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6일 아침 9시 서울서부지법 앞, 선연한 붉은 글씨로 ‘미술수출, 사회정화’라 고 쓴 피켓과 함께 ‘조는 하트’ 탈을 쓴 이가 보인다. 붉은 글씨 밑에는 박정희라는 이름 이 선명하다. 강영민 작가는 박정희의 휘호 를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판사의 판결봉 을 머리에 이고 온 이들도 보인다. 바닥에는 29만원짜리 수표를 든 전두환의 얼굴이 담 긴 풍자화가 쫙 깔려 있다. 이윽고 ‘국내 최 초 연예인형 아티스트’로 유명한 낸시랭이 여 배우 같은 모습으로 차에서 내린다. 구치 모 피와 ‘앙’ 표지판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낸시 랭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몰려들었다. “전두 환 전 대통령, 얼마나 청렴하게 사셨으면 재 산이 29만원밖에 없으실까.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존경해요. 거의 신적인 존재시잖 아요. 그분 가족도 국민을 위해 일하고 계시 고.” 과연 낸시랭답다. 이른바 ‘한 예술’ 하시 는 분들,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주로 뱀파이 어 같은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는 예술가들 이 아침 9시에 관공서 앞에 모였다는 것 자 체가 거의 기적이 아닌가.
‘예쁜’ 박근혜, 사무실에서 붙인 거 아냐?
이들은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 념일에 앞서 전두환 풍자화를 붙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하 작가(본명 이병하)를 응원 하기 위한 퍼포먼스 중이다. 이하 작가는 지 난해 5월17일 새벽 3시쯤 서울 연희동의 전 두환 자택 인근 골목에 전두환 풍자화 70여 장을 붙이다 순찰 돌던 순경에게 적발돼 서 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경범죄처벌법 상의 ‘광고물 무단첩부’ 혐의로 약식 기소돼 벌금 10만원을 부과받았다. 이하 작가는 유 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했 고, 서울서부지검에서 정식 기소돼 첫 공판 이 열린 것이다. 참 쪼잔하기도 하다. 쥐 그 림 사건 때는 국가 재산인 포스터를 훼손했 다고 공용기물손괴죄라더니, 이번에는 광고 물 무단첩부란다. 전두환 그림이 어떻게 광 고물일까. 뭘 광고하나? 전두환을? 29만원 수표를?
이하 작가가 거리에 그림을 붙인 일로 법 에 소환된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6월과 11월 박근혜와 문재인의 그림을 거리에 붙였 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6월28일 부산의 중심가 버 스 정류장에는 ‘독사과를 든 근혜 공주’ 그림 200여 장이 붙었다. 백설공주 차림의 박근 혜가 박정희의 얼굴이 그려진 독사과를 들 고 청와대 잔디밭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박근혜 지지율이 높던 부산에서는 실 물보다 예쁘게 그려진 박근혜의 얼굴을 보 고 박근혜 사무실에서 붙인 걸로 오인하는 행인도 있었다 한다.
그림은 당일 오전에 모두 철거됐지만, 부 산진구 선거관리위원회는 이하 작가를 경 찰에 고발했다. 공직선거법 93조 1항에는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 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정당 또는 후보자 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 되어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 성명 을 나타내는 광고, 벽보, 사진 또는 그와 유 사한 것을 배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나와 있다. 선거에 앞서 약 6개월 전 에 붙인 것이니 ‘180일 전’은 맞다. 그런데 이 그림을 붙인 행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는 목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 차례 계속된 검찰 조사는 여기에 집중됐다 한다. 집요하게 지지 정당과 후보를 묻고, 심지어 보궐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있는지를 캐묻기도 했단다. 이런 조사가 징글맞을 만 도 하건만, 이하 작가는 11월6일 문재인과 안철수의 얼굴을 반반씩 섞은 아수라 백작 같은 얼굴을 서울 종로와 여의도 등의 버스 정류장에 붙였다. 서울시 선관위는 재빨리 검찰에 고발했고, 두 사건 모두 기소를 앞두 고 있다.
이하 작가는 미국 영주권자로 주로 유명인의 얼굴을 그리는 팝아티스트다. 2011년 12월 나치 모자에 삽이 그려진 넥타이를 맨 이명박 얼굴 그림을 종로 일대에 붙여 국내에 알려졌지만, 이에 앞서 미국 뉴욕에서 버락 오바마, 김정일, 블라디미르 푸틴, 후진타오 등의 얼굴을 담은 ‘귀여운 독재자’전을 열기도 했다. 전두환 그림 부착도 광주문화재단에서 주최한 5·18 특별전에 초대를 받아 개인전을 열던 중에 이뤄진 것이다. 지난해 7월에는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의 초청으로 ‘귀여운 독재자’전을 열었지만, 유독 전두환과 박근혜 그림은 걸리지 못했다.
전두환과 박근혜 못 걸린 ‘귀여운 독재자’전[사건번호 2013 고정 160] 3월26일 오전 10시 서울서부지법 307호, 이하 작가의 공판이 시작됐다. 박석용 검사는 “다른 사람의 주택 담에 광고물을 함부로 부착한 혐의로 경범죄에 해당된다”며 사건 요지를 말했다. 전경훈 판사는 “피고는 퍼포먼스였다는 취지지요?” 하고 물었다. 박주민 변호사는 쟁점이 두 가지라고 운을 떼었다. 첫째는 개정 전 경범죄 1조 13호에 “다른 사람 또는 단체의 집이나 그 밖의 공작물에 함부로 ‘광고물 등’을 붙이거나 걸거나 또는 글씨나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행위 등’을 한 사람”으로 규정돼 명확성이 낮아서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광고물은 상업적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광고물 등’으로 규정해 적용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보호법익이 불분명한 것도 논란거리다. 박 변호사는 집주인이나 행인의 불쾌감을 막기 위함이라면 불쾌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경찰의 추정일 뿐이어서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둘째는 위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를 예술행위에 적용해 처벌할 수 있는지를 다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혜정 변호사는 한술 더 떴다. 이 사건은 예술과 법의 한계를 다루는 사건이라고 운을 뗀 뒤, 헌법 11조에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22조에 별도로 예술과 학문의 자유를 명시한 것은 국가권력이 예술을 억압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이 정치인이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법의 이름으로 제한한다면 사전 검열과 다르지 않으며, 경범죄 처벌의 목적인 공익의 효과와 이로 인해 침해되는 예술활동의 자유를 비교해보면 이 사건은 무죄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집의 소유자는 아무 말 없는데 순경에게 잡혀판사는 헌법이 예술활동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는 있지만, 창작의 자유와는 별개로 전시의 자유는 제한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잘 판단해야 한다고 선을 그으며, 검사에게 집의 소유자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지 물었다. 맞다. 행인이나 주민의 신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순찰 돌던 순경에게 잡힌 것이다. 최근 경범죄처벌법의 개정법과 시행령이 논란이 됐는데, 핵심은 경찰의 자의적 판단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처벌하고 하지 않을지의 판단이 경찰의 재량에 달린 것이다. 검사는 “없다”고 답하며 “이 사건은 광고물의 내용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남의 집 담벼락에 부착한 행위를 문제 삼는 것으로 예술의 자유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판사는 변호사에게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할 것인지 묻고, 어차피 경범죄처벌법 4조에 “법을 적용함에 있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목적을 위해 함부로 적용해선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본 법정에서 판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판사는 증거 조사와 증인 신청은 다음 공판에서 다루기로 하고 다음 공판일을 4월11일 목요일 오후 2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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