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시청 옆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인권위 건물을 바라보며 “저런 기관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한다. 평생 인권 현장엔 가보지 않았던 건설회사 사장 출신다운 인식이고, 재임 시절 그 많은 연설에도 ‘인권’이란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유일무이의 대통령다운 언변이다. 아니 이 대통령이 몇 차례 ‘인권’을 말한 적이 있긴 했다. 남한이 아닌 북한의 인권을 우려하는 정치 공세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회적 약자 함부로 여긴 인권위원장
현병철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만이 뽑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죽 인권 경력이 아쉬웠으면 법학 교수로 재직한, 그것도 보직교수로만 전전한 이력을 내세웠을까? 그냥 침묵했더라면 중간이라도 갔을 걸, 어쩌자고 “(인권문제를) 모르는 게 장점”이라고 답했을까. 그 임명권자에 그 내정자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환상의 조합이다. 쓸모없는 조직이라 생각한 곳에 ‘듣보잡’ 문외한을 보냈으니 나름대로 적재적소의 인사 배치인 셈이다.
인권위 직원들에게 인권위원장은 정신적 지주와도 같다. 위원장이 흔들리면 위원회도 사무처도 바로 서기 어렵다.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사건 당시 검찰이 인권위 조사를 거부하자 김창국 위원장은 물러서지 않고 조사를 관철시켰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의견표명을 앞두고 재계의 압박이 거셀 때 조영황 위원장은 실무자의 판단을 끝까지 존중했다. 사회적 논란이 치열했던 촛불시위 사건에 대해 안경환 위원장은 외부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권고안을 만들어냈다. 위원장 집무실에 정보과 형사까지 드나드는 장면을 그때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불명예 퇴진한 최영도 위원장은 또 어떤가.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의 일등공신으로 시민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받고 취임했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도 아닌 부인의 위장전입 단 한 건으로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인권기구의 수장에게는 작은 허물마저 용납될 수 없다는 추상같은 결단이었다. 논문 표절 등 명백한 비리에도 모르쇠로 버티는 현병철 따위와는 감히 비교할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흠결은 있다. 인권위 직원들은 리더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별짓을 다하며 3년을 보냈다. 직원이 써준 원고를 제대로 읽기나 하는지 노심초사 지켜보며 살았다. 그렇게 수발을 들어도 ‘깜둥이’ ‘야만족’ 운운하는 낯 뜨거운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영어를 못해 세계국가인권기구협의회(ICC) 의장직을 포기한 건 뭐라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애인, 철거민,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를 함부로 여긴 죄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권위 직원들을 참담하게 만든 건 거짓말 퍼레이드다. 전임자 업적은 제 것이고, 제 허물은 부하에게 돌리는 노회한 답변에서 노추를 보았다. 서울 용산 참사를 외면한 사람이 유족들을 앞에 두고 적극 지시했다고 말하는 용감함에 혀를 내둘렀다. 차라리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솔직하게 사과하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면 직원들의 배신감이 이토록 사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권위 무력화에 공모한 두 남자
인사청문회는 끝났고 청와대는 연임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두 남자가 애초부터 인권위 무력화에 공모했음을, 그리고 한 남자는 머지않아 소모품으로 사라질 것임을. 마지막으로 현병철 위원장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당신으로 인해 인권위가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졌다. 인권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도 적시에 배달되었다. 대통령 표창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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