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노란색 ‘경안시장’ 간판은 산뜻해 보였다. 경기도 광주시 경안재래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마치 건물 밖에서 오래 기다리다 록밴드 공연장에 들어선 것처럼 귀가 멍멍해졌다. 오후 1시30분의 시장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으로 왁자했다. 8월3일이 장날임을 모르는 외지인이라면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게 놀랄 것이다. 경안시장에서 채 500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마트 경기 광주점이 있음을 안다면 조금 더 놀랄 것이다. ‘이마트 옆 재래시장이 이렇게 장사가 잘된다면 굳이 기업형 슈퍼마켓(SSM)법이 필요했을까’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국회는 지난해 말 재래시장 근처 500m 이내에 3천㎡ 이상의 대형마트나 대형마트에 소속된 기업형 슈퍼마켓이 입점하는 것을 제한하는 유통·상생법을 통과시켰다. SSM법으로 불린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지방의회가 SSM 조례를 만들었다. 지난 6월엔 제한구역을 1km로 늘렸다.
주민 땅 강제수용해 들어선 대형마트
“장사 잘되는 거 아니냐고요? 오늘이 장날이에요. 근데 지금 2차로에 차가 다니잖아요. 경안시장이 원래 장날에 이렇게 차가 다니는 곳이 아니에요.” 민경수(57·가명)씨는 재래시장 입구에서 이마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마트가 들어온 뒤에 단 한 번도 안 갔습니다. 가슴에 열불이 나서.” 그는 광주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다. 고향에서 노년을 보낼 꿈을 꾸며 조금씩 땅을 모았다. 구제금융 시절 광주시 경안동 20-17번지 땅 80평도 구입했다.
민경수씨의 집에 2007년부터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광주터미널주식회사 명의의 문서에는 민씨의 땅이 공용여객터미널 사업부지이므로 수용 가격을 논의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땅이 공용여객터미널 부지라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몇 차례 더 내용증명이 왔지만 ‘누군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법을 체감하지 못했다. 민경수씨를 비롯해 9명의 땅이 2007년 2월부터 강제수용되기 시작했다.
“가격을 의논하자는 내용증명이 오긴 했는데 (사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법원에서 공탁금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같은 이유로 땅을 강제수용당한 고창수(57·가명)씨가 옆에서 말했다. 박승훈(55·가명)씨의 경우는 조금 더 극적이다. 평당 830만원을 받기로 하고 땅을 팔기로 계약했다. 한 달도 더 지나 땅을 산 사람이 해약을 요구했다. “공용터미널 부지로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유를 댔다. 광주시청이 박씨의 땅 주변에 공용여객터미널을 짓는다는 계획을 담은 고시를 2006년 9월 발표했다는 사실을 박씨는 그제야 알게 됐다. 지자체 고시·공고는 인터넷 홈페이지와 시청 건물 안 게시판에 하도록 돼 있다. 박씨는 지자체 홈페이지를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광주시에서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박씨는 평당 490만원에 땅을 강제수용당했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공익사업법)이 강제수용의 근거였다. 25만 명 광주시민의 공익을 위해 민경수·박승훈·고창수씨는 각각 2억~3억원의 손해를 감수했다.
“막말로 나라에서 필요한 시설이면 나도 양보하지. 그런데 이마트가 들어온 거 아니에요?” 민경수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법률은 공용터미널과 같은 공공시설의 판매시설 비율을 지자체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광주시가 제출한 공용터미널 사업 실시계획인가 안건에 대해 2007년부터 논쟁이 벌어졌다. 터미널에 비해 판매시설 등 비도시계획시설이 지나치게 넓다는 반박이 계속 나왔다. 2007년 3~7월 도시계획위원회는 세 차례 안건을 유보하거나 조정했다.
절충안이 나왔다. “판매시설이 과다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습니다. 여러 차례 재심의하는 과정에서 사업시행자가 터미널 내 건물 일부를 기부채납하겠다는 안을 냈습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당시 도시계획위원이 설명했다. 터미널사업자는 건물 2층 1454㎡(약 440평)를 공익시설로 광주시에 기부채납하고 문화집회시설 938㎡(284평)는 횟수에 상관없이 광주시가 사용토록 허락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담긴 ‘이행계획서’를 광주시에 제출했다. 2007년 9월 건축 허가가 떨어졌다. 신세계건설이 시공사를 맡았다. 거의 동시에 이마트가 분양을 받아 입점을 확정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땅을 강제수용당한 고창수씨는 건물이 절반 이상 올라간 뒤에야 이마트가 입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창수씨 등 9명은 보상금을 올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속에서 불이 났다.
당시 광주시의회 의장인 김영훈 시의원이 지난해 주민 4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터미널보다 판매시설이 과다한데 사업 승인을 해줘 사업주에 특혜를 줬다”며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광주시가 한발 더 빨랐다. 광주시는 감사 청구 나흘 전 “담당 공무원이 사업주에게 특혜를 준 의혹이 있다”며 광주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감사원은 수사기관이 수사 중이라며 감사 청구 대상이 아니라고 지난해 4월 밝혔다. 김영훈 시의원은 이번엔 광주경찰서를 찾아갔다. 광주경찰서는 지난해 6월 “특혜 의혹에 대해 감사원 감사 중이므로 감사 종결시까지 내사종결했다”고 알렸다. 공무원 사이에 ‘핑퐁’이 벌어졌다. 그리고 2009년 7645㎡(2316평) 규모의 이마트와 2천~3천㎡의 여객시설을 갖춘 광주종합터미널이 태어났다. 8월3일 오후 3시께 찾아간 공용터미널은 한산했다. 10여 대가 정차할 수 있는 승강장에 버스가 4대 있었다. 대합실엔 좌석보다 텅 빈 공간이 훨씬 넓었다. 6개의 승차권 판매 창구는 모두 폐쇄돼 간이판매대에서 승차권을 팔고 있었다.
이마트 경기 광주점이 영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민주당 소속의 장형옥 시의원은 사업자인 (주)광주터미널이 원래 기부채납하기로 약속한 공익시설을 되찾아갈 것을 우려해 이를 막으려 노력 중이다. 법률적으로 정당하게 건축 허가를 받았다면 터미널사업자가 지자체에 건물을 기부해야 할 아무 의무가 없다. 장 의원은 대법원 판례로 비춰볼 때 사업자가 소송만 제기하면 기부채납한 공익시설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장 의원의 요구로 광주시청은 최근 ‘기부채납받은 시설을 시청이 임대나 매각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협약서를 개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자가 광주시에 무상 사용을 약속한 문화집회시설을 웨딩홀 사업자에게 분양해버린 사실도 장 의원은 지적했다.
장 의원은 “광주터미널 사업은 도시계획 원칙을 무시했고, 특히 광주시가 대형 판매시설 입점을 공개하지 않아 주민 의견 수렴을 무시했다. 잘못을 저지른 담당자를 밝혀 책임지게 해야 한다”며 “불공정한 협약서를 수정해 주민에게 공개하고 재래시장 상인 지원책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마트 쪽은 “사업자로부터 분양을 받고 입점해 터미널 인허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주)광주터미널 정승달 대표는 전화 통화에서 “이마트 입점 뒤 외려 재래시장이 활성화됐다. 도시계획 심의 당시 (사업자금) 이자를 한 달에 엄청나게 내는 상황에서 도시계획위원들이 판매시설이 별로 많지도 않은데 심의를 안 해줘서 할 수 없이 기부채납했다. 나는 피해자”라고 말했다.
사정기관은 조사를 멈췄고 수사기관은 수사를 정지했으며 터미널사업자가 스스로를 ‘피해자’라 일컫는 상황은 재래시장 상인들의 정서와 거리가 있다. 경안시장은 57개 점포 17개 노점 등 74명의 상인이 밥을 버는 곳이다. 재래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노점상 ㅎ(50)씨는 장사한 지 30년 가까이 됐다. 이마트가 입점한 뒤 매출이 30% 정도 줄었다. 손님들은 이제 5일장을 기다리지 않고 이마트로 간다. 손님이 20% 감소했다. ㅎ씨는 “다들 생계가 걸려 있어서 장사를 그만두는 경우는 없다. 조금이라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마트는 재래시장보다 주차시설이 잘돼 있어 편하고 물건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재래시장은 주로 농수산물이 많고 공산품은 적다. 사람들이 공산품을 사러 이마트에 갔다가 농수산물까지 사버려서 장사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60살 점포 주인은 이마트 입점 뒤 매출이 80%로 줄었다고 했다. “양말과 가전제품을 판다. 이마트 입점 뒤 손님이 확 줄었다가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 양말은 싸니까 매출이 크게 줄지 않았는데 가전제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다 이마트로 간다. 여기는 나이 든 사람들이 와서 사간다.” 채소를 파는 70살 노인은 “나라에서 대형마트 허가를 안 내주면 좋겠다. 서민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찬성파도 있다. 경안시장 상인회장 최현범(62)씨는 “처음에는 매출이 떨어졌지만 지금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된다. 이마트가 생겨서 상인들이 자극을 받고 더 발전한다”고 말했다. 터미널 상가 분양가가 평당 수천만원에 달해 재래시장 상인 가운데 이마트에 입점한 상인은 거의 없다. 최씨의 말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냐”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트위터 발언과 닮았다.
유통·상생법이 시행된 지 7개월째다. 중소상인과 시민단체, 야당은 중요한 진전이라고 환영한다. 유통·상생법이 2007년에 있었다면 경기도 광주시 공용터미널 사업은 지금과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전히 법 적용과 운영에서 과제가 지적된다. 특히 최근 대형마트가 터미널 등 공공시설의 일부로 입점하는 경우가 잇달아 논란이 일고 있다. 예산이 빠듯한데 실적을 남기려는 지자체, 대형마트를 환영하는 일부 주민도 기업의 편에 선다. 지자체장이 대형마트의 등록을 제한하거나 조건을 붙일 ‘수 있다’고 여지를 둔 유통법 조문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경기도 광주시는 경남 김해시의 오래된 미래라 부를 만하다. 경남 김해시에서 지금 경기도 광주시와 똑같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경남 김해시는 신세계와 여객터미널 민자역사 사업 계약을 맺었다. 김해시는 지난 7월 최초 사업계획을 변경해 터미널에 이마트를 입점시키는 계획에 대해 주민 1013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비용은 신세계가 댔다. 민자역사터 1km 안에 전통상업보존구역으로 지정된 외동전통시장이 있으므로 유통법 적용 대상이다. 김해시는 주민 73%가 대형마트 입점에 찬성했고, 근처 ㅎ마트의 독점으로 경쟁이 필요하다며 이마트 입점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통법 취지를 거스르며 김해시가 이마트 입점을 추진하는 명분은 ‘공익성’이다. “민자 유치를 통해 여객터미널을 신축하기 위한 사업이 주 목적이며 대형마트 입점은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김해시는 밝혔다.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는 ‘이마트 입점 반대 김해시민연대’를 만들어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의정부에 민자역사를 지은 신세계는 의정부시와 다투고 있다. SSM 조례 제정 직전에 신세계가 제출한 민자역사 내 이마트 개설 등록 신청을 의정부시가 정당한 이유 없이 반려했다는 취지다. 를 보면, 롯데마트 충남 당진점은 2008년 지역 군부대 건물을 지어주고 입점 허가를 받았다. 대형마트의 이익이 공익의 옷을 입고 들어선다고 표현할 만하다.
사회적 책임 잊은 경영 이념값싼 물건을 쾌적한 매장에서 살 수 있다면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낮은 가격을 지불하는 대가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유통산업발전법(3조)은 ‘유통산업의 지역별, 종류별 균형발전의 도모와 공정한 경쟁 여건의 조성’ 등을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기업 윤리에 바탕을 두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경영 이념이 신세계그룹 홈페이지에 떠 있다. 그들의 사회적 책임과 유통법 사이의 거리는, 아직 멀어 보인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이선영 인턴기자
| |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체포 때 김건희는…“안됐더라, 얼굴 형편없더라”
윤석열, 끝까지 ‘거짓 선동’…체포당했는데도 “자진 출석” 강변
공수처 “윤 대통령 저녁 식사 후 조사 이어가”…메뉴는 된장찌개
윤석열 체포에 국힘 격앙…“불법체포감금” 공수처장 고발
설 민생지원금 1인당 50만원까지…지자체, 내수경제 띄우기
7시간 만에 끝난 ‘윤의 무법천지’…1차 때와 뭐가 달랐나
윤석열 “탄핵소추 되고 보니 이제야 대통령이구나 생각 들어”
‘윤석열 구금’ 서울구치소 오늘 저녁은 ‘불고기·콩나물국’
‘윤석열 쪽 요구’ 수용한 체포 매뉴얼 [그림판]
“윤석열, 체포 전 샌드위치 10개 만들어…어쩜 그리 의연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