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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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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문제 의식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검경 갈등 상징된 ‘밀양 사건’ 정재욱 경위 “검사 폭언 듣고 나오는데 너무 초라했다”… 밀양경찰서 수사권실무지침 태스크포스 팀장인 그는 “이번 일로 수사권 문제 중요성 뼈저리게 느껴” 토로
등록 2012-03-23 16:52 수정 2020-05-03 04:26

3월15일 경남 밀양행 KTX 열차 안에서 그가 조현오 경찰청장에게 제출했다는 고소장을 읽었다. 깐깐하고 집요한데다 자존심까지 센, 경찰대 출신 수사관의 전형이 눈앞에 그려졌다. 만나본 인상도 그랬다. 검경 갈등의 상징으로 떠오른 ‘밀양 사건’의 당사자, 정재욱(30·경찰대 22기) 경위다. 그는 최근 자신의 사건 지휘 검사였던 창원지검 밀양지청 박대범(38·사법연수원 33기) 검사를 모욕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경찰청에 고소했다. 그가 밝힌 사건 개요는 이렇다.
지난 1월20일 정 경위는 밀양지청 301호 검사실에서 지역 내 한 폐기물관리업체의 비리 사건 수사와 관련해 검찰 수사관과 가벼운 입씨름을 벌였다. 그때 돌연 박 검사가 끼어들며 폭언을 퍼부었다. 정 경위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검사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경찰청장 앞으로 A4용지 8장 분량의 고소장을 썼다. 사건 수사와 관련해 검사실을 방문했다가 검사로부터 ‘인마’ ‘건방진 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너희 과장, 서장 불러볼까?’ 등의 폭언과 협박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박 검사가 피의자도 아닌 자신에게 진술서 작성을 강요하는 등 ‘직권남용’을 저질렀다고도 적었다. 7주 뒤 그는 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조현오 청장은 사건 수사를 자신의 직속 조직인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맡겼다.
사건은 경찰·검찰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졌다. 경찰은 폐기물관리업체의 폐기물 불법 매립 수사에서 시작된 이 사건에 대해 검사가 부당하게 수사 축소를 압박했고, 이 과정에 밀양지청장 출신 변호인에 대한 전관예우 관행이 작용했다며 공세를 확대했다. 검찰은 3월12일 반박 자료를 통해 “수사 지휘는 적법했을 뿐 아니라 폭언과 수사 축소 종용은 없었고, 사건의 본질은 과잉 표적수사로 인권침해 시비를 일으킨 경찰관이 검사를 고소한 사건”이라고 맞불을 놨다. 경찰 수뇌부를 겨냥해선 사건을 다시 관할 경찰서로 보내라며 ‘이송 지휘’ 결정을 내렸다.
정 경위와 인터뷰가 이뤄진 3월15일, 사건 당시 검사실에서 다른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현장 상황을 목격한 한 시민의 진술이 보도됐다. 검사실에서 폭언과 고성이 나온 게 사실이란 내용이었다.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기자와 마주 앉은 정 경위의 표정은 밝았다.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검경의 대립 양상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나.
“예상 못했다. 사건 자체는 뒷전으로 밀리고 수사권 갈등만 부각될까, 걱정스런 부분도 있다.”

고소장에는 수사지휘권이나 검경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수사권 문제를 의식했던 것 아닌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고소장을 내면서 이 문제가 수사권과도 연관이 있으니 수뇌부가 관심을 가지리란 예상은 했다. 혼자 힘으론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니, 당연히 경찰 조직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고소장 작성 시점이 고소일(3월8일)보다 한참 전인 1월20일이다.
“검사실에서 그 일을 겪은 날, 사무실에서 밤새 고소장을 썼다.”

현장에서 바로 대응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박 검사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사실 겁도 났다. 검사가 불같이 화내며 나한테 피의자 조사를 받으라고 하니까.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애써 태연한 척 비굴하게 돌아서 걸어나오는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검찰에선 두 사람이 2년 가까이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다던데.
“말도 안 된다. 나는 아무리 친한 직원한테도 ‘형님’이라고 안 부른다. 결벽증 같은 게 있다. 그런 식으로 호칭을 트면 공사의 경계가 흐려진다.”

고소장은 왜 경찰청장 앞으로 썼나.
“검사를 고소하는데 검찰에 할 수는 없지 않나. 경찰에 고소할 거, 기왕이면 청장 앞으로 하는 게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소는 혼자 결정했나.
“아니다. 당일 사무실에 돌아와 팀원들한테 얘기하고 고소 의지를 밝혔다. 하루 뒤(1월21일)엔 경찰대 동문 게시판에 익명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당해 검사를 고소하려고 한다’는 글을 올렸다. 물론 지역이나 인적 사항은 명시하지 않았다. 그 뒤 친한 경찰대 동기와 선배들, 판사·변호사 하는 친구들과도 상의했다.”

지휘 라인에도 보고했을 것 아닌가.
“안 했다. 당시 관내에서 일어난 송전탑 토지 수용자 분신 사건 때문에 밀양서 전체가 정신이 없었다. 새로 온 서장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다. 수사과장, 서장, 경남지방경찰청 수사과까지 보고가 올라간 것은 1월25일쯤으로 안다.”

고소장은 왜 50일 가까이 지나서야 제출했나.
“그 상황에서 바로 고소하면, 내가 진행하던 사건이 불가피하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 박 검사의 임기가 2월 중순까지였기 때문에, 후임 검사가 오면 일단 사건 지휘를 받고 그다음에 박 검사를 고소해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2월20일 후임 검사가 영장을 기각해버렸다. 재수사를 통해 증거를 보강한 뒤 3월8일 영장을 재신청하고, 고소장도 이때 맞춰 제출했다.”

박 검사로부터 수사 지휘를 받을 때 수사 중단 압력으로 여겨질 만한 상황이 있었나.
“처음엔 박 검사가 ‘구속 사유가 충분하다. 잘해보소’ 했다. 그런데 태도가 바뀌더라. 그다음에 갔을 때는 “지청장님 관심 사건”이란 얘기도 하고, 옆에 있던 계장은 “(피의자가) 검찰 범죄예방위원인 건 알죠?” 하며 거들었다. 그 뒤 영장을 신청할 때도 “일단 해보소. 그런데 지청장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가 있어서…”라며 말꼬릴 흐리더라.”

전관예우가 작용했다고 보는가.
“피의자가 수사 초기 밀양지청 검사 출신을 변호인에 선임했다. 그분이 밀양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구속 기소가 된 뒤 서울에 있는 지청장 출신을 추가로 선임하더라. 그 뒤로 피고인의 횡령·배임 혐의를 추가로 확인하고 영장을 신청했는데, 번번이 기각되는 거다. 박 검사는 ‘폐기물 매립만 수사하면 됐지, 왜 혐의를 추가하려 하느냐. 이건 본류가 아니다’라고 하더라. 그래도 나는 “주주가 수천 명이라 피해자가 있을 수 있으니 수사해야 한다”고 했다. 박 검사는 수사를 중단하라는 뜻은 아니라면서도, 영장을 받으러 가면 자꾸 ‘주주들 고소장이 들어와야 한다’며 수사 확대에 난색을 표했다.”

수사에 대한 욕심이 강한 것 같다.
“수사관은 자기 사건에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다. 실적을 쌓으려는 게 아니다. 범죄 혐의를 확인하다 보면, 분노와 정의감도 생긴다. 불법으로 폐기물을 파묻고 순진한 농민들에게 피해 입힌 사람을 어떻게 적당히 봐주나. 게다가 수사를 하다 보니 혐의가 드러나는 걸 어떻게 덮고 넘어가나.”

기소를 책임지는 검사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애초 확인된 폐기물 매립 건만 갖고 기소를 마무리짓고 싶은데, 나이도 한참 어린 경찰이 눈치 없이 계속 수사를 확대하니 짜증이 났을 거다. 인간적으론 이해할 수 있지만, 검찰 직원과 일반 고소인까지 있는 자리에서 머슴 대하듯 반말과 욕설을 퍼붓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인터뷰 말미 정 경위는 자신이 일선 경찰서마다 설치된 ‘수사권실무지침 태스크포스팀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밝혔다. 검찰에 제출하는 수사지휘요청서가 경찰청 지침에 맞게 작성됐는지를 검토하는 게 그의 일이라고 했다. 이번 고소가 수사권 문제를 부각하려는 ‘기획 고소’로 공격받을 빌미를 줄 수 있는 미묘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어진 그의 말이다. “태스크포스팀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수사권 조정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내 사건에 외압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수사권 문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밀양=글·사진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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