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에도 아랑곳없었다. 전날 문을 연 모델하우스에는 방문객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1층 분양 상담 창구는 빼곡히 들어찼고, 2층 견본주택도 쉴 새 없이 북적였다. ‘1월=분양시장 비수기’라는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생활 공간, 교통편, 주변 편의시설을 꼼꼼히 따져보는 실수요자도 적지 않았다. 김주철(42·가명)씨는 자녀들과 주말 나들이를 나왔다가 모델하우스에 들렀다고 했다. 20년 넘은 낡은 아파트를 떠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용면적 84.9㎡(약 25평)에 4억3500만원이면 턱없이 비싸지는 않다. 게다가 아이들 학교와도 가까워 ‘청약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곁에 있던 그의 아내도 “우리가 살 집이라서 (가격이) 지금보다 크게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설명을 붙였다. 모델하우스를 개장한 첫 주말 이틀 동안에만 1만 명 가까이 다녀간 것으로 분양업체 쪽은 추정했다.
#장면2. 1월15일 서울 마포구 ‘DMC공인중개사무소’공인중개사 이순이(46)씨는 온종일 분주했다. 평일인데도 1시간 간격으로 상담 고객이 찾아왔다. 젊은 직장인도, 70대 노인도 아파트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전세 보증금을 더 올려주고 계속 살아야 할지, 빚내서라도 내 집을 사야 할지 고민했다. “매물이 없으니 살 거면 빨리 사는 게 좋다”고 이씨가 조언했다. 고객과 집을 보러 나가는 출장도 잦았다. 한 주부는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3월 전에 집을 사고 싶다”며 6억원이 넘는 30평대 아파트를 찬찬히 둘러봤다. 전화는 수시로 날아들었다. 반나절 동안 12통의 아파트 매매·전세 계약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업계 용어로 ‘정전’이라고 할 만큼 매수 문의가 바짝 말랐던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는 “예전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살 수 있는 ‘매수자 시장’이었다. 지금은 물건을 가진 집주인이 의기양양해지는 ‘매도자 시장’이 시작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의 업무는 해가 진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됐다.
쏟아지는 수도권 분양아파트주택시장이 올 들어 꿈틀대고 있다. 분위기 반전의 신호는 신규 아파트 공급 시장인 분양시장에서 먼저 읽힌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의 조사 결과, 올해 65개 민간 건설사가 전국에 20만5327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할 계획인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보다 3.8% 증가했다. 수도권 공급 물량은 대폭 늘어난다. 재개발·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지난해보다 39% 급증한 10만3461가구가 쏟아진다. 조성근 부동산114 선임연구원의 분석이다. “지난해 위례신도시·판교 지역 등은 청약 경쟁률이 높았다. 건설사들이 그 기운을 이어가려고 연초부터 공급을 늘리고 있다. 경기침체로 그동안 미뤄왔던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재개하는 곳도 있다.” 건설사들이 올해 주택시장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1월에 분양한 아파트 단지 중 ‘완판’되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고, 준공 뒤에도 팔리지 않던 ‘악성 미분양’ 아파트도 조금씩 소진되고 있다.
주택 매매시장에서 아파트 거래도 늘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월21일까지 서울에서만 3154건의 아파트가 거래됐다. 지난해 1월 한 달간 거래량(1134건)의 3배 가까이 된다. 거래가 늘어 가격도 뛰었다. 1월13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 가격은 한 주 만에 0.08% 올랐다(한국감정원). 주간 단위로는 지난해 10월 셋쨋주 이후 가장 높은 상승폭이다. 전국적으로도 아파트 매매 가격은 0.09% 올랐다. 연초 이후 아파트 가격 흐름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상승세’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건국대 부동산·도시연구원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부동산시장 모니터링그룹’ 소속 전문가 86명 중 51.2%는 ‘올해 부동산 매매시장이 상승한다’고 내다봤다. 보합은 30.2%, 하락은 18.6%였다.
매수 문의에도 집 안 파는 하우스푸어주택 거래가 활성화 조짐을 보이는 건 정부가 추진해온 주택정책의 약발이 조금씩 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1년간 ‘4·1 주택시장 정상화 종합대책’ ‘8·3 전·월세 대책’ 등을 내놨다. 이름은 달라도 하나같이 주택 매매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부양책이었다. ‘대못’으로 지목된 규제들을 없애는 법안이 대부분 국회의 문턱을 넘었다. 그 결과 올해부터 취득세는 영구히 절반가량으로 낮아지고 다주택자는 양도세를 더 내지 않아도 된다. 무주택자 등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도 쉬워졌다. 김지은 주택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의 평가는 이렇다. “정부가 세제·금융 지원책을 잇달아 내놓은 덕에 소비자들의 시장 진입장벽이 많이 사라졌다. 여기에 ‘부동산 바닥론’까지 나오자, 전세 가격이 많이 오른 지역을 중심으로 거래가 살아나고 있다.”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도 1월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부동산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로 작년보다 부동산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규제 완화의 효과를 자신했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주택시장의 ‘온기’를 누가 누리게 될까. 정부는 주택 매매 활성화의 명분으로 ‘하우스푸어(주택을 보유한 빈곤층) 구제’를 내세워왔다. 하우스푸어의 아파트를 누군가 사줘야 그들이 빚을 청산하고 재기할 수 있으니, 매수세가 살아나도록 떨어진 아파트 가격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지난 1월6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선 ‘1천조원 가계 대책=부동산 매매 활성화’ 원칙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박 대통령이 “어렵게 빚을 내 집을 장만했는데 이자를 갚느라 쓸 돈이 없다보니까 소비가 안 되고 내수도 살아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측은 빗나가고 있다. 상당수 하우스푸어는 모처럼의 매수 문의에도 꿈쩍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기철(42·가명)씨는 ‘아파트’란 단어만 떠올려도 목에서 신물이 올라온다. 2008년 3억원을 주고 경기도 파주의 112㎡(약 34평) 아파트를 산 상태에서, 2011년 같은 지역의 129㎡(약 39평) 아파트를 4억원에 분양받은 게 화근이었다. 함께 사는 부모님과 커가는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분양 대출금 2억4천만원은 34평 아파트가 나가는 대로 갚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3억원에서 2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래도 팔리지 않았다. 이자로만 한 달에 72만원이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난해 말부터는 한 번씩 ‘팔겠느냐’는 문의가 온다. 그러나 그는 아직 집을 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매매가 2억5천만원이 ‘마지노선’이다. 지난 몇 년간 잃어버린 1억원을 생각하면 팔 수가 없다. 2008년부터 1억3천만원의 빚을 악착같이 갚아왔는데, 이제 와서 (34평을 팔고도) 빚이 남는다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
여전한 고통…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아파트 가격이 부동산에 거품이 잔뜩 끼었던 2007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하우스푸어가 손해를 보더라도 집을 팔고 빚을 갚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다. 서민금융 전문가인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현재 하우스푸어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했다.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한다. 한때 더 높은 호가가 왔다갔다 했는데, 지금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고 파는 게 심리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는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는 하우스푸어의 심리적 편향을 정부가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주택 가격이 오른다는 신호를 과도하게 보내고 있다. 정부의 신호는 ‘주택 가격은 무조건 오르게 돼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하우스푸어의 심리적 기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정부가 하우스푸어를 돕겠다며 주택시장에 인위적으로 온기를 불어넣을수록, 하우스푸어는 집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택정책의 다른 핵심 타깃인 렌트푸어(높은 전세금에 시달리는 세입자)의 생활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주택 가격을 띄워 전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돌리면 전세난이 완화될 것이란 게 정부의 주장이었지만,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고 있다. 서울의 아파트 전세가격은 1월13일 기준으로 전주보다 0.3% 상승했다. 39주 연속 오름세다. 전주(0.22%)보다 상승폭이 커졌다. 수도권 전세 가격도 일주일 전보다 0.34% 뛰었다. 주택 거래의 불씨가 살아나는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상승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고현수(38·가명)씨는 1월 말 끝나는 전세 계약을 연장하려면 전세금을 3억원에서 4억2천만원으로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통보를 받았다. “2년 만에 1억2천만원은 너무하다” 싶었다. 그에겐 이미 빚이 1억원 넘게 있었다. 그러나 두 살배기인 딸의 육아를 위해 처가 근처로 이사간 터라 집을 옮길 수 없었다. 그는 집주인을 설득해 한 달 40만원의 월세를 더 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내 한 몸이면 당장 집을 비워줄 텐데 가족이 있어 그럴 수 없다. 매매 가격이 5억6천만원이라 아직 살 형편도 안 된다. 돈이 없어 참 서럽다.”
정부의 기대대로 비싼 전세금을 치르느니 차라리 빚을 내서라도 내 집을 마련하려는 세입자가 있기는 하다. 취득세·양도소득세 면제 혜택이 끝나기 직전이던 지난해 12월,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들은 한 달 동안에만 총 2조5천억원의 빚을 얻어 집을 샀다. 지난해 11월 세운 최대 대출 실적보다 1조원이나 많은 규모다.
전세를 살고 있는 서현정(35·가명)씨도 연초부터 틈틈이 집을 보러 다니고 있다. 내년에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교육 환경과 치안이 좋은 아파트에 정착하기 위해서다. 자금은 현재 전세금 2억5천만원에 대출금 2억원을 보태 마련할 계획이다. 빚이 무섭긴 해도, 전세금이 워낙 올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전세 대출 1억원의 이자로 매달 50만원 넘게 나간다. 빚을 2억원 더 내면 이자가 100만원 넘어간다. 살림이 더 힘들어질까봐 걱정이다.” 렌트푸어가 하우스푸어로 신분이 바뀌는 전형적인 수순이다. “하우스푸어는 최대한 버티려 할 거다. 그러면서 금융 비용을 줄이려고 전세금을 올린다. 전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렌트푸어는 빚내 집을 사기도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하우스푸어의 리스크가 렌트푸어 리스크로 전이되고 있다.” 제윤경 대표의 지적이다.
건설사는 공급 늘리며 미분양도 털고누가 웃고 있을까. 최승섭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감시팀 부장은 주택정책의 숨겨진 수혜자로 건설사와 다주택 보유자를 지목했다. 그는 “건설사는 새로운 공급을 늘리고 미분양도 털 수 있다. 다주택자는 자산가치 상승에 따른 이득을 본다. 그러면서 무거운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주택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하우스푸어로 남을 것인가, 새로운 렌트푸어가 될 것인가. 렌트푸어로 남을 것인가, 새로운 하우스푸어가 될 것인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구민수·김자현 인턴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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