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1인시위자의 ‘내습’에 행사장 입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영화제 관계자가 나타난 건 시위가 시작된 지 30분쯤 뒤였다. “여기서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여기(손팻말에) 다 적혀 있지 않습니까.” 시위자가 답했다. 이번엔 다른 진행요원이 나타나 차분한 설득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시는지 이해는 합니다만, 자원봉사 나온 학생들이 놀랄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시위자도 완강했다. “아니, 학생들이 이런 내용을 알면 왜 안 되는 거죠?”
트위터 등에서 비판 의견 많아
조기 수습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진행요원들은 얼마 뒤 영화관 직원과 건물 관리인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여긴 영업하는 곳입니다. 나가주셔야겠습니다.” 1인시위의 법적 정당성을 두고 시위자와 직원들 사이에 몇 차례 입씨름이 이어졌다. 한참을 버티던 시위자는 결국 주섬주섬 가방과 시위용품을 챙겨들었다. 서울환경영화제 폐막일인 5월15일 오후 서울 용산CGV 행사장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시위를 벌인 이는 독립작가집단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32)씨였다. 그는 “뭐가 그리 켕기는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는 1인시위까지 막는지 모르겠다”며 “자기들(영화제 주최 쪽)이야말로 1인시위로 이력이 난 사람들 아니냐”고 했다. 박씨는 이날 환경재단(대표 최열)이 건설사 삼성물산의 협찬을 받아 영화제를 연 것에 항의하려고 1인시위에 나선 참이었다. 박씨가 든 팻말에는 ‘내성천 파괴 삼성물산 후원받은 환경영화제 OUT’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난 5월9일 시작한 제9회 서울환경영화제가 ‘삼성물산 후원 논란’이란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고 5월15일 막을 내렸다. 113편이란 역대 최다 상영작과 이와이 슈운지 감독 등 초청 인사들의 화려한 면면 덕에 여느 해보다 화제를 모은 행사였지만 트위터 등에선 개막을 전후로 영화제를 비판하는 의견이 꾸준히 이어졌다. 시작은 영화제 개막 하루 전인 5월8일 리슨투더시티가 올린 트윗이었다. “서울환경영화제를 삼성물산이 협찬합니다. 구럼비 발파하고 내성천 부수고 가리왕산에 스키장 만드는 삼성물산에 협찬받는 환경재단의 서울환경영화제 보이콧합니다.”
삼성물산의 협찬 사실이 알려지자 몇몇 유력 트위터 이용자 집단이 반응을 나타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N’이 협찬기업 목록의 첫머리에 삼성물산 로고가 새겨진 영화제 포스터를 트위터에 캡처해 올리며 보이콧 동참을 호소했고, 인터넷에선 녹색행동그룹 ‘흑록공포단’이 만든 풍자만화가 화제를 뿌렸다. 만화는 삼성물산에서 환경재단과 영화제를 거쳐 관객까지 이어지는 ‘돈’과 ‘메시지’의 흐름을 ‘배설물의 순환’에 빗대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논란을 의식한 듯 최열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5월9일 개막식 인사말을 통해 “영화제 행사를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가능하면 지원 없이 자립하는 게 좋지만 아직은 그럴 여건이 안 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회학자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5월12일 트위터를 통해 “삼성물산이 서울환경영화제 후원기업. 기가 막힙니다. 삼성물산의 후원 없이 영화제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재단이 ‘환경(파괴면죄부)재단’인가요?”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영화를 관람한 환경단체 관계자와 영화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연합 회원이라고 밝힌 박아무개(36)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영화 중간에 틀어주는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삼성물산이 영화제의 메인 스폰서인 것처럼 나온다”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건 좀 아닌 거 같다”고 씁쓸해했다. 실제 인터넷에 공개된 1분35초 분량의 트레일러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선 삼성물산 로고가 2초가량 단독으로 노출된다. 가장 많은 기금(2억5천만원)을 후원했다는 서울시의 로고가 환경부·지식경제부 등 다른 10개 후원기관들과 함께 노출된 것에 견줘 파격적인 대접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 가혹하다”
홈페이지와 홍보책자에 나온 “제9회 서울환경영화제는 환경을 사랑하는 기관, 기업들과 함께합니다”라는 문구도 논란이 됐다. 풍자만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강성석(33)씨는 “협찬을 받고 로고를 노출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정마을, 가리왕산, 내성천 등 대규모 환경 파괴가 행해지는 곳마다 시공사로 참여해 생태 파괴에 앞장서온 삼성물산을 친환경 기업으로 격상시켜줬다”고 성토했다.
환경재단 쪽은 곤혹스런 기색이 역력하다. 윤미경 홍보국장은 “삼성물산 협찬이 처음도 아니고, 협찬액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데 논란이 일어 난감하다”고 했다. 실제 삼성물산은 2004년 영화제가 만들어진 이래 6차례에 걸쳐 협찬을 했다. 올해 협찬 규모에 대해 윤 국장은 “전체 예산의 5% 수준”이라고 했다. 환경재단의 2011년 감사보고서에 나온 지난해 환경영화제 사업비(3억1430만원)로 계산해보면 1600만원이 조금 안 되는 규모다. 올해 예산이 5억~6억원대라는 영화제 조직위 쪽 이야기대로라면, 올해 협찬액은 2천만원에서 3천만원 사이로 추정된다. 영화제를 후원하는 기관과 기업의 수는 지난해(후원기관 7곳, 협찬기업 35곳)보다 각각 4곳, 19곳이 늘었다.
재단 쪽은 그러나 기업 후원이 영화제의 방향이나 내용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만큼, 특정 기업의 후원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아달라고 주문한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다룬 이 영화제의 한국영화 부문 경선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삼성물산 관계자도 “영화제에 어떤 작품들이 출품되고 상을 받는지에 대해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재단의 요청이 먼저 있었고, 우린 순수하게 사회공헌 차원에서 후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란을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기류다. 환경영화제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다는 한 영화인은 “독립영화를 만들어도 상영할 곳 자체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삼성물산 후원이라도 받아 이런 영화제가 열릴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며 “우리에게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제작 일선에서 일하는 한 독립영화 감독의 견해는 이 영화인과 온도차가 있었다. 등을 만들었고, 성노동을 다룬 문제작 의 개봉을 앞둔 경순 감독이 5월10일 트위터(@redkyungsoon)에 올린 글이다.
“굽실거리며 감사히 받아챙기는”
“이번 환경영화제도 삼성 후원을 받았다. 그곳에서 도 상영된다. 참 난감한 현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삼성의 돈이 삼성의 것인가. 수많은 시민들 주머니를 털어서, 수많은 노동자들 희생시키며 자기들 것으로 사유화한 게 아닌가. 나는 그들 돈을 더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굴하게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 근데 재수없는 건 그들이 주는 돈을 굽실거리며 감사히 받아챙기고 뒤늦게 입장도 없이 그저 미안해하는 태도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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