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국경 없는 의사회’, 1985년 ‘국경 없는 기자회’를 탄생시킨 프랑스 파리에서 이번에는 ‘국경 없는 학자회’(Chercheurs sans fronti‵eres - Free Science)라는 비정부기구(NGO)가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이기지 못할 소송으로 학문 자유 억압
지난해 10월21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학자들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국경 없는 학자회’는 지난 2월 말 프랑스 하원에서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공개 콘퍼런스를 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오늘날 학문의 독립성은 정치 및 경제 권력 앞에 무력해지고 있다”며 특히 “비판적 목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소송에서 질 것을 알면서도 전략적으로 명예훼손 소송 등을 제기하는 이른바 ‘전략적 봉쇄 소송’(SLAPP)으로 학자들을 위협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이런 부당한 압력에 맞서기 위해 올 상반기부터 각국 학자들의 학문 자유 억압 사례를 취합해 전세계 학문 공동체들에 공개적으로 알린 뒤,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공동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이처럼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비교적 잘 보장된 프랑스 학자들이 주축이 돼 ‘국경 없는 학자회’라는 NGO를 출범시킨 배경에는 최근 몇몇 프랑스 학자들이 겪은 전략적 봉쇄 소송 사건이 있다. 프랑스 학자들 사이에서 ‘사사카와 재단 사건’으로 잘 알려진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카롤린 포스텔 비네 교수 사건이 그중 하나다(817호 세계 ‘프랑스 학자들, 일본 극우 재단과 싸운다’ 참조). 프랑스의 대표적 일본학 연구자인 비네 교수는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인 일본 극우파 사사카와 료이치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설립된 뒤 해외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 일본 극우세력의 과거를 미화하는 역사 왜곡 작업을 도모해온 일본재단(Nippon Foundation), 도쿄재단(Tokyo Foundation), 사사카와 평화재단(Sasakawa Peace Foundation) 등 전세계 수십 개의 이른바 ‘사사카와 재단’들의 실상을 알리는 학문적 작업을 해온 학자다. 그는 프랑스에 설립된 또 다른 ‘사사카와 재단’인 프랑스-일본 재단(Fondation Franco-Japonaise)으로부터 2009년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이에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의 학자 수백 명이 연대해 비네 교수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날선 논쟁도 촉발됐다.
‘사사카와 재단’들로부터 연구비를 받아온 학자와 연구비를 거부해온 학자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사사카와를 미화하는 옥중일기 출판 작업에 참여한 한 외국 학자가 한국의 한 공공재단에서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한국학 연구도 수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윤리적 논란이 제기됐다. 그러나 학계의 논쟁과 2년여 동안의 지루한 법정 싸움은 마침내 지난해 12월 프랑스 법원이 ‘사사카와 재단의 명예훼손 소송은 성립될 수 없다’는 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종결됐다.
사르코지 학력 의혹 제기에 이어진 소송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또 다른 힘겨운 법정 싸움을 벌인 학자가 있었다. 파리10대학의 알랭 가리구 교수다. 그는 2009년 한 프랑스 언론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자문역이자 민간 여론조사기관의 대표를 맡고 있던 파트리크 뷔송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사건의 발단은 뷔송이 대표로 있는 민간 여론조사기관이 대통령궁에서 발주한 여론조사 용역을 수행하면서 업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과다 비용을 청구한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 뷔송은 2008년 한 해에만 자문료와 여론조사 비용을 포함해 무려 23억원가량을 수령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치 여론조사 전문가인 가리구 교수는 이를 학자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는데, 이와 관련된 한 언론과의 인터뷰가 소송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소송이 단순히 뷔송의 개인적 결정이 아니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가리구 교수는 이전에도 사르코지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학력에 대해 공개적인 문제제기를 해온 사람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파리10대학 대학원 학위가 명확히 검증되지 않았으며, 파리정치대학에서는 낙제해 퇴교됐는데도 마치 수료한 것처럼 내세웠다는 것이다. 다행히 1년 넘게 진행된 가리구 교수의 법정 싸움은 동료 학자들의 연대 활동에 힘입어 최근 각하 판결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학계의 도움을 다른 학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국경 없는 학자회’ 결성에 적극 참여했다.
‘국경 없는 학자회’는 이처럼 처음에는 전략적 봉쇄 소송에 공동 대응하는 프랑스 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됐지만, 이웃 나라 학자들이 속속 결합하면서 활동 반경이 프랑스는 물론 유럽 대륙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국경 없는 학자회’의 첫 번째 ‘국경 없는’ 행동은 터키와 헝가리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쿠르드 반군에 관한 현장 연구 과정에서 학술적 목적으로 수집한 반군 관련 정보를 국가기관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터키 사회학자 피나 셀렉 박사와 우파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연구비 횡령 누명을 쓰고 법정 싸움을 시작한 헝가리의 기올기 게레비 박사가 첫 번째 연대 활동의 대상이다. 한국어를 포함한 13개 언어로 준비된 ‘국경 없는 학자회’의 창립 선언문은 그들이 내미는 연대의 손길이 우리와도 무관치 않음을 말해준다.
파리(프랑스)=윤석준 통신원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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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학자회’ 공동대표 조르지아 발로바츠 마이몽 파리12대학 교수(생물학)는 ‘학문의 자유’ 수호를 강조하고 한국 학자들의 참여도 희망했다.
‘국경 없는 학자회’를 결성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은 학자적 사명과 연구의 자유를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해왔다. 많은 학자가 연구비 지원, 채용 재계약 등의 이유로 통제에 수동적으로 응해왔지만, 이제는 학자 스스로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특히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소송 등을 도구로 삼아 학자들의 학문적 자유를 탄압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학자들이 서로 도와 공동 대응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정치권력뿐 아니라 시장권력을 강조한 이유는.
오늘날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은 밀접하게 연관돼 학문 어젠다와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때로는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을 위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때로는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위해 대신 힘을 발휘해주기도 한다. 특히 내 연구 분야인 자연과학의 경우 이해관계가 있는 기업들의 학문적 통제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연구를 하지 못하고, 시장권력이 원하는 방향의 결과물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연구는 도태되기도 한다.
‘국경 없는 학자회’의 향후 활동 계획은.
국제적인 비정부기구(NGO)로 프랑스 등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로 회원과 조직을 확대할 것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나 ‘국경 없는 기자회’처럼 각 나라 혹은 대륙별로 모임이 결성될 수도 있다. 조만간 독일과 헝가리에서 지부가 발족할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관심 있는 학자나 단체가 있다면 언제라도 함께할 용의가 있다. 영향력 있는 장년층 학자들의 참여도 중요하지만, 특히 양심 있는 젊은 세대가 많이 참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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