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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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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서 키운 돈 2700여억원, 증여세 800여억원이 남았다

벤츠, 진돗개 두 마리, 예금 4만7천원… 질금질금 지난했던 전두환 추징금 환수의 역사는 장남의 ‘자진납부 계획서’로 끝일까
등록 2013-09-14 18:42 수정 2020-05-03 04:27

지난해 6월 서울 연희동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너무 궁금해 동시를 썼다. “우리 동네 사시는 29만원 할아버지, 아빠랑 듣는 라디오에서는 맨날 29만원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큰 집에 사세요?” 말이 없던 할아버지는 지난 9월10일 ‘그렇게 큰 집’을 포함해 1703억원어치 자산을 국가에 내놓겠다고 했다.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안 내려고 ‘29만원밖에 없다’며 국민을 속여온 거짓말의 말로다. 대법원의 추징금 확정판결이 있은 지 16년 만의 일이다. 할아버지의 거짓말은 끝났을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10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미납 추징금 자진 납부 계획서를 검찰에 제출한 뒤 차량에 오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10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미납 추징금 자진 납부 계획서를 검찰에 제출한 뒤 차량에 오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버티지 못하고 ‘자진납부’ 

1995년 12월2일 ‘29만원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그렇게 큰 집’ 앞 골목에 섰다. 제5공화국의 수족들이 그의 뒤를 지켰다. 그는 장남이 써준 원고를 읽었다. “오늘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에 반발하며 비분강개한 ‘골목성명’을 발표한 그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떠났고, 이튿날 그곳에서 검찰에 체포·구속됐다. 성명을 대신 쓴 장남 전재국씨는 2013년 9월10일 18년 전 아버지의 구속영장을 집행했던 검사가 총장으로 있는 검찰청사를 찾아 ‘자진납부 계획서’를 제출했다.

전씨 일가는 ‘자진납부’라는 용어를 썼지만, ‘자진’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 주도한 여론의 전방위 압박과 ‘채동욱 검찰’의 수사에 그들은 ‘16년 버티기’를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처남 이창석씨를 구속하고 재용씨를 소환하며 검찰의 칼끝은 전씨 일가의 중심부를 겨누며 다가오고 있었다. 전씨 재산 환수 작업이 박차를 가하자 그와 함께 16년 동안 ‘추징금 미납 동지’였던 노태우씨도 9월4일 2628억원을 완납했다.

전두환씨 일가가 내놓은 1703억원 상당의 ‘납부 재산 목록’에서 그와 이순자씨의 재산은 90억원가량이다. 서울 연희동 사저 정원(전두환 개인비서관 이택수씨 명의)과 본채(이순자 명의), 이대원 화백 그림(전두환 명의)과 연금보험(이순자 명의)을 합한 금액이다. 정원과 그림, 연금보험은 이미 압류된 상태다. 재국씨는 검찰이 압류하지 않은 사저 본채까지 내놓으면서 “부모님께서 반평생 거주하셨던 자택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큰아들인 그는 558억원을 낸다. 경기도 연천군 허브빌리지 48필지 전체 및 지상건물과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매매대금, 북플러스 주식 20만4천 주, 압수 미술품 554점 등이다. 둘째아들 재용씨는 560억원(경기도 오산시 양산동 5필지, 서울 서초동 시공사 사옥 1필지 등), 딸 효선씨는 25억원(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부지), 셋째아들 재만씨가 200억원(서울 한남동 신원플라자 빌딩과 연희동 사저 별채)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재만씨 장인인 이희상 동아원 회장은 275억원(금융자산)을 부담한다. 검찰은 현금성 자산을 우선 환수한 뒤 부동산과 미술품 등은 공매를 거쳐 환수한다는 계획이다.

 

법적 허점이 ‘부당한 치부’ 보장 

지난한 세월이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내란과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전두환씨에게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당시 수사팀 쪽에선 전씨의 비자금이 9500억원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선고 직후 첫 환수 금액은 107억원어치 예금과 채권 등 312억9천만원이었다. 이후 전씨의 버티기가 시작됐다. 2000년 두 번째 환수 땐 검찰이 전씨의 벤츠 승용차와 재국씨의 콘도 회원권을 추징해 경매에 넘겼다. 2003년엔 진돗개 두 마리와 가전제품을 경매해 1억7950만원을 환수하기도 했다. 전씨가 “29만원밖에 없다”고 말해 29만원 할아버지가 된 게 이때다. 9월6일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된 처남 이창석씨가 당시 검찰이 경매 처분으로 환수한 전씨의 연희동 집 별채를 낙찰받아 전씨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2004년 200억원, 2006년 1억1900만원, 4만7천원(통장 잔액), 2010년 4만7천원(강연료)을 추징했다. 13년 동안 553억원을 질금질금 환수하는 동안 검찰은 국민에게서 ‘추징 의지’를 의심받았다.

16년은 길다. 전두환씨 일가가 사회적 비난에 눈과 귀를 닫고 ‘일궈낸 시간’이다. 그들은 16년 동안 시간만 번 게 아니라 돈을 벌었다. 전씨 일가에게 16년은 돈이다. 그 시간 동안 전씨 가족은 미납 추징금을 밑천으로 수천억원을 불렸다. 2205억원이 낳은 이자·투자 수익만 해도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민사소송에서 적용되는 법정 이자율 연 5%로 계산하면 대통령직 퇴임 이후 25년간 전씨의 이자 수익은 2700여억원이다. 버텨서 키운 돈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이 추징금 원금만 환수할 수 있도록 해서 이자·투자 수익은 고스란히 전씨 일가 몫이다. 체납 기간이 늘어나도 가산금은 없다. 29만원 할아버지로 위장하고 사는 동안 전씨는 미납 추징금을 활용해 재산을 증식하고 있었고, 추징금 환수가 늦어지는 동안 ‘완납’ 뒤에도 가족이 든든하게 비빌 언덕을 쌓고 있었다. 법적 허점이 그들의 ‘부당한 치부’를 보장해준 셈이다. 법 개정이 시급한 이유다.

세금 처리도 남은 과제다. 전씨 일가의 추징금 납부 목록 중 상당액이 건물과 땅 같은 부동산이다. 검찰이 한국자산관리공사를 통해 공매 처분하는 과정에서 수백억원대의 양도소득세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38%의 최고 세율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납부 추징금 1703억원을 전씨 명의로 모아서 낼 경우 그는 800여억원의 증여세를 내야 한다. 전씨가 증여세를 피하려면 29만원 할아버지가 ‘거짓 가면’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가 자녀들과 친·인척에게 숨겨놓은 비자금을 본인 재산으로 인정할 경우 추징금 몰수 대상자여서 세금 납부를 면할 수 있다. 다만 자녀들은 부친의 재산을 세금 없이 받은 것이므로 탈세 혐의를 감당해야 한다.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  

버티기가 안긴 소득과 탈루 세금 문제 처리는 전두환·노태우 미납 추징금 환수의 성공적 마무리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전씨 일가와 조력자들이 추징금을 내지 않고 비자금을 빼돌려 은닉하는 과정에서 행한 불법행위를 밝혀내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검찰이 추징금 미납 과정에서 저지른 전씨 일가의 불법행위를 불구속 기소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검찰은 “이미 드러난 불법행위에 대해 원칙대로 수사하겠다”면서도 “자진납부 결정과 여러 가지 정상을 형사절차상 참작 사유 등으로 감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러 가지 정상’의 범위가 어디까지냐에 따라 검찰 스스로가 미납 추징금 환수 성과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 이창석씨의 세금 포탈 문제와 재국씨의 탈세·배임 및 해외 자금 도피 등을 검찰이 어떻게 처리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는 9월11일 사설(‘전직 대통령 추징금 완납, 국민도 이제 악몽에서 해방될 때’)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썼다. 마무리는 이렇게 했다. “이제 국민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인 것 같다.” 전두환의 시대를 앞장서서 열고 닦았던 신문은 그를 국민의 거센 비판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29만원 할아버지는 벌써 했어야 할 마땅한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싶다.

“얼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세요. 대답해보세요. 29만원 할아버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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