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여기 산 지 500년 됐어. 우리 조상님들 모두 다 이 산에 묻혔고. 나는 이 흉물스러운 것(송전탑)들이 여기를 지나가게 놔둘 수가 없어. (송전탑을 세우려면) 내 시체 위에다 세우라고 해.”
경남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 500여m에 위치한 밀양 송전탑 127번 공사장 앞 움막을 지키던 손희경(78) 할머니가 말했다. 부북면 대항리 평밭마을 주민인 그는 지난 한가위 이후 줄곧 이 움막을 지키고 있다. 움막에는 이 마을 할머니들 여럿이 있다.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이 지난 10월1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며 밀양 송전탑 공사를 재개한 지 한 달 넘게 흘렀다. 그사이 밀양에는 송전탑 공사 현장 가운데 일부인 10여 곳에서 한전 시행사들이 분주하게 콘크리트 타설 등의 공사를 벌이고 있다. 공사 현장으로 가는 길목을 막아선 채 경찰과 대치하는 밀양 주민들의 긴장된 일상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밀양 국감’ 순간에도 충돌 벌어져손 할머니의 분노는 문자를 영어로 바꿔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는 10월30일치 국제면 ‘전선이 길어질수록 현대와 과거의 갈등도 깊어지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손 할머니가 움막에 자리잡은 사연을 자세히 소개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 기사에서는 “밀양 송전탑 갈등은 한국이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신구 세대의 갈등을 보여준 또 하나의 예”라고 소개했다. 노인만 남은 농촌의 희생을 담보로 젊은 층이 사는 도시로 전기를 끌어가는 일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는 또 “밀양 송전탑 갈등이 최근 한국에서 높아지는 핵발전소 건설에 대한 깊은 우려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이제 외신까지 시선을 돌리고 있는 밀양 송전탑 갈등은, 그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밀양 주민들의 인권침해 가능성이 커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밀양시청이 큰 마찰을 우려해 송전탑 공사장 부근에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놓은 움막을 철거하는 ‘행정대집행’을 진행하진 않고 있지만, 경찰과 주민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30일 오전 경남 창원시 경남도청에서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경남지방경찰청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이날 참여했던 여야 의원들은 국감에 출석한 김종양 경남지방경찰청장에게 밀양 송전탑 신설 현장에 경찰병력이 과도하게 배치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200여 명이 시위하는 곳에 3천 명의 경찰력이 배치된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 청장은 “불법행위 예방과 저지, 합법행위에 대한 보호가 목적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국감장에서 경찰의 과도한 공권력 투입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밀양 현장에서는 충돌이 벌어졌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대책위)는 지난 10월31일 “경남경찰청장이 국정감사에서 과도한 공권력 투입과 인권유린, 과잉 진압 등에 대해 일부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같은 시각 밀양 현장에서는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주민들이 부상을 당했다”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밀양 현장에서 폭력 경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대책위는 전날 발생한 충돌 상황을 찍은 동영상도 공개했다. 동영상을 보면, 지난 10월30일 오후 5시15분께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도곡마을 부근 109번 송전탑 공사 현장 진입로에서 공사 현장으로 들어서려는 한전 시공사 직원들을 막기 위해 주민·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30여 명이 서로 팔짱을 낀 상태로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경찰이 한전 시공사 직원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주민들을 길 바깥으로 밀쳐내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넘어지면서 다쳐 주민 4명이 병원에 후송되는 일이 벌어졌다.
“공사 강행, 기본권 중대한 침해”이처럼 한전의 송전탑 공사 강행으로 주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이 잦아지자, 시민사회단체의 우려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 30여 명은 지난 10월31일 경남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밀양 송전탑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지금처럼 공사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고 대화로 합리적인 대안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정부와 한전은 주민 대표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10월28일에는 인권단체연석회의·국제앰네스티·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에서 ‘밀양 765kV 송전탑 인권침해감시단 중간보고회’를 열었다. 이들은 밀양에서 벌어지는 충돌 사례 등을 제시하며 “한전의 무리한 공사 강행과 반대 주민들에 대한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헌법재판소가 헌법 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인간다운 생활공간에서 살 권리’를 기본권으로 인정하는데 송전탑 공사 강행 자체가 이러한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것”이라며 “경찰과의 물리적 대치가 길어지면서 주민들에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이 나타나면 ‘건강권 침해’ 사안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대책위에서는 한전을 상대로 충돌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공사를 강행하는 대신 밀양 송전탑 공사의 타당성을 두고 ‘공개 텔레비전 토론회’를 열자고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그 근거로 여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지난 10월29일 공개한 전국 성인 남녀 1천 명을 상대로 벌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밀양 송전탑 건설이 전력수급 불안 해소를 위해 불가피하다’(42.3%)는 의견보다 ‘건강·재산권 피해가 걱정돼 반대한다’(46.1%)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여론조사에서는 자신의 집 근처에 초고압 송전탑이 건설된다면 10명 중 6명(61%)이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전은 보도자료를 통해 “설문조사의 질문 등이 왜곡돼 있어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반박한 바 있다.
밀양서는 찾을 수 없는 한전의 ‘능력’한전 쪽에서는 여전히 ‘다급함’을 이유로 송전탑 공사를 서두르고 있다. 한전은 밀양에 세워지는 송전선로와 이어질 계획인 신고리 원전 3·4호기용에 사용하려 했던 제어케이블이 성능 검사에서 탈락하자, 곧바로 미국 업체로부터 새 제어케이블을 납품받아 교체한 뒤 공사를 1년 안에 마무리짓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원전 가동 시점을 맞추기 위해 송전탑 공사 중단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 와중에 한전은 지난 10월30일 ‘대형 송전탑 건설사업’이 우수 프로젝트 경영활동 사례를 발굴하는 한국프로젝트경영협회(KPMA)의 올해의 프로젝트 전력서비스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한전은 수상 이유에 대해 “성공적인 갈등 해결을 통한 사업관리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왜 밀양에서는 한전의 이 놀라운 능력을 찾아볼 수 없는 걸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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