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 오카리나 불고 싶다

등록 2012-07-26 16:28 수정 2020-05-03 04:26

10명 남짓한 동료들과 점심시간을 쪼개 오카리나를 배우고 있다. 작은 악기라 만만해 보여 시작했는데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집에서 연습할 땐 혹여 이웃 사람이 쫓아와 항의할까봐 “죄송합니다. 애가 학교 숙제로 피리를 불어요” 유령 인간도 만들어놓았다.

벤자민 버튼처럼 거꾸로 간 3년
동료들도 이 작은 악기에 매료돼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어지간한 가요와 음정이 복잡하지 않은 클래식 정도는 불 수 있게 되었다. 무릇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악기 연주는 무대에 서야 실력이 느는 법. 우리는 단기 속성 실력 향상을 고민하던 차에 손꼽아 기다리던 어떤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현병철 위원장의 임기 만료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3년 동안 거듭되는 안팎의 사퇴 권유와 압박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버텨온 위원장을 위해, 퇴임하는 그날 우리는 ‘진심에서 우러난’ 공연을 보여드리자 마음먹었다. 갑자기 착해진 우리는 더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다 위원장 연임 소식을 들었다. 공연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 점심시간엔 밥만 먹는다. 책상 위에 놓인 김연수의 신작 이 눈에 들어온다. 말장난을 해본다. (꽃이) 지지 않는다? (이기면 이겼지) 지지 않는다? 아,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예정된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현병철 연임반대와 국가인권위 바로세우기 전국 긴급행동‘ 소속 인권단체 활동가와 회원들이 현 위원장의 연임반대와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예정된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현병철 연임반대와 국가인권위 바로세우기 전국 긴급행동‘ 소속 인권단체 활동가와 회원들이 현 위원장의 연임반대와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지금은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다니는 동네북이 돼버렸지만, 머지않은 옛날 인권위는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제도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는 없다 하고(사형제 폐지), 개인의 사상을 검열하지 말라 하고(국가보안법 폐지), 엄마의 재혼 뒤 새아빠와 성이 달라 따돌림을 걱정하는 아이들의 고민을 덜어주고(호주제 폐지 의견표명), 집총을 거부하는 청년은 병역 의무 대신 대체복무를 인정해야 한다 하고(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비정규직 차별 철폐)는 권고들이 인권위 설립 뒤 쏟아졌다. 사람들은 놀랐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토록 귀한 아이가 생겼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인권·평등·조정·화해를 배태할 수 없던 오랜 불임의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던 인권위는 반드시 다뤄야 할 주요 인권 사안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MB 정부의 축소판이라도 되는 양 현병철 위원장 재임 3년의 시계는 벤자민 버튼의 그것처럼 거꾸로만 갔다.

예민한 인권 감수성의 소유자 원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공무원만큼.’ 최근 개봉한 영화 20자평을 보다 웃었다. 공무원은 그토록 무난한 존재로 읽힌다. 그런 공무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인권위원장 연임을 반대하려고 신문에 광고를 낸다. 조직의 비민주적·반인권적 행위를 비난하며 1인시위를 하고 징계를 당한다. 인권위원장의 청문회 위증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성명을 낸다. 이 모든 일은 인권위 직원이라서 한 게 아니다.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할 땐 인권에 기반한 접근(Rights Based Approach)을 하라고 가르쳐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독립기구를 우리가 경험했기에 할 수 있었다. 이제 위원장은 스스로 물러나면 좋겠다. 현병철이라는 개인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권위원장이라는 자리가 예민한 인권 감수성의 소유자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물러난다면 화답으로 실력 향상이라는 사심(私心)은 내려놓고 그의 영예로운 퇴임식을 위해 기꺼이 오카리나를 불고 싶다.

다감(多感)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