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집 안팎의 온도 차이는 컸다. 삼성그룹은 지난 10월28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임원단을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을 남겼던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 회장 일가도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이룬 큰 성과만큼이나 사회적 기대와 책임도 한층 무거워졌다.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행사장에는 이 회장이 미리 준비한 동영상 연설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이 말하는 ‘사회적 책임’이란그러나 그의 메시지와는 달리, 20년 전 추억을 되짚는 잔칫집 밖에서는 삼성을 향한 ‘싸늘한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였다. 기념식 앞뒤로 터져나온 두 건의 ‘삼성 관련 노동 사태’ 때문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10월14일 삼성그룹이 지난해 초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2012년 S그룹 노사전략’(노사전략 문건)이란 제목의 151쪽짜리 문건을 언론에 공개했다. 문건에는 그동안 사회적 지탄을 받아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관련해 이를 유지하기 위한 간부용 지침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신경영 선언 행사 사흘 뒤에는 삼성전자의 협력업체인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의 수리기사 최종범(32)씨가 “너무 힘들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회사 동료 등은 최씨가 지난 7월 출범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 노조’(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에 참여한 뒤, 본사 직원이나 비노조원이 일감을 대신 맡는 이른바 ‘지역 쪼개기’ 등으로 근무에서 밀려난 탓에 줄어든 임금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사회적 책임’을 언급한 것이 무색하게,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점점 커지고 있다.
노조 설립시 즉시 징계할 수 있도록 비위사실 채증 지속(노사전략 문건 43쪽 ‘2012년 노사전략’)“문건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무조건 문제를 삼으려 하는 거죠.” 11월7일 저녁 만난 한아무개씨는 최근 드러난 노사전략 문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6월까지만 해도 삼성의 한 계열사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었다. 그가 직원들 사이에서 ‘MJ’(문제사원의 줄임말, 노조 설립 가능성이 있는 직원을 부르는 말)라고 불리게 된 건, 2009년 회사에서 진행한 직군 통합 작업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다. 이듬해 그는 한 방송사에 회사의 업무처리와 관련한 내용도 제보했다. “회사에서는 ‘불이익은 안 줄 테니 논란이 잦아들 때까지 피해 있으라’며 회사 직원들의 감시 속에 3주 동안 강화도·강원도·제주도를 함께 돌아다니게 했습니다.” 그 뒤 징계를 받은 그는 지방사업소로 발령 났다.
그 뒤로 그는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직군 통합이나 회사 업무상의 문제 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씨는 지난해 초 삼성일반노동조합의 김성환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나 노동조합을 세우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 “회사 인사·노무 담당자들이 제 집까지 쫓아오면서 동태를 살피더라고요. 누구 만나러 가냐, 오늘은 우리랑 어디 가자 이렇게 말이죠.” 결국 그는 지난해 6월 인사·노무 담당자들과 몸싸움을 벌었고, 회사에서는 그에 대한 징계 조사를 벌여 20일 만에 한씨를 해고했다. 그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씨는 10개월 가까이 서울 시내의 회사 앞에서 해고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회사의 인사·노무 담당자들은 한씨의 폭행을 처벌해달라며 경찰에 고발했지만, 법원은 지난 6월 한씨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서울남부지방법원 재판부는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 점”을 들어 한씨에게 폭행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한씨가) 노조 설립에 관심을 가지고 삼성일반노조를 추진 중인 인사들과 접촉하기도 했고,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이 사건 상해사건을 징계 사유 가운데 하나로 회사에서 해고됐던 점을 종합해보면, 이 상해 사건이 피고인(한씨)을 해고하기 위해 조작됐다는 피고인의 주장이 전혀 납득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씨는 “현재 검찰의 항소로 2심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내가 당한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노사전략 문건에 언급된 ‘문제인력이 노조 설립시 즉시 징계할 수 있도록 비위사실 채증 지속하라’는 지침 내용과 다름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외서도 유명한 노조 설립 방해 공작한씨처럼 노조 설립을 둘러싼 해고자 문제는 해외에도 알려진 바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은 지난해 4월 말 삼성의 경영 전반에 대해 다룬 ‘문어발식 경영의 기수’(2012년 18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삼성전자에 다니다 해고당한 박종태씨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2007년부터 삼성 내 노사협의체인 한가족협의회의 사원 쪽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사에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다 면직된 경험이 있다. 회사와 갈등을 빚었던 그는 2010년 11월 삼성전자 사내게시판에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글을 올린 뒤 20여 일 만에 해고됐다. 그는 2년 동안 부당해고 무효소송 등을 진행했지만 패소했다.
비상상황실을 통한 컨트롤타워로 확대-상황 발생시 기존 인사·홍보·법무 외 지역협의회가 참여하는 ‘통합 컨트롤타워’로 확대하고, 전략 수립 및 언론·법원 등 대응(노사전략 문건 37쪽 ‘2012년 노사전략’)노사전략 문건에서는 한씨처럼 삼성그룹 안에서 노조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 대한 발빠른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삼성SDI 부산사업장에서 근무했던 최아무개씨는 실제로 이런 업무를 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4월 삼성일반노조 관계자를 만났고 지난해 11월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위원장 권영국)와 만나 2000년대 초반 이후 노무 담당자들이 했던 노조 설립 저지 활동에 대해 증언했다. 지난해 9월 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노조 설립을 시도하는 문제사원에 대해서는 노무 담당자가 미행·도청 등의 활동을 맡아서 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노무파트 상황실(노사상황실) 대외팀(노무1팀)에서 일했던 최씨는 “(노사상황실이) 사내 직원과 관련한 각종 업무를 수행하던 곳으로, 노사상황실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삼성 계열사 사업장의 인사·노무 담당자들이 모여 있는 부산 일대의 ‘지역대책협의회’(또는 지역협의회)에서도 활동했다고 했다. 삼성 계열사 사업장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5~8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역협의회는 관공서 등과 각종 현안을 협의하는 기구로 알려져 있다. 노사전략 문건에도 (노조 설립에 대한) ‘비상 대응체제 유지’를 설명하는 목차에서는 “2012년 1월부터 비상상황실을 확대 운영한다”는 내용과 함께 “상황 발생시 기존 인사·홍보·법무 외 지역협의회가 참여하는 ‘통합 컨트롤타워’로 확대하고 전략 수립 및 언론·법원 등 대응”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최씨는 지역협의회의 업무에 대해 “각 계열사에서 나와 있다는 것은 본사에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지역협의회가 (소속 회사의 일이 아니라) 이것만 한다는 건 삼성의 노사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국 지역협의회라는 틀도 삼성의 노사관리 틀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문제사원 납치해 노조 포기 회유했다”이런 노무 업무는 지난해까지 삼성SDI 부산사업장 총무부서에서 근무했던 차아무개씨도 기억하고 있다. 차씨는 2001년 11월 ‘구조조정 반대, 노동조합 결성’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린 직원을 억류하는 노무파트의 업무에 지원을 나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납치 아닌 납치조가 형성이 돼서 그 문제사원을 차에 태운 뒤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노동조합 설립을 못하도록 회유하는 업무를 한 적이 있다.”
지난해 11월19일 삼성일반노조는 최씨를 포함한 삼성 이건희 회장 등 회사 경영진과 간부들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협박·감금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최씨는 검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피고소인 모두에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혐의 없음과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현재 최씨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룹 내 신규 노조가 설립되는 등 문제 발생-전자 자살자 등 과다 근로 이슈화, 전자 반도체 백혈병 문제 지속, SDI 문제인력 노조 설립 기도 등”(노사전략 문건 6쪽 ‘2011년 평가 및 반성’)삼성의 노사전략 문건이 공개된 뒤, 고용노동부는 삼성 계열사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런 대책이 실행에 옮겨졌다면, 노조에 대한 지배·개입으로 현행법상 위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 계열사 안에서는 여전히 노사전략 문건에서처럼 노조 설립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삼성 계열사 가운데 노조 설립 움직임이 그나마 활발한 곳은 삼성SDI의 천안·부산사업장이다. 부산사업장에서는 2011년 삼성에버랜드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삼성노동조합’을 통해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한 일이 있었다. 노사전략 문건에서도 이런 삼성SDI의 사례를 그룹 내 신규 노조가 설립되는 대표적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당시 삼성노동조합은 “자체적인 역량만으로 삼성을 상대로 노조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상급노조 가입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삼성SDI 안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노조를 준비하는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 11월6일 만난 삼성SDI 천안사업장 소속 ㄱ씨는 “노무 담당자들이 여전히 면담도 하고 수시로 동향을 확인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히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노조 준비 모임이 있던 날, 노무 담당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ㄱ씨는 “아직은 참여 인력이 많지 않지만, 회사 안에 희망퇴직·구조조정 등 노조가 필요한 국면이 생기면 설립에 나서려 한다”고 말했다.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ㄴ씨는 “불만이 있으면 외부에 알리지 말고 내부에서 처리하라는 권유를 많이 들었다”며 “해고당할 수도 있다는 게 두렵긴 하지만 회사에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매번 노조가 있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고 두렵지만…” 부단한 노조설립 시도은 지난해 기사에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 사주는 독립적인 노동조합이 생기는 건, 삼성이 계속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공격적 경영을 둔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삼성에서는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실질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회장은 ‘변화의 심장이 뛴다’라는 주제로 열린 ‘신경영 선언’ 20주년 행사에서도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삼성 내부에서 노조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는다. 무노조 경영을 앞세운 삼성의 ‘차가운 심장’은 과연 얼마나 힘차게 뛸 수 있을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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