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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처치 절실한 응급의료 시스템

석해균 선장 치료할 곳 없던 처참한 중증 외상 치료의 현실… 대통령 대책 마련 지시에도 권역 외상센터 건립 방안 무산
등록 2012-03-16 16:26 수정 2020-05-03 04:26

“현재의 응급의료 시스템은 산업재해나 총상 등 중증 외상 치료에 매우 취약하다. 이를 보완할 시스템을 구축해 효율적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4월11일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투성이인 우리나라 응급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응급의료 시스템을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일간지들은 지지부진하던 권역 외상센터설립 작업이 탄력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3월5일 이명박 대통령이 경기도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을 방문해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격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다음날 응급의료 시스템을 서둘러 보완하라고 지시했지만, 행정부는 해를 넘기도록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보건 전문가들이 제시한 권역외상센터 구축 방안은 무산된 상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3월5일 이명박 대통령이 경기도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을 방문해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격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다음날 응급의료 시스템을 서둘러 보완하라고 지시했지만, 행정부는 해를 넘기도록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보건 전문가들이 제시한 권역외상센터 구축 방안은 무산된 상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돈 안 되는 중증 외상 환자 치료 등한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응급의료 시스템을 말한 배경에는 그해 1월 ‘아덴만 여명 작전’이 있었다. 대부분 기억하듯이, 정부가 청해부대를 파견해 인도양 건너의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총격을 받고 귀국한 석해균 선장은 아덴만의 드라마를 만든 ‘주연 배우’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가 됐다. 대통령도 당시 수술을 맡은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석 선장 벌떡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독특한 사건은 한국의 처참한 응급의료 시스템을 불현듯 깨닫게 해주는 자명종 같은 구실도 했다. 부상당한 석 선장을 치료할 만한 곳이 서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석 선장을 감당할 만한 아주대학교 병원이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 충격적인 통계도 새삼스럽게 세상에 알려졌다. 부실한 응급의료 시스템 때문에 해마다 1만 명 가까운 중증 외상 환자가 추가적으로 사망한다는 연구였다. 돈이 되지 않는 중증 외상 환자 치료에 대부분의 병원이 눈감고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공공병원이라는 서울대학교병원이나 국립의료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해마다 살 수 있었던 환자 1만 명이 응급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조용히 사망했다는 말이었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그때껏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보건복지부가 움직이긴 했다. 2010년 3월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의뢰한 연구를 통해 6천억원의 예산을 들여 전국 6곳에 권역외상센터를 세우자는 안을 제시했다. 비용 대비 편익은 2.08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6천억원의 비용으로 1조2천억원 정도의 편익이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제동은 기획재정부가 세게 걸었다. 다음달 기획재정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 비용 대비 편익이 0.31~0.45일뿐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사람 목숨값을 셈하는 방식이 달랐던 모양이다. 재정부는 이를 근거로 예산을 3분의 1로 줄였다. 중증외상센터 건립 사업은 딱 거기까지 진행되고 있던 참이었다.

예산도 안 늘고 바뀐 것 없어

그 상황에서 ‘아덴만 작전’이 터졌고, 대통령은 직접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을 찾아서 석 선장과 사진까지 찍었다. 온 세상이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을 대통령마저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중증외상환자 응급 시스템을 바꾸라는 대통령의 지시는 이 맥락에서 나왔다. 대통령이 확실히 무섭긴 한가 보다. 하반기부터 뭔가 바뀌는 듯했다. 보도들이 하나둘 나왔다. ‘이국종 꿈 이루어지다’( 2011년 9월23일 1면), ‘외상 전문의 이국종 교수 꿈이 현실로’( 2011년 8월19일 1면)…. 뭐라도 바뀌는 것처럼 보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바뀐 것은 없었다. 예산도 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3일 6개 권역외상센터를 짓는 대신, 2천억원의 예산을 16개 의료기관에 분배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권역외상센터를 짓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한 곳에 1천억원의 예산이 투입돼야 권역외상센터가 제구실을 한다는 분석은 종이 조각이 됐다. 보건복지부 안은 16개 의료기관에서 80억~120억원씩 ‘나눠먹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결국 16개의 부실 중증외상치료센터를 양산하겠다는 안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이를 다시 번복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14일 의료기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증외상센터 공모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기존 안으로는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가 지어질 수 없다는 지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국의 응급실 시설과 인력을 개선하려고 해마다 200억원씩 쏟아붓는 응급의료기금도 실효성이 없이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마당이었다.

일단 올해 중증 외상 환자들을 위해 책정된 예산은 400억5200만원에 불과하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500억원대로 늘어났다가 그마저도 다시 400억원대로 주저앉았다. 정부의 올해 사업안을 보면 “외상치료시설은 국가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안전판으로서 24시간 항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운영 지원”한다고 밝혔다. 말만 거창하다.

관련 법도 국회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 주승용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해 7월 권역외상센터의 법적 근거를 밝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이 법안마저 국회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대로 중증외상센터 공모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나마 대폭 줄어든 예산도 법의 덫에 걸려서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종합하면, 1년 전 대통령의 공언도 행정부와 입법부를 거치며 유야무야된 상황이다.

실질 대책 손놓고 훈장 수여만

중증외상센터 건립과 관련해서 청와대가 한 일이 딱 한 가지 있긴 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31일 석해균 선장과 이국종 교수를 청와대로 불러 각각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그 다음날 신문과 방송은 사진과 함께 이 내용을 보도했다. 해마다 환자 1만 명이 부실한 응급 시스템 때문에 사망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뾰족한 대책도 없이 훈장수여식은 그럴듯하게 벌였다. 한국방송 의 ‘비상대책위원회’에서나 본 듯한 모습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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