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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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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미래를 상상하라

특정 이슈 또는 공간 주제로 제약 없이 이상적 미래 그리는 사회혁신 기획 ‘소셜픽션’
당신 마음속 염원을 얘기하라
등록 2013-11-23 17:5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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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중앙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영국 옥스퍼드 중심부의 ‘뉴시어터’(New The ater) 무대였다. 전세계의 사회혁신가 1천여 명이 모인 지난 4월 스콜월드포럼에서 연설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유명한 연극 배우와 오페라 가수들이 섰던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혁신 핵심이 된 ‘상상력’

“기술은 빠르게 발전한다. 현재는 20년 전의 눈으로 보면 사실상 사이언스픽션(Science Fiction·공상과학소설)이다. 알라딘의 램프와도 같은 물건을 우리는 주머니 안에 하나씩 넣고 다니지 않는가. 스마트폰 말이다. 사실 사이언스픽션은 좋은 것이다. 상상을 통해 생각할 수 없던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중요한 점은 과학이 이 사이언스픽션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상상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소셜픽션(Social Fiction)이 없다. 그런 것을 상상하도록 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 상상력을 가진 것처럼 사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스콜월드포럼은 2004년에 시작됐다. 각 분야에서 떨어져 활동하던 전세계의 사회혁신가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발상이 그 출발이었다. 10년째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열리고 있다.

이 포럼의 창립자인 제프 스콜은 인터넷 경매기업 이베이의 초대 사장이었다. 사업이 성공해 젊은 나이에 억만장자가 된 스콜은 회사를 떠난 뒤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스콜재단을 세웠고, 스콜재단은 스콜포럼을 주최하는 것을 비롯해 전세계 사회혁신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포럼의 주제는 ‘파괴: 대담하게 상상하고 성공하도록 디자인하라’(Disrupt: Dare to Imagine, Design to Win)였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사용했던 ‘창조적 파괴’(Creative Disruption)를 연상시켰다. 포럼에서는 이 단어가 상징하듯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논의가 주류를 이뤘다. 그 주제를 접하는 순간,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던 ‘상상력’이라는 언어가 사회혁신의 핵심으로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상력’은 불경기 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용어다. 특히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상상력’ 이야기를 꺼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타박을 듣기 쉽다. 더 나아가 장기적 대안을 상상하기 시작하면 한가한 소리라는 힐난을 받게 된다. 상상력을 높이 사주는 곳은, 그나마 그것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에서다.

사회혁신을 이야기한다는 스콜월드포럼에서만 해도,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이 자리를 강력하게 지배하던 용어는 ‘투자’였다. 사회혁신을 실행할 돈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가 이들을 옥죄는 중요한 제약 조건이자, 동시에 만나서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대화 주제였다.

무너지고도 무너지지 않는 자본주의

원래 사회혁신이란 정부·기업·시민사회의 세 부문 모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중심에 놓고 세 부문 모두의 전략을 유연하게 혼합 사용해서 해결해보자며 출발한 것이다. 대단한 사회적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눈앞의 문제에 점점 더 매몰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의 상상력은 낡은 창립 취지문처럼 서랍 속에 들어가 찾는 사람 없는 신세가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자본주의는 융성하고 있었고 당장의 재원, 당장의 인력, 당장의 문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게 시급했다.

그러던 분위기가 급반전을 맞은 이유는 뭘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은 뒤, 전세계는 자본주의를 다시 성찰하는 분위기로 들어섰다. 영국 경제지 는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기획 기사를 연중 싣기 시작한다. 저명한 경제학자 1천여 명은 금융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위기를 충분히 경고하지 못했다는 반성문에 서명해 발표했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의 미래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과거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들 새로운 세상이 곧 올 것처럼 기대에 부풀었지만 정작 변화한 것은 없다. 기껏 나온 청사진이라야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이 가졌던 큰 정부의 복원이거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내세웠던 시장만능주의의 완성이다. 새롭지도 않고 문제해결책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미래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사회혁신을 꿈꾸고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그리던 이들은 고민과 좌절에 빠졌다. 무너지고 나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묘하게도 이번 좌절은 선진국일수록 심했다. 복지국가들의 재정은 무너져갔고, 사회적 기업가들의 혁신은 어쩐지 개발도상국에서 더 빛을 발했다. 빌 게이츠의 마법은 아프리카에서는 통했지만 정작 그의 조국 미국에서는 큰 성과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좀체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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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퍼즐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맞추기가 훨씬 쉬운 법이다. 대략 아무 조각이나 맞춰넣으면 모양이 되는 듯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빌 게이츠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최소 생존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는 해야 할 일의 내용과 방법이 분명하다. 물론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원을 투입하고 사람이 뛰어들어 행동하면 변화는 가능하다.

그러나 퍼즐이 완성될 무렵이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제자리에 놓지 않은 조각들 탓에, 남은 조각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맞닥뜨린 퍼즐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조각 하나를 제대로 맞추려 해도, 주변의 몇 개 조각을 빼고 옮겨야 한다. 그런데 이미 놓인 조각은 강력한 기존 패러다임으로 붙어 있으려고만 한다. 판을 완전히 흔들지 않고서는 새로운 조각을 놓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현실적 제약 조건 넘어선 근본적 사고

지난 7월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애스펀 아이디어 페스티벌에 참석한 백악관 사회혁신수석실 인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마비된 워싱턴의 늪에서는 아무리 혁신적인 의제도 힘쓰기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과 함께 날개를 달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던 이들이다. 재정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럽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답답하다. 아주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대담하게 상상하라’는 슬로건이 사회혁신가들의 포럼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래서다. 오히려 처음부터 근본적이고 대담한 상상을 하며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소셜픽션처럼, 현실적 제약 조건을 아예 넘어서기 위해, 소설 같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초장기 목표를 떠올리는 데서 사회혁신을 시작하자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대한 현실의 벽을 도저히 넘어설 방법이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소셜픽션이란 특정한 사회 이슈 또는 공간을 주제로 제약 조건 없이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는 방법의 사회혁신 기획이다. 예를 들어 당장의 일자리 문제 해법을 생각하는 대신, ‘30년 뒤 직장’의 모습을 상상해 그려보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문제를 당장 찾고 해결하려 나서는 대신, 우리가 염원하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20년 뒤 서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사회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상상은 공상이나 예측과 달리 의지가 담긴다. ‘이런 미래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는다. 즉 여기서 상상이란 예언자나 공상과학소설가가 하는 일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나 조직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염원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이런 소셜픽션은 여러 가지 가치를 지닌다. 그 첫 번째 가치는 제약 조건 없이 먼 미래를 상상한다는 데서 나온다. 이 방법은 어려운 사회문제의 해결을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현실이라는 잠금장치를 해제함으로써 여백이 생기고, 이 여백에서 에너지가 생긴다. 기존 패러다임과 제약 조건이 강력한 상황에서 현실적 제약조건을 넘어선 사회적 상상은 문제 해결의 출발이 된다. 문제를 아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사고해야 전체 그림이 보이고,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가 보인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Economic Possibilities of Our Grandchildren)이라는 에세이를 내놓았다. 케인스는 이 책에서 꼭 100년 뒤인 2030년의 삶을 그려낸다. 그는 100년이 지나고 나면 경제 문제는 마침내 모두 풀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깐의 불황이 해결되는 정도가 아니라, 경제 자체가 문제가 아닌 사회가 도래한다고 본 것이다. ‘불충분’이라는 문제 자체가 없는 사회에서, 인류는 이미 생계를 위한 노동이 거의 필요 없어질 정도로 생산성을 높여둔 상태라 대부분 주당 15시간만 일하면 된다. 그리고 창조된 이후 처음으로 과학과 생산력의 발전 덕에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 완전한 자유, 완전한 여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의 문제에만 순전히 맞닥뜨리게 된다. 문학과 예술의 문제가 경제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대공황 시기 ‘소셜픽션’ 쓴 케인스

흥미롭게도 케인스가 이 글을 쓴 시기에 세계경제는 대공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공황은 1929년 검은 월요일부터 시작돼 전세계를 붕괴의 구렁텅이 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사람들은 끼니를 걱정하는 경제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장의 시급한 현안이 산적돼 있는데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도무지 문제를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케인스는 ‘한가롭게’ 100년 뒤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한가로운 일이었을까?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케인스가 했던 일은 그야말로 소셜픽션을 쓰는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염원은 임박한 생계의 해결이었을 것이다. 특히 대거 일자리를 잃은 노동계층의 염원은 절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다수 대중의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경제학자에게 그 답은 단순명쾌하다. 생산성 향상, 즉 일하는 시간 대비 생산량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케인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의 염원처럼 생산성이 계속 향상된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 사색의 결과가 바로 이었다. 그것은 당시 경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해 케인스가 내놓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해답이었다. 그곳에서 시작해 구체적인 곳으로 내려오면, 당장 해야 할 일이 보인다. 그래서 ‘경제적 가능성’은 이후 나오는 공격적 정부 지출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케인스의 공황 해법과 이어진다.

케인스는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얼토당토않은 듯한 100년 뒤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소셜픽션은 또 비전과 목표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데서 가치를 갖는다. 이 방법론은 일이 방향을 잃지 않고 오래갈 수 있게 하는, 기획의 효과적 방법이다. 실제 일을 기획하는 데는 두 가지 프로세스가 있다. 하나는 ‘순방향 기획’(Forward Planning)이고 또 하나는 ‘역방향 기획’(Backward Planning)이다. 순방향 기획은 현재의 상태에서 발생한 문제를 현재 가용한 자원으로 일단 푸는 것이다. 그렇게 풀리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나오면, 새로운 문제는 그것대로 다시 푼다.

역방향 기획은 거꾸로다. 장기적 목표를 먼저 정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현재의 제약 조건을 정의한다. 그다음에야 정의된 제약 조건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행동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보완책

소셜픽션은 사회 전체의 역방향 기획을 가능하게 한다. 비전과 목표를 중심으로 기획함으로써 일의 방향을 덜 흔들리게 한다. 작은 조직이든 큰 사회든, 공동체는 늘 흔들리기 마련이다. 돈이나 인력 같은 현실적 제약 조건에 몇 차례 부딪히다보면 원래 목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고 방향을 되찾게 해주려면 비전이 공유돼 있어야 한다.

긍정적 상상에서도 소셜픽션의 가치가 나온다. 미래는 불안하기 마련이다. 불확실성은 크고, 비관하자면 한없이 비관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와 사교육에 목매단 한국인의 현주소는, 부정적 상상을 하며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인간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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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나 조직에 대해 긍정적 상상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미래가 적극적 구성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키우게 된다. 이런 태도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비전에 대한 관여도를 높이고 변화를 향한 행동도 더 많아지게 한다. 긍정적 미래 상상을 통해 구성원들의 조직 관여도를 높이는 ‘긍정적 탐구’(Appreciative Inquiry)라는 교육 방법론과도 맞닿아 있다. 소셜픽션의 가치는 무엇보다 함께 상상한다는 데서 나온다. 공공정책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다.

기업이 잘 운영되려면 조직 구성원이 기업의 비전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의 비전과 미션과 핵심 가치를 정할 때는, 그것이 임직원들의 마음속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사업 방향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오픈 스페이스 기술’이나 ‘언콘퍼런스’같이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자유로운 형태의 회의 기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잘 운영되려면 사회 구성원이 그 사회의 방향을 받아들이고 체화해야 한다. 공공정책과 관련된 어떤 비전이 이해관계자와 구성원의 동의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전을 만들 때 그들을 관여시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과정에 많은 이들을 직접 관여시키기 어렵다면 그들의 염원을 최대한 끌어내는 과정이라도 거쳐야 한다.

많은 이들이 함께 먼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염원이 뒤섞이고 모일 수 있다. 현명한 공공정책은 그 염원을 잘 끌어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양한 회의 기법이 이 과정에서 활용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를 통해서만 수요자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보완책이기도 하다.

한국인들, 어떤 소셜픽션 쓰고 싶을까?

무함마드 유누스는 2030년 고국 방글라데시의 빈곤이 사라지는 소셜픽션을 쓴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케인스는 2030년 노동의 고통이 사라지는 경제를 그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2030년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어떤 소셜픽션을 쓰고 싶을까? 우리는 어떤 삶을 염원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미래란 불안하게 기다리는 대신, 꿈꾸며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일까?

이원재 경제평론가·‘소셜픽션 콘퍼런스’ 기획자 timela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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