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7일 오후 2시. 부산지검 동부지청 정문으로 ‘법무부’ 마크가 찍힌 대형 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이명박 정부에서 ‘왕차관’으로 통하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태운 차량이었다. 그는 파이시티 인허가 청탁으로 1억6천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5월 구속됐고, 이후 민간인 불법 사찰을 지시한 사실이 추가돼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는 이날 원전업체로부터 뒷돈을 받은 혐의로 소환됐다. 1년3개월이 넘는 수감 생활로 박 전 차관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수의 차림으로 버스에서 내린 박 전 차관은 다소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뢰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 전 차관은 이명박 정부가 ‘최대의 자원외교 성과’라고 내세웠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의 냉각수 처리 설비 계약을 맺은 ‘한국정수공업’으로부터 6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 중간 다리는 ‘영포(영일·포항) 라인’의 원전 브로커 오희택, 새누리당 부대변인 출신인 이윤영이었다. 검찰은 구속된 두 사람을 통해 이 업체에서 나온 돈 13억원의 일부가 박 전 차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이 업체의 이규철 대표는 UAE 원전 계약의 유지 및 확대를 위해 브로커 오씨에게 돈을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박 전 차관은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이틀 뒤인 8월29일 이뤄진 이씨와의 대질심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차관은 대질심문에서 “왜 자꾸 물고 늘어지느냐. 나는 결코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박 전 차관과 이씨는 서로 얼굴을 붉히고 고성을 지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원전 비리 수사가 겨냥하는 대상은 이명박 정권의 핵심 실세들로 점차 확대되는 분위기다. 박 전 차관 외에도 이명박 정부의 ‘원전 수출’에 전력투구했던 이상득 전 의원 등의 이름이 계속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철 한국정수공업 회장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브로커 오씨가) 박영준이가 도와주니까 돈을 줘야 하고, 이상득(전 의원)에게도 뭘 해야 (앞으로) 잘될 테니까 돈을 좀 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13억원 중에서 박 전 차관에게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6천만원 외에 12억4천만원의 ‘기착지’도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또 검찰은 박 전 차관의 ‘직속 상관’인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인사 청탁 과정에 연루된 정황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커 오씨에게서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윤영 한국정수공업 감사는 최 전 장관과 대학(서울대 경영대) 동기 사이다. 오씨는 검찰 조사에서 “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한수원 전무를 회사에 유리한 사람으로 교체하려면 최중경 장관에게 로비해야 한다”며 윤씨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게이트는 열리고… 복마전 원전업계정권 실세들을 향한 금품 로비, 인사 청탁 수사가 ‘원전 게이트’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원전을 둘러싼 산업 전반에 만연한 총체적 부패에 맞춰져 있다. 지난 5월 이후 90일 넘게 이어진 검찰 수사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원전 게이트’의 전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느 한 분야, 한두 사람의 부패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원전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 부품의 안정성을 검증하기 위한 용역업체, 이 과정 전반을 관리·감독해야 할 공공기관들이 줄줄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말 그대로 복마전이다.
지난 5월28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신고리 1·2호기와 신월성 1·2호기의 제어케이블 시험성적서 위조 사실을 발표했다. 케이블 납품업체인 JS전선은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짝퉁 부품’을 납품했고, 비용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를 검증해야 할 새한티이피는 성적서를 위조했다. JS전선이 납품한 제어케이블은 원전에서 사고가 날 경우 비상냉각 시스템과 방사성물질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비상밸브를 작동시키도록 하는 핵심 부품으로 분류된다.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벌인 위험한 도박이었다. 부품 서류를 위조한 사례는 국내에서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인 원전 28기 중 21기에 걸쳐 적발됐다. 핵심 부품과 단순 소모품이 모두 포함된 숫자다. 원전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수명 연장 여부를 두고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고 있는 월성 1호기를 포함해 8월29일 현재 모두 원전 6곳의 가동이 중지된 상태다. 폭염 속 전력난은 그렇게 찾아왔다.
검수기관인 한국전력기술과 원전 건설·가동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원전산업의 핵심 관계자들은 뒷돈을 받고 이런 부정을 묵인했다. 그동안의 수사 과정에서 구속 혹은 불구속된 인사는 40여 명에 이른다. 돈이 오가는 방식도 가지각색이었다. 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은 2009년 7월부터 2012년 1월까지 서울시내 단골 음식점에서 이규철 한국정수공업 회장에게 모두 1억3천만원의 현금을 받았다. 주로 5만원권이 쓰였는데, 돈의 규모에 따라 와인상자(500만원 단위), 생수상자(2천만~5천만원 단위)가 이용됐다. 브로커 오희택씨와 새누리당 부대변인 출신 이윤영씨는 각자의 차를 타고 모처에서 접선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오씨는 2009년 2월 서울의 한 사찰 주차장에서 이씨를 만나 3억원의 현금이 담긴 사과상자를 그의 차 트렁크에 옮겨담았다. 박영준 전 차관에게 건네진 것도 이 돈의 일부였다.
돌고 도는 마피아들의 돈잔치돌고 도는 ‘원전 마피아’들의 돈잔치 행렬은 끝이 없다. 박기철 전 한수원 발전본부장은 한 정비업체에 골프리조트 회원권 투자금인 1억3천만원을 대신 납부하도록 했고, 또 다른 기계·설비 업체에는 자신의 부하 직원 송아무개 부장에게 빌린 돈 3천만원을 대신 갚도록 했다. 송 부장의 자택에선 6억원의 뭉칫돈이 발견됐다. UAE 원전사업에 참여한 현대중공업 쪽에서 그에게 모두 10억원을 건넸다. 원전 검수기관인 한국전력기술의 간부 3명이 부품 검증업체인 새한티이피 쪽에서 1인당 2400만원의 해외 골프여행 접대를 받은 사실도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일단 자신들의 신용카드로 여행 경비를 결제한 뒤 귀국 직후 공항에서 업체 쪽으로부터 현금을 돌려받는 수법을 활용했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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