해 보낸 제안서에 따르면, ‘정치 협상’은 소수민족 군대의 사실상 무장해제를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다. 라이자 회의 직후 11월4일 정부 쪽과 소수민족 대표단이 다시 마주한 미치나 협상에서도 정부군 북부사령관 민소 준장과 국경부 장관 텟나잉윈 역시 ‘무장해제안’이나 다름없는 반군의 ‘무기 반납’을 요구했다. 그리고 12월15일, 군 참모총장 민아웅라잉은 카렌주 군인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또다시 소수민족들의 무장해제를 언급했다. 정치적 의제를 갖고 무장투쟁을 벌여온 이들에게 무장해제를 전제로 한 협상이 진척될지 의문이다. 정부군의 ‘불통 협상’에 유럽연합(EU)이 2012년 이래 쏟아부은 평화협상 비용 1600만유로(약 230억원)가 찢어진 휴지 조각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이유다.

라이자·마이자양(버마 카친주)=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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