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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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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은 낭만적 공간이 아니다

‘갇힌 자’의 시선으로 본 동물원…

멸종위기종 보전과 환경교육의 장으로 기능하는 곳은 소수일 뿐
등록 2010-12-23 15:09 수정 2020-05-03 04:26

말레이곰 ‘꼬마’가 다시 동물원에 갇혔다. 사람들은 안도했고 박수를 쳤다. 정작 꼬마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짧지만 강렬했던 열흘간의 자유를 그는 잊을 수 있을까. 죽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철창 안에서 매일같이 지루한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그의 여생은 어떨까.
 
이상행동을 하는 동물들

국내의 한 동물원에서 철창 너머를 바라보는 원숭이.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별>의 한 장면이다.황윤 제공

국내의 한 동물원에서 철창 너머를 바라보는 원숭이.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별>의 한 장면이다.황윤 제공

친구와 함께 서울 외곽의 한 동물원을 찾은 2000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수많은 가족과 연인이 동물원에 놀러왔고, 나는 인파에 휩쓸려 무심히 거닐고 있었다. 북극곰 전시장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이상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북극의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지고 있어야 할 북극곰의 몸에 누렇게 이끼가 끼어 있었는데, 북극곰은 머리를 위아래로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마치 시계추처럼 반복적으로 머리를 흔드는 북극곰의 이상한 행동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드넓은 북극의 삶이 그리워 마음이 심하게 병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런 행동은 야생에서 살아야 할 야생동물이 비좁고 무료한 공간에 갇혀 있을 때 보이는 ‘정형 행동’(Stereotypical Behavior)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곰이 춤을 춘다” “곰이 에어로빅을 한다”며 즐겁게 웃을 따름이었다. 햇살 가득한 2000년 어느 봄, 내가 목격한 동물원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과도 같았다.

동화책과 노래, 혹은 드라마나 영화 등 많은 대중매체를 통해 동물원은 ‘꿈과 낭만의 동산’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혹은 죽어가는) 동물 처지에서도 그럴까. 인간을 전시하고 구경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로 인식하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전시하고 구경하는 행위는 왜 당연한 것으로 여길까. 북극곰을 만난 그날, 나는 이제껏 인간의 관점으로만 바라본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갇힌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붙잡힌 뒤 낯선 도시로 옮겨져 철창에 갇힌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코끼리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풀 한 포기 없는 콘크리트 방에 혼자 갇힌 채 온종일 같은 구간을 뱅글뱅글 맴도는 치타, 페인트가 다 벗겨지도록 쉬지 않고 벽을 핥는 기린, 스트레스로 전시장 유리창을 온 힘을 다해 두드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온종일 어두컴컴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서 있던 고릴라.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을 촬영하는 내내 내 가슴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니겔 로스펠스 지음, 지호 펴냄)이라는 책은 동물원의 슬픈 역사를 자세히 알려준다. 인간이 야생동물을 가둔 역사는 고대와 중세의 황제·왕족·귀족이 부와 권력의 과시나 단순한 수집 목적으로 야생동물을 왕궁이나 사유지에 전시해왔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처럼 일반 대중의 관람을 위해 만들어진 ‘근대식 동물원’은 18∼19세기 제국주의와 함께 만들어졌다. 유럽과 북미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아시아 등을 침략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재와 원주민뿐 아니라 야생 동식물을 대규모로 약탈했다. 극악무도한 포획 과정을 거쳐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 야생동물을 자국의 시민들에게 이른바 ‘자연교육’ 목적으로 개방한 것이 근대식 동물원의 시작이었다. 요컨대 제국주의의 속성과 ‘보통 사람들’의 교양 욕구, 현대 부르주아의 감수성, 식민지에 대한 우월감, 자연에 대한 정복욕이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근대식 동물원인 것이다.

최대한 많은 종, 많은 수의 야생동물을 전시해 대중이 편하게 관람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근대식 동물원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서식지와 생태계의 급격한 파괴로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동물이 많아지자, 동물원이 이들을 지키는 ‘멸종위기종 보전센터’ 역할을 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멸종위기종의 피난처인가 종신형 감옥인가
국내의 한 동물원에서 어두운 내실에 힘없이 누워 있는 호랑이 ‘홍아’.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별>의 한 장면이다.황윤 제공

국내의 한 동물원에서 어두운 내실에 힘없이 누워 있는 호랑이 ‘홍아’.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별>의 한 장면이다.황윤 제공

을 만든 뒤 외국의 동물원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다. 유럽과 북미, 일본, 대만 등의 동물원이었는데 그중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동물원도 있었다. 일단 전시부터 달랐다. 콘크리트와 철창을 걷어내고 밀림과 초원, 사막, 바다 등 다양한 서식지를 재현해놓았고, 갇힌 동물들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며 야생의 습성을 잃지 않도록 다양한 ‘행동 풍부화’(Enrichment)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병들고 우울한 동물 대신 활발하게 뛰어노는 동물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전시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보전을 동물원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다. 첨단 장비를 갖춘 종보전 연구센터에서 연구팀이 분주히 움직였고 각종 보전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또한 ‘환경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각 동물의 전시장에서는 이들이 야생 서식지에서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서식지가 얼마나 빨리 파괴되고 있는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등 실질적인 정보를 글과 그림, 시청각 자료, 체험시설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관람객은 동물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야생동물들을 돕기 위해 뭔가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동물원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고 누군가 내게 질문한다면,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멸종위기종 보전이나 환경교육의 역할을 저버린 채 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동물원, 단순한 눈요기를 위한 동물원이라면 나는 단호히 반대한다.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를 일평생 삭막한 방 안에 덩그러니 놓아두고 구경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겐 휴일 한나절의 나들이 코스일지 몰라도, 갇힌 이들에게는 언제 빠져나올지 알 수 없는 영화 의 독방, 혹은 종신형 감옥이다.

그렇다면 모든 동물원을 폐지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윤리적 판단뿐 아니라 사회적·생태적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1만 개가 넘는 전세계 동물원을 지금 당장 없앨 수도 없겠지만,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피난처가 된 동물원의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모든 동물원이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런 동물원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 문제다. 아직도 많은 동물원들은 전시와 사육에 급급한 실정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교잡과 근친교배 등을 통해 무조건 개체 수만 늘리고 있고, 이는 종 보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동물원이 멸종위기종 보전에 정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6천여 종의 야생동물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거나 위협받고 있는 상태에서, 소수의 종에만 인공번식계획이 적용되고 그중에서도 극소수 종만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야생에 되돌아간다.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동물원에 투자되는 동안, 서식지는 계속 파괴되는 것이다.

영국의 시민단체 CAPS(Captive Animals’ Protection Society)는 서커스·동물원·수족관·광고·영화 등 오락을 위한 동물 이용에 전면 반대하는 시민단체로서 ‘동물원의 실상’(The Reality of Zoos)이라는 글을 통해 동물원의 진실을 알렸다. 이 글은 피상적으로 혹은 낭만적으로 이해돼온 동물원의 이면, 혹은 알려지지 않았던 동물원의 여러 가지 측면을 논쟁의 수면 위로 끌어낸다. 국내 동물보호단체 ‘하호’에서는 몇 년 전 서울대공원 동물원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슬픈 동물원’이라는 보고서를 냈고, 나는 이후 동물원에 관한 고민을 담아 라는 영상을 만들었다.

 

결국 돌아갈 곳은 야생의 서식지

국내의 일부 동물원도 느리지만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어차피 존재하는 동물원이라면 단순한 눈요기 공간에서 벗어나 멸종위기종 보전센터와 환경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 하고,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정부와 관련 행정기관의 의지는 물론 시민의 의식 변화와 진지한 토론이 절실하다. 예컨대 동물원이 갖춰야 할 기본 조건을 법으로 규정하는 일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서식지 파괴를 막는 일이다. 동물원에서 겨우 멸종을 모면하더라도, 결국 돌아갈 야생의 서식지가 다 파괴되고 없다면 그 종의 생존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아이를 인큐베이터 안에서 기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야생을 다 담기엔 동물원은 턱없이 작은 그릇이다. 말레이곰 꼬마와 그의 후손이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한국의 동물원도 청계산도 아닌, 말레이시아의 밀림이 아닐까.

황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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