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는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헌법을 작성하는 권한은 군부가 오롯이 쥐게 됐다. ‘독재의 하수인’은 승리를 예감하는 눈치다. 조용히 ‘계엄령’도 부활한 터다. 사실상 ‘군사 쿠데타’다. 이집트가 심상찮다. 혁명이, 다시 벼랑 끝에 섰다.
혁명 이후 ‘잔당들 정치 참여’에 대한 대답
지난 6월14일 낮 이집트 수도 카이로 중심가, 헌법재판소(SCC)가 자리한 마디 지역이 때아닌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위 진압 장비를 갖춘 경찰병력이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까지 설치해 재판소 건물로 들고 나는 이들을 통제했다. 인파도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이집트 혁명’의 미래가 곧 결정될 참이었다.
사안은 두 가지였다. 첫째, 지난 4월 이집트 의회가 통과시킨 이른바 ‘옛 정권 부역자 피선거권 박탈법’의 위헌 여부다. 둘째,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3단계로 나눠 치러진 의회 선거의 합법성 여부다. 두 사안은 긴밀히 연계돼 있다. ‘혁명’ 이후 이집트 정치 상황의 핵심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풀어보자.
지난해 1월 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직후부터, 이집트 정치권 안팎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이 있다. ‘무바라크 정권의 잔당도 혁명 이후의 이집트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의회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한 무슬림형제단(MB)의 자유정의당을 비롯한 대다수 정치세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회 개원 직후부터 무바라크 정권 참여 인사들의 정계 복귀를 막으려고 서둘러 ‘피선거권 박탈법’을 마련한 이유다.
의회를 통과한 법안은 혁명 이후 최고 권력기구로 군림해온 최고군사위원회(SCAF)의 추인까지 받았다. 법에 따라 독재정권 부역자들의 공직 출마가 제한됐다. 무바라크 정권의 마지막 총리였던 아흐마드 샤피끄의 대선 후보 지위 박탈이 첫 번째 사례였다. 샤피끄는 강력 반발했다. 이집트 선거관리위원회는 그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였고, 법의 위헌성 여부를 가려줄 것을 헌재에 요청했다. 샤피끄는 지난 5월 치러진 대선 1차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결선투표에 진출한 터다.
총선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집트 선거법 자체의 복잡성 탓이다. 아랍 위성방송 가 단순화해 정리한 내용을 들여다보자. 이집트 의회 의석의 3분의 2는 정당에 대한 투표에, 3분의 1은 후보에 대한 투표에 각각 할당돼 있다. 이른바 ‘최다 득표자 당선 제도’(first-past-the-post)로 운영되는 이 제도의 도입 취지는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다.
하지만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이 제도가 자칫 옛 정권과 결탁해온 부유층의 정계 진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불거졌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부담을 느낀 최고군사위 쪽은 서둘러 선거법을 바꿔, 후보 개인에 대한 투표에도 정당의 후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최대 수혜자는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자유정의당이었다. 이번 헌재 결정의 핵심은 이에 따라 치러진 총선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졌느냐로 모아졌다. 결과는 어땠을까?
‘피선거권 박탈법 위헌, 샤피끄 후보직 유지. 총선 불공정 경쟁, 의회 3분의 1 무효화.’
의회와 제헌위 해산, 군부의 독주
지난 6월14일 오후 2시11분께(현지시각) 이집트 일간 이 인터넷 영문판에 ‘속보’를 띄웠다. 이집트 헌재는 ‘무바라크 정권 후기 10년 동안 장관 등 고위직을 지낸 인사는 향후 10년간 공직에 출마할 수 없다’고 규정한 피선거권 박탈법이 헌법이 정한 평등권에 반한다고 결정했다. 또 총선과 관련해선, “정당에 소속된 후보가 정당 명부와 후보 개인에 대한 투표에 각각 출마할 수 있는 반면, 무소속은 후보 개인에 대한 투표에만 출마할 수 있어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결정했다.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됐다.
‘피선거권 박탈법’은 총선과 대선 1차 투표에서 내리 기대 이하를 성적을 낸 이집트 혁명세력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헌재의 합헌 결정에 따라 샤피끄 후보가 낙마하면 대선을 새로 치러야 한다. 이럴 경우, 지난 5월 1차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한 좌파 나세르주의자 함딘 사바히 후보나 온건 이슬람주의자 압델 모네임 아불 포투 후보가 결선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이집트 혁명을 이끌었던 시민사회와 청년층 등이 타흐리르 광장으로 다시 모여든 것도 이 때문이다. 사하비 후보와 포투 후보 등은 아예 합헌 결정을 전제로, 최근 이른바 ‘대통령위원회’를 구성해 대선 재투표에 대비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특정 정당이나 세력의 이해관계에 맞춰 입법을 재단하는 시대는 저물었다.” 이날 헌재의 결정이 나온 직후 샤피끄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역사적인 결정’을 반겼다. 등 외신들은 “(샤피끄 후보가) 지지자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성서 코란의 구절을 인용하는 등 한껏 여유를 부렸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당선되면 만성적인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경기회복을 위해 대규모 개발사업에 집중할 것”이라며 “군과 경찰의 보호 아래 결선투표는 안정적으로 치러질 테니, 국민들께선 두려워 말고 투표에 나서달라”고 덧붙였다. ‘승리’라도 예감한 걸까? 샤피끄 후보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였던 선관위원 3명은 무바라크 정권 시절 임명된 헌법재판관이기도 하다.
‘총선 무효화’ 결정의 파장은 더욱 심각하다. 이집트 헌재 대변인 격인 마헤르 사미 부소장은 이날 결정문 발표 직후 “이로써 의회 상하 양원 모두 법적 효력을 잃게 됐다”고 못박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린 이집트 국민이 혁명의 첫 성과로 이뤄낸 의회가 공중분해된다는 얘기다. 어디 그뿐일까? 일간 은 6월15일치에서 헌법학자 호삼 에이사의 말을 따 “지난 6월11일 의회가 새 헌법을 작성하려고 구성한 제헌위원회 임명건은 최고군사위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라며 “헌재의 결정으로 제헌위는 자동적으로 해산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전했다.
의회와 제헌위 해산의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이제 이집트의 입법권과 헌법 제정 권한은 무바라크 정권의 충직한 수하였던 무함마드 후사인 탄타위를 수장으로 하는 최고군사위가 고스란히 틀어쥐게 됐다. 차기 총선 계획도, 제헌 일정도, 군부 맘대로 정할 수 있게 됐다. 6월16~17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당선되는 차기 이집트 대통령은, 권한과 의무조차 정해지지 않은 ‘허깨비’에 불과하게 됐다. 오는 6월30일로 정해놓은 민정이양 시한이 지켜질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정부 시위대 겨냥한 ‘행정명령’
눈여겨볼 게 하나 더 있다. 헌재의 결정이 나오기 하루 전인 지난 6월13일 이집트 법무부가 내놓은 ‘행정명령’이다. 1966년 통과된 이집트 군사법규 제25호 규정에 따라 내려졌다는 문제의 행정명령은, 군과 정보기관원이 ‘특정 범죄’에 연루된 혐의가 있으면 민간인도 체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뼈대다. 행정명령에 나열된 ‘범죄’는 대체 어떤 걸까? 이집트 관영 은 이렇게 나열했다.
“정부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범죄와 일탈 행위. 폭발물 소지·사용. 당국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공격하는 행위. 공공재산이나 문화재 등을 파괴하는 행위. 교통 방해. 공공기관에서 파업을 벌이거나, 일할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 협박. 절도….”
1981년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 암살 직후 내려져 무바라크 정권 시절 내내 위세를 떨쳤던 비상계엄령이 효력을 잃은 것이 지난 5월 말이다. 행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행정명령’이란 형태로 이를 통째로 부활시켰다. 타흐리르 광장의 반정부 시위대를 겨냥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행정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은 의회에 있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으로 의회는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법무부 쪽은 행정명령의 유효기간을 “새 헌법이 발효될 때까지”로 규정했다. 헌법 작성 권한을 꿰찬 것도 군부다.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군부가 선호하는 (샤피끄) 후보가 결선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국민이 선출한 의회는 해산될 처지다. 군이 민간인을 체포하는, 계엄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 허용됐다.” 지난 5월 대선 1차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한 아불 포투는 6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내놓은 성명에서 헌재 결정을 둘러싼 상황을 두고 “완벽한 쿠데타”라고 꼬집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출신의 유력 정치인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도 ‘절대권력의 귀환’을 우려했다. 그는 같은 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의회도, 헌법도 없는 상황에서 대선이 치러지는 건 심각한 상황”이라며 “자칫 선거를 통해 집권한 독재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적었다.
이날 밤 이집트 젊은이 수백 명이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다. 분노의 함성이 호령하던 ‘혁명의 성지’에선, 쓸쓸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랍 위성방송 는 청년활동가 이브라힘 알후다이비의 말을 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감을 느낀다. 유례없이 ‘부드러운 방식’으로 진행된 쿠데타로, 군부가 다시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철저히 혁명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온 셈”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막 쿠데타를 목격했다. 이렇게까지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모두 분노했을 것이다.” <bbc>은 6월14일 현지 인권운동가 호삼 바가트의 트윗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혁명 1년4개월여, 성과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배반당한’ 젊은이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집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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