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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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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전기’ 쓰시나요

전력 부족이라지만 피크 이외에는 70~80%는 남아도는 전기, 공급 아닌 수요 관리 필요
정보통신 기술에 전력망 접목시킨 ‘스마트그리드’ 주목받아
등록 2013-04-27 14:47 수정 2020-05-03 04:27

공급과 수요가 어긋나 불균형이 생기면 둘 중 하나를 조절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 막바지인 지난 2월22일 지식경제부가 내놓은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초점은 ‘공급’이었다. 전력 수요 전망치를 2년 전보다 크게 높여 잡고, 그 대부분을 석탄화력발전소 신설로 충당하는 내용이었다. 오는 2027년 전력 예비율은 22%로 끌어올렸고, 신설 예정인 석탄 등 화력발전소는 18기에 이르렀다. 당장에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를 앞두고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 약속한 202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가 불가능해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더 심각한 것은, 수요 예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기가 부족해 정전까지 가는 일은 드물다. 흔히 ‘피크’(peak·절정)라고 불리는 여름과 겨울 며칠, 또는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22%의 전력예비율을 갖추고 있어봤자, 평소엔 70~80%의 전기가 남아돈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생산한 에너지는 저장할 방안이 없어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 실익이 없어 보인 탓에, 임기 말 혼란을 틈타 누군가의 잇속만 챙겨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4대강 사업 이후 ‘토건족’의 먹거리를 챙겨준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배려라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발전소를 세워 전력 생산을 늘리자는 공급 중심 모델에 비난이 빗발치면서, 최근 주목받는 게 전력의 수요관리 모델과 전력저장장치(ESS)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전기 사용을 줄이거나, 전기를 저장했다 나중에 다시 쓰는 것도 ‘전력 생산’으로 보자는 식이다.
새로운 방식의 ‘생산’, 절전소 또는 네가와트
우선 수요관리 모델은 가격정책 같은 인센티브를 통해 전력 사용 감소를 유도한다. 이를테면 시간대별로 요금을 다르게 책정할 수도 있다. 여행객 수가 적은 주중과 많은 주말의 항공 요금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도 전기요금이 원가보다 낮아서 한국전력이 계속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싸게 책정된 상업용·산업용 전기에 대한 인센티브는 효과가 클 수 있다. 한국의 전력 수급 상황은 평소 전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아니다. 피크만 관리하면 된다. 전기를 줄이는 새로운 방식의 ‘생산’이란 관점에서, (발전소가 아닌) ‘절전소’라거나 (메가와트가 아닌) ‘네가와트’(Nega Watt)라는 용어도 쓰인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은 “에너지는 공급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발전소 이외의 다른 수단은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줄이는 것도 발전에 버금가는 에너지 효율화 수단이다. 공급만 지원할 게 아니라 수요관리의 관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은 발의 취지에 대해 “에너지 수요 관리를 위해 전기 효율을 높여 피크를 낮춘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피크를 낮춰 절약되는 비용으로 새로운 에너지산업 시장을 촉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의원은 전력 소비에 대한 관리 및 컨설팅을 포함하는 ‘수요관리사업’을 법제화하자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4월22일 발의할 계획이다. 전력 사용 감소에 대한 인센티브를 매개로 한 시장을 열자는 것이다.
ESS를 바라보는 관점도 수요관리와 다르지 않다. 전력을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다는 개념이므로 새로운 형식의 ‘발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승일 서울대 교수(전기·컴퓨터공학)는 4월18일 강길부 새누리당 의원의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ESS를 발전기이자 신재생에너지원으로 다루도록 법제화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문 교수는 “ESS를 발전기로 인정하고, ESS로 생산한 전력을 전력 거래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SS가 비상발전기 종류에도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법 개정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면 시장은 민간기업들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ESS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재생에너지 쪽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풍력, 조력 및 태양광 발전은 일정하게 발전량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생산한 전기를 저장하는 기술이 절실하다. ‘친환경’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전기자동차도 ESS 기술이 필수적이다. 앞서 설명한 수요관리와 연결지어보면, 싼 시간대에 전기를 저장했다가 비싼 시간대에 쓰는 방식을 응용할 수도 있다. 에너지는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만 쓰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관점에선, 프레온가스 터빈(태양열발전)처럼 규모가 아주 작은 소형 발전 시설과 ESS를 병행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도시 아닌 제주도에서의 실험
사실 수요관리나 ESS는 모두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의 한 단면이다. 스마트그리드는 정보통신 기술과 전력망(grid)을 접목시키는 개념이다. 소비자의 전기사용량과 공급량, 전력선의 상태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면 생산자 쪽에서는 전력공급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전력 사용이 적은 시간대에는 최대 전력량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남는 전기가 있다면, ESS나 양수발전(전기를 써서 일단 물을 퍼올린 뒤, 전기가 필요할 때 그 물로 수력발전을 하는 방식) 등의 방식으로 저장할 수 있다. 버려지는 전기가 적어 에너지 효율이 높아지고, 석탄·석유·가스 등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이점이 있다.
정부는 2011년 6월부터 제주도에서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사업을 운영해왔다. 풍력과 태양광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전기자동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릴 수 있다. 실시간으로 전기사용량과 전기요금을 계산하고, 생산한 전기를 팔 수도 있다. 정부는 이곳에서의 스마트그리드 운영 경험을 토대로, 2030년까지 국가 에너지 소비의 3%를 절감시키고 피크 부하를 6%까지 덜겠다는 목표를 내건 상태다.
다만 스마트그리드가 자리잡아야 할 곳은 도시라는 점에서, 제주에서의 ‘실험’에 치중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해 광역별 거점도시 구축이나 특구 선정 등 ‘도시 실험’ 방안이 거론된다. 이상훈 신재생에너지학회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장은 “국가 차원에서 어떤 전력 시스템을 지향하는지가 분명히 나와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재생에너지 발전까지 고민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기의 수요·공급이 어긋난 상황에서, 인간이 저지른 약간의 실수가 보태져 벌어진 사건이 2003년 미국 북동부 정전이었다. 10년 전인 8월14일 미국의 뉴욕·뉴저지·미시간·오하이오와 캐나다 온타리오 등 북동부 지역에 전기가 끊겼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전 사태로 공항이 폐쇄되고 발전소 가동도 중단됐다. 완전한 복구엔 3일 이상 걸렸고, 시민들은 ‘9·11 2년 뒤’라는 공포와 ‘전기 없이 사는 법’이란 낭만의 기록을 남겼다.
지난해 8월 예일대 산림환경대학원과 존스홉킨스대학은 당시 정전의 영향으로 사망한 사람이 90명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망자의 대다수(78명)는 질병으로, 나머지 12명은 사고로 숨졌다. 약국이 문을 닫고 앰뷸런스 도착이 지연되는 등 정전으로 의료체계가 정상 작동하지 못한 탓이 컸다.
전기가 없으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
다양한 전력 생산 방식이 논의되는 오늘, 동시다발로 우리나라 전역을 암흑천지로 몰아넣은 2011년 9·15 정전이 발생한 지도 어느덧 1년6개월이 지났다. 전기가 없으면 죽음마저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 그 기간에 우리의 준비 태세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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