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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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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투쟁, 그리고 투병 중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로 미국의 ‘광주학살’ 방조책임 제기한 김은숙씨, 위암과 싸우며 맞은 봄
등록 2011-04-07 17:56 수정 2020-05-03 04:26
1982년 3월 불타고 있는 부산 미국문화원. 이 방화사건은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보도사진연감

1982년 3월 불타고 있는 부산 미국문화원. 이 방화사건은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보도사진연감

“후회해보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병실이었다. 웅크린 여인은 몸을 돌렸다. 해선 안 될 질문이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뒤의 삶은 어땠는지, 후회한 적은 없는지 떡 썰듯 물을 수 없다. 비극의 시대가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정리될 리 없다.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불이 났다, 1시간 뒤 진화됐다, 한 대학생이 질식사했다, 방화살인이다. 맥락이 분절된 사실 또한 진실이되 온전하긴 어렵다.

“잊혀지고 죄인이 돼버렸다”

돌아선 여인이 뒤척였다. “돌아보면 늘 아픈 게 많다”고 말했다. 하반신은 비대했다. 팔, 목, 얼굴은 앙상했다.

여인을 찾아가는 3월31일 반도는 올 들어 가장 따뜻했다. 포도당이 여인의 몸 위에서 주입되었고, 복수가 아래로 배출되고 있었다. “(사건 이후) 외로웠다. 삶 자체가 쉽지 않았다” 말이 나왔다가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말이 들어갔다.

임수경씨도 병문안에 동행했다. 오후 5시 지하철은 북적였다. “그때 사람들 대부분 죄인처럼 아무 변명도 못하고… 지나치게 못했지, 그리고 잊혀지고 완전한 죄인이 된 것”이라고 임씨는 말했다. 통일·반미 운동은 ‘민주화운동’이 못 된다. “참여정부 때도 국가보안법 하나 없애지 못하지 않았냐”고 임씨는 되물었다. 승객들의 귀엔 대저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여럿 아이폰, 휴대전화에 꽂혀 있었다. 시대·민주·통일·보안법 따위 낱말이 툭툭 떨어졌다. 시대가 선택하게 했으나, 책임은 개인 몫이다.

1983년 3월 범인이 공개수배됐다. 4월1일 여인은 자수했다. 여인에게 무기징역, 다른 이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감형 출소 뒤 여인은 번역을 했고 소설도 썼다. 고를 호구책이 많지 않았다.

늘 아팠던 여인은 지난 3월29일 더 아팠다. 밤 11시 구급차를 불렀다. 혈압이 30~60mmHg이었다. 지난해 8월 의사는 위암 말기라고 진단했다. 수술도 안 된다 했다. 몇 달간 한방 치료를 하다 결국 녹색병원에 닿았다. 고 리영희 선생의 아들이 주치의다. 얼마 전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와 작별했다.

“안 아플 때 진통제를 맞으면 좀 괜찮은데, 아플 때 맞으면 아주… 누워.” 여인이 말했다.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봉제공장 여성 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 ‘참신나는학교’에서 일하던 2009년 유학을 시도했다. 신학대를 지원했다. “비뚤어진 것을 대할 때, 일상의 윤리만 내세워선 한계가 있더라고요. 방법을 더 찾고 싶었어요.” 열심히 했다. 일주일 만에 지원서도 작성했다. 합격 통보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미국을 직접 가서 보라”던 지인의 말만 쓰게 맴돌았다.

1982년 그때도 여인은 신학대학생이었다. “성경이 너무 어려웠다. 직접, 건방지지만 제대로 한번 번역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원이 불탔다.

저녁 7시께 윤원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죽을 사들고 왔다. 자그마한 병실이 북적인다. 입원 뒤 처음인 모양이다. 여인이 경주교도소에 있을 때 “함세웅 신부님이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고 윤 사무총장이 말했다. 또 웃는다. 그의 어머니가 “정말 도움 많이 받았는데… 신부님은 건강하세요?” 물었다. 임수경씨가 “왜 나 때는 그렇게 안 오신 거냐”고 따졌다. 다들 웃었다. 어머니만 웃지 않았다. “그런 얘기, 그때 얘긴 하지 마. 무서워…. 하지 마.” 여인은 “반찬도 없이 어떻게 죽을 먹느냐”고 ‘헛투정’했다. 식도도 상해 죽도 몇 술 뜨지 못한다. 여인의 딸이 죽을 떠먹이려던 참이다.

나쁜 딸이다. 나쁜 딸이다. 나쁜 엄마다. 김은숙씨다.

병원에서 지인들과 함께 음악회 열기도

임수경씨가 3월30일 트위터에 김씨의 암투병 소식을 전하며 도움을 청했다. 하룻새 70여 명이 성원했다. ‘힘내세요’ ‘아름답습니다’ 밑으로 ‘부끄럽습니다’가 찍혀 있다. 5만원을 보낸 이다. 돈이 적어 부끄럽다는 건지, 그를 잊어 부끄럽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임씨는 4월5일 녹색병원 1층에서 지인들을 불러모아 ‘김은숙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 중이다. 저녁 7시, 봄은 더 진할 것이다. 생애 가장 따뜻한 봄일지 모르겠다. (후원: 농협 302-0378-0560-01·임수경).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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