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군부독재가 잉태한 학생운동 리더들, 그들의 노동 현장 이전, 그들의 신노선, 그들의 민주노동당이 문을 닫았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투항했다.”
부유세·무상의료·무상교육, 처음으로 정책의제화
3월 초 온라인 진보매체 에 ‘노회찬과 주대환을 떠나보내며’라는 글이 올랐다. 지난해까지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재영의 칼럼이었다. 이재영은 두 사람과 1980년대 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시절부터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함께 해온 막역한 사이였다. 그가 글을 쓰기 얼마 전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으로, 주대환은 민주통합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재영은 글에서 두 사람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내게 주대환과 노회찬은 과학이었다. 나는 그이들의 권능을 믿고 추종했다. 그 ‘과학’이 더 이상 과학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나는 내 시대의 과학으로부터 벗어났다. 다시금 20대 때와 같은 시적(詩的) 혼돈의 시대로 회귀했다.”
당시 이재영은 암과 싸우고 있었다. 신병을 기술하는 이재영의 태도는 담담했다. “의사들은 내게 25%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의사들 입장에서야 낙관적이기 어렵겠지만, 살아오면서 그처럼 커다란 확률을 잡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로또 맞은 것처럼 기쁘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잡아본 4분의 1의 ‘고확률’은 끝내 현실화되지 못했다. 12월12일 저녁, 조용히 감긴 이재영의 눈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생전의 이재영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누군가는 그를 ‘진보정당의 설계자’라고 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서 당의 강령을 기초하고 다듬은 게 이재영이었기 때문이다. 강령 전문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한다”는 내용을 넣은 것도 그였다. 그는 ‘진보 진영 최고의 정책전문가’로도 통했다. 지금은 새누리당조차 거론하는 ‘부유세’를 민주노동당의 간판 공약으로 밀고 나간 것, 민주당까지 실현을 약속한 ‘무상의료·무상교육’을 처음으로 정책의제화한 것 모두 이재영의 작품이었다.
1967년생인 이재영은 흔히 말하는 386세대다. 그러나 양지의 386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대학 1학년이던 1986년, 남들 다 쌓는 학생운동 경력을 포기하고 노동 현장에 뛰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울과 경기도 성남, 안산 등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조직 활동을 하던 그는 1991년 노회찬·주대환·황광우 등 인민노련 선배들이 주도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 들어가며 정당운동을 시작했다. 1992년 민중당 경기도당을 시작으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1995~96년), 국민승리21(1997~99년), 민주노동당(2000~2006년)을 거치며 줄곧 정책국(실)장으로 일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게 암을 재촉…”하지만 그가 단순히 정책 전문가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낸 변호사 김정진의 회고다. “그는 진보정당의 전략과 노선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이 아닌 개별 사업장 혹은 대기업 노동자의 이해만 추구하는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맞섰고, 가난한 사람의 복리보다 반미와 통일에만 천착하는 민족주의자들과도 맞섰다. 정당 없는 혁명 노선이나 총파업 노선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론가, 전략가, 정책 전문가이기에 앞서 이재영은 누구보다 헌신적인 활동가였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을 지낸 장상환 경상대 교수의 전언이다. “회의를 하고 많은 전문가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당에서 지원받는 금액을 넘는 부분을 대느라 수천만원의 빚을 내기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느라 소주와 삼겹살을 너무 자주 먹은 것이 대장암 발병을 재촉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준 게 후회스럽다.”
민중당(1992년), 국민승리21(1997년)이 총선과 대선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고 당이 해산하거나 식물 상태에 빠졌을 때 뒷수습을 하고 조직을 추스른 것도 이재영이었다. “지도자연하던 많은 인물들이 1997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낙담해 국민승리21을 떠났다. 이재영은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서 진보정치의 불씨를 지켰다.”(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2004년은 고단했던 그의 45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 그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의원 10명을 배출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 민주노동당은 거대 보수정당의 정책연구원 규모와 맞먹는 50명의 인력으로 당 싱크탱크를 꾸리고 다양한 정책과 공약을 개발했다. 당시 정책국장을 맡은 이재영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건스탠리·ABN암로 같은 외국계 투자회사들까지 당사를 찾아 당론과 정책을 물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일 역시 이재영의 몫이었다. 이후 한국의 진보정당 가운데 어느 곳도 2004년 민주노동당이 지녔던 정책 역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은 이후 분당과 패배, 재분열의 과정을 거치며 올해 대선에서는 정치적 존재감조차 희미할 만큼 쇠락했다.
탁월한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던 이재영은 앞서 인용한, 그의 마지막 칼럼이 된 기고문을 “기적이야말로 시인의 목표다”라는 이탈리아 시인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경구로 마무리했다. 지금으로선 한국 진보정당의 회생이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될 터인데, 이재영은 그 기적을 현실화할 방책까지 친절하게 제안해놓았다. “제 한 몸 살리겠다고 불량배의 사타구니 밑을 기는 것은 일시의 모면책일 뿐이다. 잔도(棧道)를 불사르고 파촉(巴蜀)에 깃드는 것만이 장래의 출사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독립적 정치세력임을 흔들림 없이 천명하고, 작은 영지나마 소중히 가꾸어나가는 것이 현 단계 진보정당운동의 과제다.”
욕먹은 노회찬 오래도록 빈소를 지키고12월13일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그가 몸담은 진보신당뿐 아니라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민주당까지 애도의 뜻을 밝혔다. 민주노동당 대변인으로 찬란했던 2004년을 이재영과 함께했던 박용진(민주당 대변인)은 “그의 걸음은 멈췄지만 평등,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걸음은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허락해주신다면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이 고인이 만들어놓은 정책들을 바탕으로 새 정치,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겠다”고 논평했다.
그날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이재영의 빈소를 노회찬과 주대환은 오래도록 지켰다. 이재영이 “기왕에 욕먹으며 어려운 발걸음 뗐으니 국회의원 자리든, 남루하지 않은 삶이든 소망했던 바 성취했으면 좋겠다”고 한 노회찬은 다음날 환자복 차림의 이재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짧은 애도사를 남겼다. “잘 가게, 이재영. 그대 옮기다 만 산 우리에게 넘기고, 무거웠던 삽 다 내려놓고, 이제 좀 쉬게나.”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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