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군 내부고발, 여전히 지뢰밭

상급자의 공금횡령 제보했다가 되레 징계받고 대령 진급 탈락한 황 중령… 3년 만에 징계처분 무효 받아들여져
등록 2013-06-01 18:04 수정 2020-05-02 04:27

병사 부식용 빵을 비싸게 사들인 뒤 납품업체로부터 ‘리베이트’ 받기, 상급부대에서 병사들에게 쓰라며 준 격려금 가로채기, 방탄모 도색비·사무기기 유지비·주방용품비 등 각종 비품 비용을 허위로 부풀려 남는 돈 챙기기….
그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했다. 반전도 기막혔다. 이 ‘화려한 비리’의 주인공이 ‘군대 안 경찰’의 지휘관이니 말이다. 이 내용은 국방부 검찰단이 2011년 6월2일 조사를 통해 발표한 이아무개(육사 38기) 예비역 준장의 비리 사실이다. 그는 2007년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장으로 근무하면서 1년 동안 부대 공금 가운데 약 4700만원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896호 초점 ‘입 열면 다친다, 그러니까 군대다?’ 참조).
국방부 검찰단 조사 결과를 보면, 헌병단장이던 이 전 준장(당시 대령)은 부임하자마자 부하들에게 ‘깨알 같은’ 공금횡령 지시를 내렸다. 빼돌릴 돈의 액수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뒤탈을 막기 위해 “무조건 현찰로 확보하라”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횡령한 공금은 대부분 병사들에게 돌아갈 돈이었다. 그는 순찰·경호행사 등에 필요한 부식용 빵을 납품업체와 짜고 한 개당 50원씩 비싸게 구입한 뒤 남긴 차액이나 각종 비품 비용 대금 등에서 2천만원을 마련하고, 명절·연말 때 경호경비 행사에 동원된 병사들을 위로하도록 상급부대가 마련한 격려금 1200만원도 가로챘다. 그 밖에 헌병수사관들의 사건처리비·출장여비 등을 개인 계좌로 입금해준 뒤 다시 현금으로 돌려받아 1300만원을 빼돌리기도 했다. 국방부 검찰단은 “당시 총괄 예산 업무를 담당한 장교가 횡령액의 50% 정도는 이 전 준장이 회식비 등 비공식 부대 운영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이 전 준장의 개인 활동비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며 “그러나 이 전 준장은 횡령 자체를 부인해 정확한 사용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화려한 비리’ 주인공 준장 승진
이 대령의 화려한 ‘살림 빼먹기’가 처음 드러난 건 내부고발을 통해서였다. 2010년 11월, A4용지 5장 분량의 투서가 승장래(육사 37기) 육군 중앙수사단장 앞으로 배달됐다. 편지 겉봉 발신인은 ‘국회예산정책처 서기관 ○○○’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이 전 준장과 같은 헌병 병과에 있던 황아무개 중령이 보낸 것으로, 이 대령의 구체적인 공금횡령 시기와 방법, 액수 등이 적혀 있었다. 앞서 황 중령은 편지를 보내기 2년 전, 이 대령의 공금횡령을 도운 군 후배에게서 비리 사실을 자세히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후배는 “지휘관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 군인의 의무와 도덕적인 양심 사이에서 괴롭다”고 했다. 황 중령은 편지에 “장군 진급 심사가 시작되면서 이 대령의 준장 진급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런 사람이 헌병 병과장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을 담았다.
육군 중앙수사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달 뒤, 황 중령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띄웠다. 이번에는 편지 겉봉에 ‘○○구청장 ○○○’라고 썼다. 편지를 쓴 이가 육군의 일원이며 승장래 단장이 이 대령의 횡령 사실을 제보받고도 비호했으니 엄벌해달라는 내용도 담았다.
국방부 장관에게 간 투서 덕에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칼끝은 엉뚱하게 황 중령에게 향했다. 그사이 이 대령은 별을 달고 승 단장의 뒤를 이어 육군 중앙수사단장이 됐다. 승 단장은 국방부 조사본부장(소장)으로 진급했다. 부실수사 의혹을 받는 지휘관이 이끄는 국방부 조사본부가 공금횡령 조사를 시작했고, 형사처벌할 수준의 사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준장은 곧바로 전역을 신청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투서의 발신인인 황 중령을 잡아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이 전 준장의 횡령 혐의 무마 의혹이 제기되자 김 장관은 뒤늦게 재조사 지시를 내렸다. 2010년 6월 재조사를 끝낸 국방부 검찰단은 “이 전 준장을 민간 검찰에 이첩하고, 그의 지시를 받고 횡령에 가담한 다수의 군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 여부를 민간 검찰과 공조수사를 한 뒤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로 넘어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검찰은 이 전 준장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내사종결 처리를 했다. 승 본부장은 부실수사 등으로 군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지만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말 전역했다. 군 징계위는 황 중령에게만 군인복무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지휘계통에 따라 정상적으로 제보하지 않았고(군인복무규율 위반), 개인 노트북으로 투서를 작성했고(보안규정 위반), 다른 이의 이름으로 투서를 보냈다(품위유지 위반)는 것 등이 이유였다. 징계위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징계위에 통보한 “황 중령이 공익제보자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황 중령을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부패방지법) 등에 명시한 신분보장·책임감면 대상으로 적용하지도 않았다.
황 중령이 제기한 내부고발의 정당함은 3년이 지나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전고등법원 제1행정부(재판장 이승훈)는 지난 5월9일 황 중령이 “부패행위를 신고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발생한 행위는 부패방지법에 따라 징계가 면제돼야 한다”며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낸 견책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황 중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앞서 지난해 9월 대전지방법원이 “부패행위를 신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범법행위를 한 경우에는 그 행위로 인한 처벌까지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없다”며 황 중령의 징계가 적법하다고 내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군인복무규율을 위반했지만 공익에 기여한 점을 판단한다면 황 중령이 부패방지법에 따라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황 중령의 변론을 맡은 최강욱 변호사는 “군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부패행위가 사실상 최초로 처리된 사례”라며 “앞으로 군 내부에서 공익제보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할지 볼 수 있는 판례”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육군은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할 예정이며 더 밝힐 입장은 없다”고 답했다.
육군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
결국 황 중령의 용기는 인정받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가혹했다. 그사이 황 중령은 대령 진급 심사에서 떨어졌다. 내부고발자가 오히려 피해를 받는다는 공식은 비껴가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직원 댓글 사건의 내부고발자가 파면되고, 대법원이 삼성 X파일 사건을 알린 노회찬 전 의원에게 유죄라고 말하는 가혹한 사회에서 판결문 몇 장이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