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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양토업자였다. 토끼 팔아 아들 둘과 아내를 건사했다. 1974년 6월7일 오후, 경기도 평택의 오종상(당시 33살)씨 집에 점퍼 입은 남자 2명이 들이닥쳤다. ‘본부’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경기도 수원으로 가자며 오씨를 차에 태웠다. 오씨는 겉옷도 못 걸친 러닝셔츠 바람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원지부를 거쳐 그날 저녁 오씨가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정부 비판 말 몇 마디에 징역살이
취조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다짜고짜 “지난 5월17일과 22일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느냐”며 오씨를 ‘빨갱이’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빨갱이라는 말에 숨통이 조여왔다. 기억을 더듬었다. 읍내 가던 버스에서 여고생들에게 건넨 얘기가 떠올랐다. 반공·근면·수출증대가 주제인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학생들에게 오씨가 한 말은 이랬다. “수출증대가 뭔지 아나. 선량한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다.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정부 고관과 부유층은 분식이랍시고 국수 약간에다 달걀과 고기를 듬뿍 넣어 먹는다. 민주주의 못하는 유신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사느니, 이북하고 통일을 해서라도 잘사는 게 낫다.”
오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1호(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및 반공법 위반(북한 찬양)이었다. 밤낮없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혐의를 인정해야 끝날 기세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을 학생들에게 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부인할 때마다 여지없이 각목이 날아들었다. 매질은 팔과 등, 머리를 가리지 않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기절을 했는데, 여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들어와 주사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혐의를 부인할 때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틀 동안 몇 시간도 못 잤을 것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씨에겐 당시 상황을 복기하는 게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일주일 뒤 오씨는 구치소로 이감됐다. 1974년 7월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오씨는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형을 확정받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오씨의 절규에 어느 판사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사법부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오씨의 사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오씨 같은 ‘필부’가 대부분이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보면, 1140명이 연루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 가운데 일반 시민이나 교사, 학생, 종교인 등이 술집이나 거리, 학교, 교회 등에서 정권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다 처벌받은 경우가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82건(48%)이었다. 1974년 1월 이웃에게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고 말한 무직자 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7년이 확정됐고, 같은 해 5월 이웃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으로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됐다”고 말한 농민 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7월 오종상씨가 전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을 때, 단란했던 가정은 풍비박산 나 있었다. 경찰에 시달려온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도리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들 둘은 여동생이 거둬 길렀다. 이런 탓에 오씨는 지금도 아들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 고문의 후유증도 오래갔다. 지금도 허리디스크와 위장병을 달고 산다. 오씨는 요즘 뉴스를 볼 때면 숨이 막힌다. “누구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이 신세가 됐는지를 생각하면, 그 딸이 대통령이 되면 울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다. 젊거나 돈이라도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지. 하지만 그게 내게 가당키나 한가.”
딸이 간첩이라는 말 듣고 충격에 죽은 엄마
범부의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유신체제가, 굴종을 거부하는 이들에겐 오죽 사나웠을까. 청계피복노조 부지부장으로 유신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신순애(59)씨에게도 그 시절은 모질도록 잔인한 세월이었다. 1977년 9월 신씨는 노조원들과 함께 당시 노동교실이 입주해 있던 서울 을지로의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된서리를 맞았다. 경찰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노동교실의 퇴거를 요구하며 공권력을 요청하자 홧김에 실랑이를 벌이다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
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들이민 혐의 내용이 기가 막혔다. “건물주가 요구한 퇴거 시한이 9월10일이라 하루 전에 시위를 한 것인데, 경찰은 북한의 건국일인 ‘9·9절’에 맞춘 것이라며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장씨 성을 가진 정보과 계장이 얼마나 거칠게 손찌검을 했는지, 지금도 그때 맞은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신씨는 호소했다.
당시 신씨가 믿을 것이라곤 판사들뿐이었다. 그래도 법관들은 배우고 양심적인 사람이니 경찰과 달리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법대 위의 판사가 물었다. “왜 9월9일이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 아니오?” 맥이 풀렸다. 원통했다. 남은 힘을 모아 절규를 쏟아냈다. “우리가 가장 무서운 게 빨갱이요. 판사님까지 우릴 빨갱이로 모는 거요?”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받고 11개월 만에 출소했다. 하지만 직장에는 돌아갈 그의 자리가 없었다. 다른 공장에도 블랙리스트가 돌아 취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노조에 나가면 중부서 형사들이, 이문동 집에 가면 동대문서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견딜 수 없어 이사를 가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오빠가 말했다. “동네 사람들 보기 그렇다. 노조일 접어라.”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도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결국 어머니만 모시고 집을 나왔다.
1978년 겨울, 하루는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게서 신씨가 간첩이란 얘기를 들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며 모진 말을 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통곡했다. “네가 왜 간첩이냐.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달을 겪은 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났다.
1980년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지인들의 도움으로 청소년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생활도 차츰 안정이 됐다. 2006년엔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해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지난 6월 성공회대에서 ‘13살 여공의 삶’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신씨는 “돌이켜보면 과도한 진학열과 학력주의, 노동 천시 풍조 같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박정희 시대의 속도전식 산업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제는 너무 확고히 뿌리내려 어디서부터 손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같다”고 했다.
통속소설 속 군 비판 내용으로 고초
유신시대에 고초를 겪은 모든 이가 박정희의 비판자가 된 것은 아니다. 출판인 송성헌(67·도서출판 청조사 대표)씨가 그런 경우다. 송씨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던 그날의 하늘빛을 잊지 못한다. 서울 을지로의 출판사로 찾아온 기관원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연행된 직후였다. “서울에 살면서 그렇게 푸르고 투명한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바깥 세계였으니, 그 느낌이 어땠겠나.”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5개월이 지난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편집자로 일하다 막 독립한 초보 출판인 송씨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회사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게 급선무였던 까닭이다.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에야 필화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 업계 사람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정도였다.
“불안했다. 연행되는 차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책은 낸 게 없었으니까.” 궁금증은 조사실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그해 펴낸 소설책 한 대목에서 군에 간 주인공이 군대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게 기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념소설도 아니고 연애담을 다룬 통속소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책은 내가 기획한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낸 것을 중개업자한테 인쇄 원판만 사들여 찍어낸 것이었다.”
사정을 잘 설명하면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파출소 한번 가본 적 없는 그가 밀실 수사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방에서 조사받던 중개업자는 겁에 질린 탓인지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거칠게 귓방망이를 올려붙였다. 옆방에선 수시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송성헌’을 수십 번씩 되뇌며 정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려 애썼다. ‘껀수’가 안 된다고 판단했을까. 조서를 꾸미던 수사관 얼굴에 ‘김샜다’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얼마 뒤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조서를 훑더니 서류 뭉치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임마, 앞으로 조심해.”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풀려나와 집에 가니 통금 직전이었다. 연행 13시간 만이었다. 끌려간 곳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트라우마는 오래갔다. “원고를 볼 때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4년 뒤 박정희가 죽었다. 그사이 출판사는 자리를 잡았다. 같은 번역소설이 히트를 쳐 1980년대 중반엔 번듯한 사옥도 지어올렸다. 박정희에 대한 증오도 누그러들었다.
“그 뒤로 정권 잡은 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박정희는 괜찮은 사람이었더라. 애국심 하나는 투철했고, 무엇보다 청렴하지 않았나.”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란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물론 실망이 크다. 그럼에도 송씨는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경제가 어렵잖나. 다시 도약해야지. 유신을 선포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한 건 잘못했지만, 박정희 시대가 우리한테 심어준 게 ‘잘살아보자’ ‘하면 된다’는 마인드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게 그런 근면성과 자신감이다.”
‘새마을회’란 이름 탓에 사찰받기도
실향민 출신의 새마을지도자 전영훈(78)씨도 ‘하면 된다’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당시 부천군 대부면 선감도)에 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7월 박정희로부터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수출은 안 되는데, 공장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강조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뭉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지도자들 책임이 막중하다.”
그가 마을에 학교를 연 것은 군에서 전역한 직후인 1958년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변에 떠밀려온 깡통 속 윤활유를 된장국에 풀어 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였다. 마을 고아원 한켠에 교실을 꾸민 뒤 글 모르는 주민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하기도 전인 1968년부터 수산·건설·문교·후생·총무 등 5개 반으로 편성된 ‘새마을회’를 조직해 선착장과 호안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등을 짓기도 했다.
새마을회란 이름 때문에 정보과 형사들의 미행을 받는 등 곡절도 겪었다. “당시는 강원도 속초의 실향민촌 아바이마을에서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새마을회란 이름의 지하조직을 만들었다가 적발된 직후였다. 그것도 모르고 ‘새마을’이란 이름을 가져다 썼으니 기관의 의심을 살 만도 했다.”
도시에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낙후된 농촌에선 여전히 많은 주민이 끼니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973년 전씨는 우선 마을 소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주민들을 설득해 ‘산돌 10만 덩이 줍기 운동’을 펼쳤다. 돌덩이를 갯벌에 투하해 굴 서식지를 만들 요량이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굴 양식으로 마을의 벌이가 훌쩍 뛰었다. 이 공로 덕에 전씨는 5번의 장관 표창과 4번의 총리 표창에 이어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다. 전씨 집 거실에는 아직도 훈장을 달고 박정희와 찍은 사진과 함께 ‘국토통일’이란 박정희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그 시절의 기억을 필생의 자랑거리로 간직해온 전씨지만 유신에 대한 평가만은 비판적이었다. “박정희는 대단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애국도 과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아무리 안보가 흔들리고 경제가 불안해도 그런 식의 극약 처방은 하는 게 아니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최대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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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전씨가 청와대에 불려가 훈장을 받던 시각,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선 알몸의 오종상씨가 피투성이 신세로 죽음의 공포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같은 유신의 비판자임에도, 두 사람의 비판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기 힘든 이유다. 소개한 4명의 유신 체험 역시 그 시대의 전모를 보여줄 순 없다. 진실은 그 모두이거나, 그 사연들로 포괄하지 못한 빈 공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자 정근식(서울대 교수)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외상 입힌 근원, 샤먼 같은 존재감“박정희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전체상은 뚜렷하지 않다.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른 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의 박정희 체제와 기억 속의 박정희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군부독재 정권은 더 이상 재생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정희라는 이름은 때로는 치유되지 않은 외상을 입힌 근원으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존재감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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