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31일 아침,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서울 태평로2가 플라자호텔 4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항공업계의 애로사항을 듣는 조찬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업계 대표로는 지창훈 대한항공 사장,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 등 8개 항공사의 사장과 성시철 한국공항공사 사장, 배용수 한국항공진흥협회 부회장 등이 나왔다. 국적 항공사를 위한 세제 지원, 국내 항공편의 운항통제 시간 개선 등이 건의사항으로 나왔지만, 아침 식사 시간을 짬내 이뤄진 간담회는 금방 끝났다. 대신 국토부는 6월26일 서울 공항동 김포공항에서 항공업계 실무자 간담회를 열고 좀더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약속했다. 최정호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실장이 참석하는 실무자 간담회에서는 각 업체 부사장이 나와 구체적인 업계 건의사항을 설명하기로 했다.
‘원칙금지/예외허용’을 ‘원칙허용/예외금지’로
국내 최대 항공사인 대한항공도 이날 실무자 간담회를 위한 다양한 건의사항을 준비했다. 이 가운데는 항공업계 직원들에게 반발을 살 만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 입수한 ‘국토교통부 장관 초청 항공운송업계 CEO 간담회 건의과제’ 보고서를 보면, 대한항공이 ‘조종사·승무원의 파견직종 포함’을 국토부에 공식적으로 건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항공진흥협회가 국토부 주재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국내 항공사 8곳에서 건의사항을 건네받아 한데 묶은 것이다. 한국항공진흥협회 관계자는 “6월26일 간담회는 보고서에 나온 안건을 바탕으로 국토부의 답변을 듣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보고서 가운데 ‘운항 및 객실 승무원 파견근로자 사용 허용’(대한항공)이라는 꼭지에 담긴 내용에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파견 대상 업종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운항 및 객실 승무원에 대한 파견근로자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대한항공은 이에 대한 개선사항으로 “△사전 법정 필수이수교육 등이 많은 승무원의 특성상 인력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다수 발생되고 있어, 일시적 수요 증가에 대한 적시 인력 공급이 불가능한 상황 △사실상 장기 고용을 전제로 한 채용만이 가능하여 적극적인 고용 확대가 어려운 실정이며, 근로조건에 대한 법적 제한이 많아 인력의 신축적 운용도 불가능한 상황 △현재 32개 파견 가능 업종에 운항 및 객실 승무원도 포함하고 장기적으로는 정부의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 추세를 감안해, 현행 포지티브 방식(원칙금지/예외허용)의 규제를 네거티브로 전환”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실상 현재 파견법상 제한적으로 파견직을 허용하는 업종 안에 조종사(운항 승무원)와 객실 승무원(스튜어디스·스튜어드)를 포함해달라는 요구다. 이 보고서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아들인 조원태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장(부사장)이 전담하고 있는 경영전략본부 산하 정책기획팀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은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의 파견직 확대 제안에 대해 “건의사항으로 내놓은 것이 맞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관계자는“조종사나 객실 승무원의 경우, 항공기를 새로 들여오면 인력 수요·공급을 맞춰야 하는데, 자격증 등 사전 교육 이수 과정이 긴 승무원들이 그 수요를 따라오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항공사들이 좀더 탄력적으로 인력수요를 맞추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파견법 개정을 건의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항공업계가 5~10년 수요를 예측하고 항공기를 늘리고 있는데, 항공기 1대당 조종사 10명, 객실 승무원 40~50명 수준으로 필요하지만 정규직 선발로는 그 수요를 맞추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파견법 개정의 물꼬를 터놓으면 인력 수급이 원활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원론적 접근 방법이지 회사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윤 극대화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그러나 대한항공의 그동안의 행보에 비춰볼 때,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의 파견직 확대제안은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보기 힘든 구석이 있다. 국제 경기의 흐름을 타는 항공업계의 특성상 파견직을 통해 인력을 늘렸다 줄이는 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항공은 그동안 외국인 조종사의 고용에 대해 ‘불법 파견’ 여부를 두고 노동조합과 10년넘게 법적 다툼을 벌여왔다. 2003년에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가 대한항공이 용역업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외국인 조종사의 파견직 고용이 “파견직종을 제한하고 있는 파견법 위반”이라고 고소했지만, 검찰은 “용역업체가 외국에 있어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2011년에도 대한항공이 일본항공(JAL)의 구조조정 등으로 쏟아져나온 외국인 조종사를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해 불법 파견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당시 노동부는 “외국 업체에서 근로자를 파견받더라도 파견근로가 국내에서 이뤄지고 있다면 파견법이 적용돼야 한다”며 대한항공에 대해 검찰 송치 의견을 냈다. 그러나 검찰은 “고임금인 조종사의 파견 고용은 저임금노동자 보호를 위해 만든 파견법의 입법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또다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등은 파견직의 전면적 확대는 고용 불안정을 높일 뿐 아니라 항공 안전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종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 위원장은 “외국인 조종사 불법 파견 논란을 두고 헌법소원까지 올라간 상황에서 회사가 이런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뿐”이라며 “항공업계에 변화가 많은데 결국 해고가 용이해지는 식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민길숙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비정규전략조직국장은 “공해상을 지나다니는 항공 승무원들은 안전 교육 등이 필수적인데, 회사가 이를 책임지지 않고 서비스하겠다는 건 말 그대로 장삿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견법 관련 주무를 맡고 있는 고용노동부가 그동안 파견직 확대에 부정적 태도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대한항공의 제안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실무자 회의를 통해 이 안건을 포함한 내용들을 논의한 뒤, 부처에서 가능한 내용을 정부에 건의하는 등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가족 같은 회사는 무엇?조 회장의 맏딸 조현아 대한항공 객실승무본부장(부사장)은 지난 5월 이른바 ‘라면상무’ 사건 뒤 사내 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여러분은 우리 대한항공의 귀한 자산이고 얼굴이며 또한 자랑입니다. 이번과 같이 회사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안전한 근무환경 조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대한항공이 생각하는 가족 같은 회사는 과연 무엇일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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