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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왜 녹음·촬영 금지구역이 되었나

곽노현 재판 녹음하다 경위한테 제지당한 시민 사건을 통해 본 법정 녹음·촬영 금지…재판 왜곡 막으려고 법으로 금지했지만, 법원 기록 신뢰 얻어야 설득력 있어
등록 2011-12-15 14:27 수정 2020-05-03 04:26

법정이 ‘습격’당했다. 손에는 쇠망치가 아니라 스마트폰이 들렸다. 스마트폰으로 법정을 부술 수는 없다. 대신 스마트폰에는 더 무서운 기능이 있다. 웬만한 녹음기, 카메라 이상의 고성능을 갖췄다. 휴대전화로 ‘위장’도 가능하다. 지난 11월16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1심 공판이 진행 중이던 서울중앙지법 311호 형사 법정. 정아무개(24)씨가 스마트폰으로 재판 내용을 녹음하다가 법정 경위에게 걸렸다. 정씨는 “법정에서 녹음을 하면 안 되는지 몰랐다”고 했고, 재판장은 “(녹음 내용을) 어디에 올리려고 한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정씨는 “검찰 쪽 주장이 이해가 안 돼 집에 가서 다시 들어보기 위해 녹음했다”고 했다.
법원조직법 제59조는 “누구든지 법정 안에서는 재판장의 허가 없이 녹화·촬영·중계방송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20일 이내의 감치(법정 질서를 어지럽힌 이를 유치장·구치소 등에 감금하는 것) 또는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감치와 과태료를 함께 매길 수 있다. 지난 8월 광주지법에서는 자신의 민사재판을 몰래 녹음한 이에게 감치 6일의 결정이 나오기도 했다. 화물차 운전사인 소송 당사자는 “법률 지식이 부족해 재판장이 한 말을 기억할 수 없어 법무사 사무실에서 상담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녹음하게 됐다”고 했다.

지난 1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법정 녹음 의무화로 사법 불신 해소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지난 1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법정 녹음 의무화로 사법 불신 해소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공개재판인데 녹음은 안 된다?

판사가 ‘사사로이’ 페이스북에 쓴 내용까지 미디어를 통해 까발려지는 세상이다. 반면 기자들이 넘쳐나는데도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는 공간이 바로 법정이다. 개인의 내밀한 치부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가사 사건 등 일부 재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다. 우리 헌법은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 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27조 3항),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다만, 심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제109조)고 돼 있다. 그러니 본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관심이 가는 중요 사건은 누구나 법정에 가서 공판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취미’로 공판을 듣는 사람까지 있다.

공개재판이 원칙인데 사법부는 왜 법정에서의 녹음·촬영·중계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법정에서 판사와 피고인, 변호사, 검사가 주고받는 말을 받아쓰는 것은 허용된다. 법조 기자들은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수첩에 받아쓰는 게 일이다. 노트북으로 받아치면 조금 수월해질 일이지만 노트북 반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초짜 법조 기자들은 종종 몰래 녹음하는 과욕을 부리다 ‘적발’되기도 한다. 대법원의 경우, 중요 사건의 공개변론이 있을 때 대법관들이 대법정에 착석하는 장면과 검찰과 변호인의 모두발언까지는 촬영을 허가해준다. 공판 과정은 촬영이 안 되지만 스케치는 가능하다. 외국 신문에 자주 실리는 ‘법정 그림(드로잉)’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 신문도 최근 법정 그림을 활용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우리나라 사법부만 유독 권위적이라 법정의 엄숙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도 법정 녹음·촬영·중계를 제한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0년 대통령 선거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 당시, 텔레비전 방영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변론 당일 녹취록을 공개했고, 그 뒤부터 중요 사건의 녹음테이프가 빠르게 공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의회는 2005년, 2007년, 2009년에 법정 촬영을 허용하자는 ‘법정에도 햇빛을’(Sunshine in the court)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앞서 1983년에는 미국의 신문·방송사 등 28개 언론기관이 연방법원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반입시켜달라는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미국의 여러 주(州)재판소에서는 법정 촬영·녹음을 허용하고 있지만 연방법원은 이를 금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공개재판이기 때문에 촬영이나 텔레비전 중계를 막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개재판 원칙은 판사가 독단적으로 밀실재판을 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그쳐야 한다”며 “녹음이나 중계를 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이 무분별하게 노출되거나 편집에 의해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 과정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부 진술만 따로 떼어내 편집할 경우 왜곡 전파의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외국 사법 시스템에 밝은 한 변호사는 “어느 나라나 법정 공식 기록에 대한 강력한 권위와 증명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녹음을 통한 이본(異本)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진촬영이나 텔레비전 중계도 법정의 권위와 공정한 재판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은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목적인데, 사진촬영 등으로 법정 분위기가 산만해 질 수 있고 심리적 영향을 받은 피고인과 증인의 진술이 카메라 앞에서 위축되거나 반대로 과시적으로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판사가 조서를 각색해 정리하기도

그렇다고 우리 사법부의 행태가 그대로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 변호사는 “녹음 등을 못하게 하려면 대신 법원 기록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우리 사법부는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재판 속기록을 즉시 챙겨갈 수 있지만 한국 법원은 판사가 조서를 정리하는 데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판사가 조서를 작성하며 진술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바람에 법정에서의 진술과 조서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불법 녹음’을 하는 이유는 결국 법원을 못 믿거나 재판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법원이 이런 부분에는 무심하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에 공판 녹음 자료를 요구하면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녹음보다 중요한 법정 조서 역시 재판 당일 열람이 안 된다. 중요 사건에서 증인신문 조서가 2주 뒤 다음 기일 때까지 안 나온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결국, 적절한 수준의 ‘햇볕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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