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 존재’인 인간이 시간의 근원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억’이라는 시간적 행위에 의존하는 방법뿐이다. 지나간 사건과 체험을 복기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지금 이곳’에 긴박된 삶의 지평은 과거로, 또 미래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과해선 안 될 점은 이런 기억이 집단적 형태를 띨 때, 그 안엔 오늘의 현실과 다가올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특정한 의도가 개입하기 마련이란 사실이다. 어느 사회든 숱한 기념일과 기념물, 기념의식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릇 모든 집단적 기억이나 기념 행위는 그래서 정치적이다.
슬로건은 ‘6월의 완성, 99%의 승리’
6월항쟁 25돌을 맞아 대규모 국민행사를 준비 중인 ‘민주 진영’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선은 25년 전 과거를 향하되, 관심은 2012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시계에 맞춰져 있다는 얘기다. 이 점은 “6월항쟁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새로운 대한민국 창출을 위한 시민들의 희망을 재결집”하고 “87년 체제 극복을 위한 발전 방향과 내용을 제시해 참된 민주정부 수립에 기여”하겠다는 이들의 ‘사업 목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행사의 중심 슬로건은 ‘6월의 완성, 99%의 승리’다.
‘6월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5월24일 공식 발족한다. 추진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전국 단위의 노동·시민·사회 단체와 박종철·이한열 추모사업회 등 6월항쟁 관련 단체, 종교·청년·인권·문화·학술 단체 등 200곳에 가까운 조직이 참여하거나 참여 의사를 타진 중이다. 추진위의 황인성 재정위원장(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지난 2월 열린 6월항쟁계승사업회 총회에서 ‘올해는 항쟁 25돌인 만큼 예년과 달리 성대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치러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4월 총선이 끝난 뒤 노동계, 시민사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준비위를 구성하고 몇 차례 회의를 거쳐 행사안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공식 행사 주간은 6월8일부터 16일까지다. 이 기간에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경기 수원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합동추모(위령)제와 기념대회, 민주화운동 현장 탐방, 학술대회, 문화제 등이 열린다. 이 가운데 추진위가 가장 역점을 두고 준비하는 행사는 6월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오전 11시~밤 8시)와 국민공동행동(오후 6시)이다.
만민공동회는 희망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서울광장 주변에 각각의 부스를 마련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비전과 대안을 알리고 즉석 토론 등을 벌이는 행사다. 이종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국장은 “노조, 시민단체, 온라인 친목모임 등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해 응어리도 풀고 정책 대안도 제시하는 일종의 대안(비전)박람회”라며 “정치인만이 아닌, 국민 스스로 희망의 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1987년생의 플래시몹, 항쟁 되새기는 떼창
국민공동행동은 서울광장과 전국 각지의 행사장을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으로 연결해 진행하는 동시다발 집회다. 1987년 6월10일 당시 항쟁의 구심이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마련한 국민행동지침에 따라 오후 6시를 기해 벌인 경적 울리기, 타종, 손 흔들기 등의 공동행동을 새롭게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추진위 관계자는 “국민행사 중심의 슬로건과 개인 소망을 담은 종이비행기 날리기, 1987년생 청년들이 주도해 벌이는 플래시몹과 퍼포먼스, 25년 전 항쟁 때 널리 불린 민중가요 동시 합창 등이 준비되고 있다”고 전했다.
공식 행사 주간에 앞서 진행되는 사전 행사로는 △25주년 기획전시회 △한국현대사 순회 전시회 △독후감 공모전 △영화제 등이 마련돼 있다. 행사 내용과 일정은 추진위 홈페이지(www.start610.or.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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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25돌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결혼 25년째 되는 해에 부부가 은혼식을 통해 처음의 사랑을 기리듯, 6월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도 올해는 뜻깊은 해입니다. 25년 전 꿈꾸던 가치와 이상을 되새기며 현재의 삶을 성찰하고 가다듬으려 합니다.
교과서를 통해 6월을 배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그저 아버지·삼촌 세대의 사건일 텐데요.
6월항쟁은 국민이 모두 함께 일궈낸 아름다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기적과 환희의 체험, 아름다운 삶의 기억과 유산을 후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은 선배 세대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행사 슬로건이 ‘6월의 완성, 99%의 승리’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6월 정신의 핵심은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의 참뜻을 되새기며 1%의 이기적 탐욕을 타파하고, 25년 전 항쟁 과정에서 실현한 나눔의 공동체를 오늘의 현실 속에 재현하자는 뜻입니다.
정부와 보수 진영에선 ‘정치행사’라고 문제 삼지 않겠습니까.
6월항쟁은 국민의 뜻에 기초하지 않는 ‘불통’ 독재정부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었습니다. 4대강, 쌍용차,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보면 지금의 정부도 국민 뜻을 외면하는 독선과 아집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정부는 25년 전 항쟁의 참뜻을 깨닫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거듭나야 합니다.
항쟁의 주역인 ‘386세대’가 이 사회의 중추가 됐습니다.
6월의 주역은 오늘날 정치권에 진출한 당시의 학생운동 지도부가 아니라, 1980년대를 살면서 독재에 억압받고 저항했던 시민 모두입니다. 그런데 항쟁의 열매를 정치권에 진출한 386 일부가 앞서 차지했습니다. 그들도 초심을 되살려 25년 전 시민의 함성을 되새기고 정화의 기회로 삼길 바랍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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