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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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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워싱턴까지 세기와 더불어 문제적 인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세계적 신도 확보한 통일교 교주로 성장한 고 문선명 일대기
닉슨의 옹호자로 미국에서 주목받고, 수만 명 일본인 신도 거느린 자칭 메시아, 김일성과 회담한 반공주의자
등록 2012-09-11 19:25 수정 2020-05-03 04:26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moonie’를 ‘the Unification Church’로 풀이한다. ‘통일교’를 뜻하지만 모욕적 맥락에서 사용된다는 설명이 붙었다. 다른 영어사전들도 ‘통일교’와 함께 ‘통일교 신자’ ‘통일교 신봉자’로 뜻을 설명한다. 이 단어는 ‘문선명’이라는 논쟁적 이름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Sun Myung Moon’이라는 이름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과 유럽 유력지들의 헤드라인을 숱하게 장식했다. 외국 언론에 등장한 그의 이름에는 신흥종교, 평화, 이단, 세뇌, 합동결혼식, 반공, 보수우파 후원자, 기업집단, 청문회, 탈세 등이 컬트적으로 착종돼 나타났다.

한국에서 이단으로 몰리자 외국에 눈 돌려
지난 9월3일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 총재가 경기도 가평 청심국제병원에서 92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난 8월14일 감기와 폐렴 합병증으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문 총재는 회복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같은 달 31일 통일교 성지 안에 위치한 청심국제병원으로 옮겨졌다.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이라는 그의 ‘성화’(통일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를 두고 국내 언론보다 외국 언론들이 더 뜨겁게 반응했다. 부고 기사(오비추어리)로도 유명한 미국 는 “전도사, 비즈니스맨, 자칭 메시아”라는 여러 수식어로 시작하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영국 은 “수천 쌍 합동결혼식 주재자”, 미국 은 “거대 기업제국 창시자”, 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 커다란 종교적 움직임을 만든 유일한 지도자”로 조명했다.
192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문 총재는 16살 되던 해 예수님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아흔을 바라보던 2009년 출간한 자서전 는 예수 현현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새우고 난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라고 말씀하셨다.”
평양에서 종교 활동을 시작한 문 총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4년 5월 장충단공원이 있는 서울 북학동 판잣집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통일교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연세대·이화여대가 통일교에 입교한 일부 학생과 교수들을 퇴학·퇴직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교리를 둘러싼 ‘이단 논쟁’이 사회문제로 쟁점화한 것이다. 기성 교회와의 갈등으로 국내 선교가 힘들어지자 문 총재는 외국으로 눈을 돌린다. 1950년대 말부터 일본과 미국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1961년 통일교의 상징이 된 합동결혼식이 시작됐다. 이후 ‘맘모스 결혼식’으로 불리며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화젯거리가 됐다. 통일교 쪽은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5억 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렸다고 주장한다. 1968년 승공·멸공운동을 벌이는 국제승공연합을 만든다.
미국은 1970년대 문 총재와 통일교에 가장 큰 무대를 제공했다. ‘젊은이들을 세뇌시킨다’며 잡음도 커졌지만, 통일교는 빠르게 세를 키웠다. 미국 정치에도 개입하며 한-미 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통일교가 한국 정부와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의혹이 쏟아졌다. 상황이 이러자 1970~80년대 주미대사관과 대도시 영사관들은 문 총재의 행보와 미국 언론의 통일교 관련 보도를 하루가 멀다 하고 ‘본국’으로 보고해야 했다.

스스로를 메시아라 불렀던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별세했다. 그를 따르던 ‘무니’(the moonies)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까. 2009년 문 총재의 생일 축하연 장면.

스스로를 메시아라 불렀던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별세했다. 그를 따르던 ‘무니’(the moonies)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까. 2009년 문 총재의 생일 축하연 장면.


안개에 싸인 통일교 신자 수
문 총재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신문광고를 내보냈다. “신이 ‘미국은 닉슨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내용이었다. 1974년 2월 주미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외교문서는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 정세에 비추어볼 때 통일교회가 닉슨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선다는 것은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에 공연히 개입한 것이 됨. 와 같이 반닉슨적인 경향을 가진 언론기관으로서는 자연히 통일교에 대한 공격을 격화시키게 되어 있음. 닉슨을 반대하는 세력으로서는 통일교가 순수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한국 정부와 특수한 관계를 가진 정치적 내지는 특수공작적 성격을 띤 사이비 종교단체라는 방향으로 결론을 지으려고 할 것임.”
1976년 6월 당시 문화공보부(문공부)는 국내외 통일교 현황을 자세히 조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문선명 자신이 재림 예수로서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고 있다”고 교리를 설명했다. 국내 신도 수는 37만3329명(통일교 주장), 117개국에서 포교 중이며 외국 신도 수는 40개국 25만4800명(통일교 주장)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이 20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 3만 명, 독일 1만 명, 영국 3천 명, 프랑스가 2천 명이라고 했다. 문 총재 별세 뒤 일부 언론에서는 통일교 신자 수를 300만 명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며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는 이보다 훨씬 적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통일교 관계자는 “현재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일본이 5만~6만 명, 한국은 2만 명 정도로 본다”며 “하지만 문 총재의 뜻을 따르는 이들까지 합하면 통일교 신자 수는 크게 늘어난다”고 했다.
문 총재는 1976년 6월1일 3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미 독립 200주년 기념 부흥 예배를 열었다. 그해 9월에는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에서 30만 명이 모인 대중집회를 열어 시사주간지 가 뽑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정계·교계에 논란을 일으키던 문 총재는 1981년 탈세 혐의로 기소된다. 1984년 18개월 실형을 선고받자 “미국의 정신적 각성이 촉진된다면 기꺼이 감옥살이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수감됐다. 소득세 면제 혜택을 받던 미국의 각 종교지도자들은 문 총재의 탈세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자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판결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수감 1년 만인 이듬해 7월 풀려난다. 1982년 대항마로 보수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를 창간했다. 문 총재는 1990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이듬해에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도 교류를 가졌다. 반공을 표방했지만 남북관계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스스로를 구세주라 선포한 사나이
문 총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1명을, 한학자씨 사이에 7남6녀를 두었다. 문 총재 사후 통일교(종교 부문)는 7남 형진(33·통일교 세계회장), 한국과 미국에 수조원대 자산을 가진 통일그룹(기업 부문)은 4남 국진(42·통일교 재단 이사장 및 통일그룹 회장)씨로 후계 구도가 잡혔다. 하지만 3남 현진(43·통일교세계재단 회장)씨가 교단 조직과 재산을 두고 이들과 대립하고 있어 ‘문 총재 사후’는 간단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 총재는 2004년 스스로를 구세주, 메시아로 선언하며 “영계에서 예수, 모세, 모하메드와 죽은 대통령들을 만났다. 5대 종교 창시자와 마르크스, 레닌, 히틀러, 스탈린 같은 이들이 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로 태어났다”고 했다. 문 총재의 장례는 9월15일 경기도 가평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치러진다. 주검은 유리관에 안치돼 신도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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