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때 조사받을 때, 억울해서 유치장에서 잠도 못 잤어요.”
8월21일 경기도 수원의 한 임대아파트 집 에서 만난 20살 주동진씨는 3년 전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버지 주상호(55·가명)씨는 그때 일에 대해 “가슴속에 꽉 막힌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2010년 10월29일, 경기도 수원구치소에 갇혀 있던 만 17살 동진이는 구속된 지 19일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15살 동갑내기 이근민·김상호·박종수도 수원구치소에서 풀려났다. 구속된 지 27일 만이었다. 이들은 모두 국 민기초생활수급 가정 아이들이었다. 이들을 구속에 이르게 한 혐의 사실은 끔찍했다. 근민·상호·종수는 유진호(만 14살)·최명호 (만 13살)·김상혁(만 12살)과 함께 같은 동 네에 사는 지적장애 2급 청소년 김은실(만 17살)을 아파트 옥상으로 유인해 2010년 7 월19일부터 8월10일까지 네 차례 집단 성폭 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동진은 2010 년 8월 이들의 범행을 지켜본 뒤 따로 피해자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그해 12월30일, 사건을 담당한 수원지방 검찰청은 근민·상호·종수·동진과 진호 등 미성년자 피의자 5명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다.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 제시한 핵심 증거는 진호·명호가 다른 4명과 함께 범행을 했다는 자백과 진술이었다. 피해자는 검찰 조사 당시 7명 가운데 2명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근민과 상호는 경찰에서 첫 신문을 받을 때를 제외하곤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종수와 상혁이는 조사 내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들보다 늦게 경찰 조사를 받은 동진은 첫 조사에서 다른 아이들의 범행 목격 및 자신의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2회 수사 때부터 진술이 번복되다 검찰 조사에서 다시 혐의 사실을 부인한다.
“공식 조사 전에 ‘사전작업’ 관행”검찰은 불기소 이유에 대해 △상당 기간 동안 범행을 인정한 유진호·최명호의 진술을 살펴보면 범행 경위·일시·장소, 공범 수 등이 계속 불일치하고 번복되고 있으며 △두 피의자가 최종적으로 4번의 범행 일시를 특정 날짜로 지목했지만 그 내용이 피의자 및 참고인 휴대전화 통화 내역 등 객관적 자료와 맞지 않으며, 새로 지목한 범행 날짜 역시 객관적 자료와 맞지 않아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고 진술 번복한 점을 종합해볼 때, 피의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당시 미성년 피의자들을 조사하며 영상녹화를 시행했다.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피의자 또는 변호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 영상녹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영상녹화 제도가 도입된다.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할 만큼, 영상에 담긴 아이들의 진술과 정황은 조서에 담긴 상황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영상 속 아이들이 ‘자유롭게’ 진술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구속됐던 아이들의 민사소송 법률대리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당시 수사 경찰이 피의자에게 유리한 내용을 생략하거나 정보를 제공하고 유도해서 나온 답변을 마치 피의자가 자발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조서를 작성하는 등 형사소송법상 ‘객관 의무’를 어기고 조서를 ‘왜곡’했다고 설명한다.
2010년 미성년자들에 대한 경찰 수사의 결정적 단서가 된 것은 유진호의 진술이었다. 경찰은 피해자가 언급한 남학생들의 이름과 유사한 인물을 탐문하다 유진호를 특정하게 된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진호는 8월18일 두 차례 참고인 진술을 통해 근민·상호·상혁·종수·명호 등과 범행을 했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8월18일 신문 영상 속 경찰의 발언을 보면, 영상녹화가 이뤄지는 1차 참고인 조사 이전에 이미 진호에 대한 조사가 있었던 정황이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 46건의 허위 자백 사례를 분석한 저자 이기수 박사는 “수사기관이 피의자나 참고인을 공식적으로 조사하기 전에, 미리 예단하는 방향으로 진술을 듣는 ‘사전작업’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진호는 지난 6월 이 사건으로 구속됐던 아이들과 보호자 1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에 나와 “범행을 인정하기 전에 경찰 조사를 받았고, 조사 당시 안 했다고 말하니까 욕설을 들었다”는 증언을 했다.
8월18일 유진호 진술 영상경찰 이제 본론적인 얘기, 어제 그 얘기 해보자. (중략) 그게 니가 얘기했던 게 처음에 그 요번에 방학 2008년, 2010년 5월17일날이 방학 때고 3~4일 지나서 처음 그랬다는 거지?
경찰 일단 그날 이제 ◯◯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옥상까지 가게 되었는지 이제 이야기를 어제 니가 이야기한 것도 있고 해서 니가 한번 이야기를 해보는데. 대략적으로 이야기해봐.
진호가 8월18일 두 차례 참고인 진술을 한 뒤, 9월15일부터 진술에 언급된 아이들을 상대로 한 조사가 시작된다. 9월17일 진호는 피의자 신분으로 다시 조사를 받는다. 당시 영상을 보면 진호는 1차 조사 초반부터 3시간가량 집단으로 범행했다는 진술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동석한 할머니에게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조서에서는 이런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는다. 경찰은 피의자에게 유리하거나 범행 입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황을 조서에서 생략하거나 축약해버렸다. 이기수 박사는 “재판에서 판사가 조서를 봤을 때 부인하는 장면이 기재된 것과 아닌 것은 판단에 상당한 차이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8월18일 진호의 참고인 신문조서에는 범행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유인하는 데 사용한 담배 상표, 피해자가 입었던 바지 종류 등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영상을 보면 범행과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를 경찰이 제공한다. 경찰이 해당 정보가 담긴 질문을 던져 진호가 ‘예’라고 하면, 마치 아이가 말한 것처럼 조서에 기록했다.
8월18일 유진호 신문 영상문 엘리베이터에 CCTV가 있어서 계단으로 올라갔고?
답 예.
문 그렇지?
답 예.
8월18일 유진호 신문조서문 옥상으로 어떻게 올라갔니?
답 엘리베이터에 CCTV가 있어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판사는 이런 방식이 “전형적인 유도신문”이라며 “이 사건이 법정에 갈 경우, 피고인 쪽이 자백의 임의성(수사기관의 강요 없이 피고인이 자유롭게 의사 결정을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회유·유도신문 등 물리력 행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허위 자백이 일어난다.
이렇게 문답이 뒤바뀐 경우는 진호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조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9월15일 이근민 신문 영상문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날짜는 7월17일로 그 지금 조사한 거는 7월17일인데.
답 네.
문 대략 그날이 맞는 거 같애?
답 네, 그런 거 같아요.
문 19, 그러니까 17일날 했고 19일날이 정확하게 맞네. 왜냐하면은 날짜를 보면 맞네. 그러니까 그 방학하고 얼마 안 있다가 한 거는 맞지?
답 네.
9월15일 이근민 신문조서문 언제 그랬는가요.
답 저는 한 번인데 2010년 7월19일경이에요. 정확하게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비슷해요.
문 어떻게 7월19일이라는 걸 기억하는가요.
답 방학하고 얼마 지나서 그런 것이라서 대략 기억해요.
신뢰관계자 동석 규칙도 어긴 경찰성인도 압박감을 이기기 힘든, 수사기관에서의 수사는 미성년자를 상대로 할 경우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아동·청소년은 타인의 말과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허위 자백에 취약하다. 자백만 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근민·상호·종수가 구속될 때 법률대리인이던 조영진 변호사는 “당시 경찰이 ‘이들이 범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못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경찰청 훈령인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에는 “장애인, 19세 미만의 소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신뢰관계에 있는 자 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보조인의 참여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녹화 영상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근민·상호·동진은 1차 신문 당시 신뢰관계자가 같은 방에 없었다. 진호는 8월18일 1차 참고인 진술을 할 때 혼자 조사를 받았다. 근민이의 어머니 홍현지(37)씨는 “9월15일 경찰이 아이를 조사하러 데리고 가서 뒤따라 경찰서에 갔지만, 아들이 어디서 조사받는지를 경찰이 알려주지 않아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근민은 이후 검찰 조사에서 “처음 조사 땐 혼자 있었지만 두 번째 조사부터 아빠가 함께 있어 사실대로 진술을 했다”고 진술한다. 절도 전과가 10여 차례 있고, 지적장애인 아버지를 둔 동진은 경찰 조사를 혼자 받았다. 이런 동진에게 경찰은 다른 절도 범죄를 추궁하거나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10월6일 주동진 신문 영상 *조서엔 누락문 예상 질문 안 했어? 예상 질문 아니야 기여?
답 ….
문 응? 내가 너를 때리디?
답 너무 무서워요.
문 근데 내가 너를 뭐 어떻게 했어?
답 아닙니다.
문 폭행했어?
답 아닙니다.
문 그러면? 뭐가 두려워?
답 학교 다니고 싶은데.
문 그러면은 전에 잘못을 하지 말았어야. 잘못한 것도 전에 다 얘기를 해야지. 니가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이나 소년원에 들어갔다 한 후에도? 그지?
(중략)
문 니가 어느 정도는 얘기를 했는데 니가 안 한 부분이 있어서 그래. 니가 사실대로 마음의 문을 안 열면은 우리 조사 안 할 거야 너. 바로 너 유치장에 넣어놓을 거야.
답….
문 응? 체포영장까지 발부됐는데 뭐 니가 사실대로 얘기 않고 마음의 문을 안 열어주는데 조사받을 게 뭐 있어? 그냥 뭐 넣어야지.
답 체포영장 끊어주면 저 어떻게 되는 거나요?
문 야!
이번 사건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조사 과정에서 보호자가 동석하더라도 반드시 아이들의 방어권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법적 지식이 없는 보호자가 선처를 바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아이들에게 사실관계를 추궁하기도 한다. 이기수 박사는 “사회적 약자가 조사를 받을 때 법률 전문가가 동석하지 않으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미성년자나 지적장애인 등에게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국가가 의무적으로 국선변호인을 붙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또 “수사 과정에서 자백이나 진술에 집착하는 건 조서 중심 재판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수사 과정을 녹음 등 기록으로 남기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보호처분이 유죄 근거는 아냐”경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사건에 대한 강압 수사 지적에 대해 “유진호·이근민·김상호·박종수와 함께 집단 강간 혐의를 받았던 최명호와 김상혁은 만 14살 미만으로 형사 입건이 될 수 없어 2012년 10월18일 법원 소년부로 송치됐는데 각각 2010년 12월14일, 2011년 1월4일 판사로부터 보호처분을 받았다”며 “같은 혐의가 있던 아이들은 증거가 인정된다면서 판사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사 출신 오지원 변호사는 “보호처분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판사가 같은 혐의를 받은 이들이 불기소된 사실을 알고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호처분을 두고 경찰에서 해당 아이들이 유죄라는 근거로 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 |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받는 사람: 대통령님♥’…성탄 카드 500장의 대반전
한덕수의 ‘민심 역행’…민주당 ‘윤석열 신속 탄핵’ 구상에 암초
‘밀실 수사는 싫고 공개변론’ 윤석열의 노림수…강제수사 시급
서태지 “탄핵, 시대유감…젊은 친구들 지지하는 이모·삼촌 돼주자”
하마터면 고문 당하는 시대로 돌아갈 뻔 [하종강 칼럼]
허락 했을까요 [그림판]
“윤석열 복귀할까 심장이 벌렁거려”…일상에 새겨진 계엄 트라우마
이재명 “지금 예수께서 오신다면 내란 맞선 우리 국민들 곁에…”
이승환·예매자 100명, 대관 취소 구미시장에 손배소 제기한다
성탄절 아침 중부내륙 영하 10도 강추위…낮부터 흐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