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4번 출구 인근, 교통방송 건물 앞 남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일제침략기 통감 관저 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102년 전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현장이다. 국권 피탈의 역사를 조용히 알려주는 표석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향하는 석조 계단이 설치돼 있다.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테니스장만 한 크기의 소박한 공터가 펼쳐진다. 지난 5월30일, 이 공터 위에 멍석이 깔렸다. 주위 나무에는 오색천이 내걸렸다. 서낭당 같은 무대가 만들어졌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시민 100여 명이 공터로 모여들었다. 마임이스트 조성진씨가 이들에게 한지와 대나무살로 꽃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무대 주위로 꽃이 하나둘 피어났다. ‘인권 숲 콘서트-남산, 사람을 만나다’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통의 기억을 딛고 함께 한 콘서트
관객석에 나란히 앉은 김삼석( 대표)·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부부에게 남산은 아름다운 휴식터라기보단 처참했던 기억이 어린 곳이다. 1993년 9월8일, 김 대표는 집으로 들이닥친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수사관 10여 명에게 이끌려 남산의 한 건물 지하실에 감금됐다. 허위 자백을 받아내려는 구타와 성희롱이 17일간 이어졌다. 안기부는 9월 말 그와 여동생이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간첩 행위를 한 혐의를 잡았다고 발표한다. 1990년대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으로 거론되는 ‘남매간첩단’ 사건이었다. 당시 만삭의 몸이던 윤 대표는 남편 얼굴을 보려고 남산 자락으로 달려가 땅바닥에 구르기까지 했다. 사흘 밤낮을 기다려 만난 남편은 겁에 잔뜩 질려, 아내와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남산에 오면 기분이 좀 나빠요. 남편은 살아 있지만, 여기서 고문당하고 희생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아…. 얼마 전, 정대협을 후원하려던 재일동포가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서 ‘대표 남편이 간첩이니 후원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요.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남산은 지난 30여 년간 사람의 얼굴 대신, 야만의 시대를 마주해야 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 탄압에 앞장섰던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안기부의 전신)와 안기부가 1961년부터 1995년까지 자리잡았던 곳이 바로 남산이다. 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은 지난 4월 말부터 서울시에 남산 안기부 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 조성해달라는 시민청원운동(namsan.hrcenter.or.kr 참조)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이 나치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재판소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 역사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남산 안기부 터를 보존해 평화와 인권의 배움터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날 콘서트도 이런 캠페인의 일환으로 열렸다. 공연 연출(문화행동 바람)·기획(이상엽)·미술(이해성)·소품(류성헌) 담당 스태프들은 자발적으로 재능을 기부하는 정성을 보탰다.
콘서트가 열린 공터는 1961년 중정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다. 당시 요원들은 군용 막사를 치고 취조를 했다. 1970년대 중반, 이 자리에 제1별관이 들어선다. 주로 통신 도·감청이 수행되던 건물이었다. 제1별관 터 오른쪽에 있는 서울유스호스텔은 1972년 건립된 중정 남산 본부였다. 1973년 이 건물 앞에서 ‘의문사 1호’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남산 1호 터널 인근에 위치한 서울시청 남산 별관 건물은 고문으로 가장 악명 높던 ‘제5별관(5국)’이었다. 한때 남산에는 안기부 건물 41개 동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안기부가 서울 내곡동으로 이전한 뒤, 이듬해 제1별관은 폭파 해체됐다. 고통스러웠던 역사는 이렇게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다. 현재 안기부 터에는 10개 건물이 남아 있고, 서울시가 관리·운영 중이다. ‘인권재단 사람’은 6월 말까지 ‘인권 숲’ 조성 청원서를 모아 서울시에 제출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시민 약 2천 명이 청원서를 작성했다.
고 김대중·문익환·최종길·천상병 지켜봐
민중가요 노래패 ‘우리나라’의 힘찬 노랫가락은 정희성 시인의 차분한 시 낭송으로 이어졌다. 197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정 시인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하나는, 전태일처럼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과 정서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또 하나는 정치적 억압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다 감옥에 가거나 고문당한 젊은 넋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그는 이날 민주화 과정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을 끝내 이기지 못한 채 타계한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추억했다.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구나. 나더러는 조시나 쓰라 하고 김근태가 또 먼저 간다. (이하 생략)”
이날 공연은 산 자들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었다. 관객석 주변 곳곳에 걸린 30여 개 등에는 남산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이들의 얼굴 사진과 관련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최종길 교수·천상병 시인·김대중 전 대통령·문익환 목사의 얼굴이 잔잔한 바람에도 일렁거렸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2차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동지인 4·9통일평화재단 박중기(78) 이사도 공연을 지켜봤다. 도예종씨 등 8명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조종해 국가를 뒤엎으려 했다는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은 현재 서울시 도시안전실로 사용되는 건물(옛 6국)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박 이사는 1974년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6개월간 수감된다. 출소 아흐레 만에 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남산으로 끌려간 그의 목숨을 구한 건 역설적이게도 ‘수감 중’이었다는 알리바이였다. 박 이사는 1964년 자신을 혹독하게 고문한 이를 똑똑히 기억한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도 연루된 자였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또다른 비극을 낳은 것이다. “그놈도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됐으니, 지도 사람인데 후회스럽지 않겠어?” 김미선(22·총신대 사회복지학 4년)씨가 ‘인권·평화 숲’ 조성 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억압받았던 역사를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반성할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사람들이 계속 깨어 있어야죠.”
망각보다 아름다운 기억의 꽃
콘서트가 끝나갈 무렵, 관객에게 꽃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마임이스트 조성진씨가 다시 무대로 올랐다. 고문과 폭력으로 스러져간 이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이 펼쳐졌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같은 억울한 넋을 달랜 건, 시민들이 접은 ‘기억의 꽃’이었다.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가수 이한철씨의 신나는 노래 리듬에 따라 색색의 꽃들이 달빛 아래로 넘실댔다. 19년 전 악몽을 잊지 못하던 윤미향 대표의 얼굴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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