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권력을 둘러싼 한나라당 대선주자군의 움직임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2012년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해 출마가 거론되는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언행이 “대선용 행보가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러나 부인은 정치적으로 계산된, 정치적인 행위다. 또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서로의 견제도 커진다. 최근 한나라당이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당 소속 시도지사를 중앙당 회의에 참석시키기로 한 것을 놓고 박근혜계와 이명박계가 가볍게 충돌하며 이견을 보인 것도 이렇게 활발해진 서로의 활동을 ‘견제’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이상득이 박근혜를 도울 수도 있다?‘부동의 1위’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요즘 ‘식사 정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자파 의원들과도 잘 만나지 않던 그는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을 독대한 뒤 이명박계·중립 성향 의원들을 수시로 만나며 접촉면을 넓히는 중이다. 이 대통령과 회동한 직후인 8월23일 친이직계인 조해진·김영우·강승규 의원을 만나 점심을 함께 한 데 이어, 지난 9월14일엔 이명박계가 대부분인 여성 의원들과 오찬을 했다. 9월27일엔 박준선·유정현·이범래·주광덕·조문환 의원 등 수도권 초선 의원을, 28일엔 김재경·김정훈·김정권·권경석·신상진 등 이명박계 재선 의원을, 29일엔 범친이계로 분류되는 홍정욱·김장수·고승덕 의원을 만났다. 모임은 이명박계 의원들이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박근혜계 의원들이 주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특유의 썰렁한 농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정권 창출을 같이 한 인연’을 강조하며 친밀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 전 대표는 모임 참석자들에게 “의원들 입장(계파) 때문에 그동안 잘 만나지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은 좋지 않겠느냐”거나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표의 이런 행보는 ‘외연 확대’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아직 ‘차기 대표선수’를 정하지 못한 이명박계 의원들과 스킨십을 강화해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8월21일 이 대통령과의 회동으로 ‘되게는 못해도 안 되게 할 힘은 가진’ 현직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도 어느 정도 정상화되고, ‘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는 보수 쪽의 비난도 잠재운 것이 박 전 대표의 발걸음이 빨라진 이유로 풀이된다. 최근엔 이상득 의원이 박 전 대표를 도울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의원은 최근 와 한 인터뷰에서 “나라가 잘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 중에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것이고 물론 박 전 대표도 그런 분 중 한 분이다. 지금은 박 전 대표에 대해 이런저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때 봐서…”라고 말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종시 문제 등으로 박 전 대표와 날선 대립을 보인 사람의 발언치고는 매우 ‘전향적인’ 톤이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의 얘기는 이렇다. “아직 지방을 다니면서 유권자를 직접 만나는 등 본격적인 행보를 할 국면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스킨십을 강화하려는 걸 보면 박 전 대표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명박계 분위기도 예전과는 다르다. 지난 3년 동안 바로 눈앞에서 인사해도 안 받아주던 이상득 의원이 요즘엔 먼저 말도 걸더라. ‘박근혜는 죽어도 안 된다’는 기류는 아닌 것 같다.”
박 전 대표는 복지·경제·외교·과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정례적으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면서 ‘정책 공부’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에서 담당 상임위를 기획재정위원회로 옮긴 뒤 자신의 미니홈피에 “소외계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골고루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가려고 한다. 앞으로 기획재정위에서 재정과 조세, 외환 등 경제정책이 이런 목표를 잘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 그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는 당분간 정책 준비와 당내 접촉면을 넓히는 일에 몰두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지지율 상승세를 타고 있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2012년 대선 출마에 관한 태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상태다. 지난 9월28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무엇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시대와 국민이 원하는 게 뭔지 열심히 생각하고, 길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측근인 차명진 의원은 “도정을 하는 사람이 무슨 대선이냐”면서도 “한나라당이 (김 지사를 대선후보로) 필요로 한다면 모를까”라며 여운을 남겼다.
다소 애매모호한 김 지사 쪽의 ‘말’과는 달리 그가 최근 보이는 행동은 차기 대선에 나서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8·8 개각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총리라고 나타나는데 누군지 모른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고 거칠게 비난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에선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국무총리 후보자에 지명되자 “한나라당 차기 대선구도가 복잡해졌다”는 해석을 쏟아냈다. 중앙정치에서 비껴나 있던 김태호 전 지사가 ‘차기 대선후보감’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문수 지사의 격한 반응은 김태호 전 지사를 겨냥한 것인 동시에 이명박계가 그쪽으로 쏠려가는 것을 견제하려는 시도라는 말이 나왔다.
이 대통령을 향해 연일 수위 높은 비판을 쏟아내는 것도 이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을 통해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굳히려는 시도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8월18일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 포럼’에서 정부의 신도시 정책과 관련해 “그나마 노태우 대통령은 통이 컸다. 규모가 일산이나 분당이 500만~600만 평 되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100만 평 이내로 작게 한다”고 말했다. GTX를 놓고도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는) 대한민국의 리더십 문제”라고 날을 세웠다. 9월28일 워싱턴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그동안 CEO 리더십이 많이 강조됐는데, CEO 리더십은 국가 운영에 맞지 않다.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은) 공인으로서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각 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근 개국한 한국방송 경인방송센터는 ‘스포트라이트’에 목마른 김 지사의 숙원사업이었다. 별도의 지역 뉴스 시간을 편성하는 비수도권과 달리 경기도는 그동안 서울에서 내보내는 뉴스를 모두 받아 방송을 해왔다. 이 때문에 대형 사건·사고가 아닌 한 경기도 소식을 뉴스로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경인방송센터 개국으로 경기도에서도 지역 뉴스가 가능해진 것은 방송사를 유치하려고 오랫동안 공들인 김 지사의 결실이라는 평가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김 지사와 한나라당 의원의 만남도 잦아지고 있다. 김 지사의 공관으로 의원들이 찾아가기도 하고, 김 지사가 따로 요청해 별도의 장소에서 만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서울 시내 모처에서 김 지사를 만난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같은 당 의원과 지사가 못 만날 이유가 있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당 안에선 “대선 지원 요청을 하려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이재오의 ‘광폭 행보’… 본인은 손사래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정몽준 전 대표는 우선 ‘어게인 2002’를 기대한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서, 2002년 월드컵 붐을 타고 대선후보로 급부상했던 그에게 월드컵은 다시 한번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이 유치 신청을 한 2022년 월드컵 개최지가 오는 12월2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월드컵에만 정치적 명운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 전 대표는 자신의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을 통해 지난 8월 로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를 초청했다. 그는 샌델 교수의 대중 강연회에 참석하는 한편, 별도로 대담도 진행했다. 9월9일엔 프랑스 학자 기 소르망과 단독 대담을 했다. 정 전 대표는 내년 초까지 석학 6~7명과 대담을 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묶어 낼 계획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학자와 나눈 대담집은 정 전 대표에게 ‘내실 있는 후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이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가장 큰 산이다. 9월15일 오랜만에 참석한 당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당과 행정부 내 계파·파벌이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권력을 사유화한다”고 비판했다. 작정하고 준비한 발언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튼튼하지 못한 당내 기반, 지방선거 이후 냉담한 민심 등을 극복할 뾰족수는 되지 못했다.
이재오 특임장관도 ‘광폭 정치’를 선보이고 있다. 특임장관에 임명된 뒤 그는 여야 지도부는 물론 종교계·재계·노동계까지 방문하는 등 대선후보급 일정을 진행했다. 또한 원수처럼 지내던 박근혜계 의원들과도 잇따라 만나며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 장관의 이런 행보를 두고 대선을 위한 길 닦기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정작 이 전 장관은 이런 해석에 펄쩍 뛴다. 그의 한 측근은 “이명박 정부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것이지, 이 장관 자신을 위한 대선 행보가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과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계파 화합에 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안에서 이런 반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현직 장관으로서 “다음 대선에 나가겠다”고 공개적으로 못박을 수도 없고,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안정적으로 국정 후반기를 마무리해야 자신에게도 길이 열리기 때문에 이것 말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엔 이명박계 단일화 전망
한편에선 이 장관이 대선후보로 나서더라도, 결국 ‘정치적 동지’인 김문수 지사를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어쨌거나 박 전 대표를 상대할 이명박계 후보는 1명으로 압축돼야 하고, 현재로선 지지도 등을 고려할 때 김 지사가 더 유리하다는 전망이다.
또 한 사람의 유력주자로 거론되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도지사의 당 회의 참석 문제에서 김문수 지사와 함께 ‘특혜’를 누리는 대상으로 꼽힌다. 하지만 오 시장 스스로 지방선거 직전인 5월4일 문화방송 라디오 에서 “(재선을 하면) 8년 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국민과 당이 원한다면 (대선 출마를) 고려하겠다”고 말하는 등 2017년 대선 출마를 시사해, 차기 대선엔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럭비공뿐만이 아니다. 정치인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에 돌입하는 건 내년 중반기다. 당헌상 경선에 출마하려는 선출직 당직자는 대선 1년6개월 전에 사퇴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출마를 위해 당직을 사퇴하는 이가 나올 것이고, 시도지사의 경우도 대략 그 시기가 현직을 사퇴하고 경선 준비에 뛰어들 적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시간도, 사람도, 변수도 너무 많다. 그때까지 이들의 경쟁은 지속될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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