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에 엉겨붙은 엿가락처럼 끈질기게 질퍽거린다. 더위는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진광장(41)씨의 코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흐른다. 그의 왼쪽엔 대학생, 오른쪽엔 교수들이 앉아 있다. 모두 축 늘어져 있다. 폭염을 면할 가망은 없다.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후문 담벼락엔 그늘이 없다. 늘어앉은 교수·학생·교직원들은 파르라니 머리를 깎았다. 삭발했다. 뙤약볕은 모기처럼 맨살을 파고들어 찌른다. 얇은 펼침판을 머리 위에 올려본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무기다. 그들이 지금 맞서 싸우는 것은 더위만이 아니다. “부패 인사 김문기 복귀 반대.” 펼침판에 적혀 있다.
<font color="#00847C">사분위는 정녕 김문기 복귀 추인하나</font>“김문기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전국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8월4일 오후, 한증막 같은 정부청사 앞 도로에 자청해 나앉은 이유를 진씨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1988년 상지대에 입학했다. 과 학생회장을 거쳐 1991년 상지대 총학생회장이 됐다. 1996년 졸업 뒤 교직원이 됐다. 지금은 상지대 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다. 대학 입학 이후 20여 년을 ‘김문기 문제’로 농성하며 지냈다.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청와대, 여의도, 세종로, 그리고 강원도 원주의 캠퍼스에서 동시다발로 철야농성 중이다.
농성의 이유는 간단하다. 김문기 전 이사장이 상지대를 다시 장악하려 한다. 그 역사는 장구하다. 1993년 부정입학 등의 혐의로 당시 이사장이던 김씨가 구속됐다.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임시이사’ 체제가 됐다. 교수·교직원·학생은 물론 지역 시민단체와 동문들의 노력으로 2004년부터 ‘정식 이사’를 선임해 완전한 정상화를 꾀했다. 그런데 김씨가 이를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대법원은 김씨의 편을 들었다. “임시이사들이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판결로 2003년 12월 정이사로 뽑힌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 9명이 자격을 잃었다.
정이사를 새로 뽑을 권한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산하 자문기구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이하 사분위)로 넘어왔다. 노무현 정권 말기, 1기 사분위는 상지대 정이사 선임을 계속 미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로 구성된 2기 사분위에는 보수 성향 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2기 사분위는 지난 4월, 파국을 알리는 결정을 내렸다. ‘종전이사’가 5명, 교육부가 2명, 상지대 구성원이 2명의 정이사를 추천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분위가 ‘종전이사’를 1993년 ‘임시이사 체제’ 이전의 이사, 즉 김 전 이사장 시절의 이사라고 해석한 데 있다. 기다렸다는 듯, 김씨는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정이사 후보로 사분위에 제출했다. 1.5~2배수의 후보를 추천하는 관행조차 무시했다. 그는 지난 6월, 상지대 근처에 ‘종전이사 사무실’ 개소식까지 열었다. 사분위가 이를 추인하는 순간, 김씨는 17년 만에 상지대에 복귀하게 된다. 사분위가 언제 어떻게 그 결정을 내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설사 김씨를 배제하더라도 그를 따르던 전 이사들이 다시 정이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농성은 그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다.
진씨는 지난 20여 년의 상지대를 지켜봤다. 치악산 자락의 한갓진 캠퍼스에서 처음 맞이한 봄날을 그는 기억한다. 재수 끝에 지방 후기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 첫해, 두 사람이 한방에서 자면서 월 11만원을 내는 하숙방에 살았다. 처음에는 학교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 없었다. “이 대학을 내가 왜 다니냐는 심정이었죠.” 신날 것 없는 동급생끼리 잔디밭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는데, 캠퍼스가 일순 소란에 빠졌다. 학생들이 대학 본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font color="#C21A8D">‘김문기 대학’은 아내가 이사, 사위가 실장</font>‘광주 청문회’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총학생회가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를 위해 관광버스를 불렀다. 계약까지 마쳤는데 돌연 버스회사가 차를 보내지 않았다. 학교 당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민에 빠진 신입생 진광장은 “영문 모르고 영문학과에 들어온” 자신의 대학 생활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자기 대학 이사장이 누군지 아는 학생은 별로 없잖아요. 대학은 총장 중심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상지대에선 총장 말고 이사장 이름만 회자됐어요. 김문기와 그 친인척들이 대학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상지학원 이사장 김문기씨는 아내(이사), 사위(총장 비서실장), 매제(전문대학장), 8촌(교무과장·한방병원 총무과장), 외사촌(주임·교직원), 문중 인사(회계과장·서무과장) 등을 두루 핵심 요직에 앉혔다.
서울 인사동에서 가구업체를 운영하며 큰돈을 번 김씨는 1973년 12월 상지대와 인연을 맺었다. 운영난을 겪던 원주대학이 폐교되자, 박정희 정권은 지역 출신의 사업가 김씨를 관선이사로 파견했다. 임시 이사장이 된 그는 1974년 기존의 ‘청암학원’을 ‘상지학원’으로 개명했다. ‘상지학원, 상지대학교 진실규명 및 설립자 학교 찾아주기 운동본부’(www.sangjiun.net)라는 홈페이지는 그의 치적을 알리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주변의 요청을 받아들여 어려움에 빠진 지역 교육기관을 인수했고, 이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 등 학교 창립과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상지대는 ‘김문기의 대학’이므로, 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뭐 이런 대학이 다 있나 싶었죠.” 진씨는 ‘김문기의 대학’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캠퍼스엔 ‘성냥갑 건물’뿐이었다. 성냥갑처럼 생긴 똑같은 건물 5개가 늘어서 있었다. 설계비를 줄이려고 같은 도면의 건물 여러 개를 한번에 지어올렸다 해서, 지금까지도 ‘김문기 대학’의 유물처럼 여겨진다. 고등학교에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이 ‘김문기의 대학’엔 있었다.
여러 지방대 가운데 유독 상지대에서 학생운동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그 캠퍼스에 있다고 진씨는 생각한다. “처음엔 열악한 학교 시설에 정서적 반감을 느끼다, 그 이유가 족벌 운영 구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대학과 사회문제에 눈을 뜨는 거죠.” 황량한 캠퍼스 가운데도 그가 마음에 담아둔 곳이 있다. 본관 옆 오르막길이다. 학생들은 그곳을 ‘해방뜰’이라 불렀다. 모든 집회가 해방뜰에서 열렸다. 적어도 1천 명 이상, 많으면 3천여 명이 교내 집회에 참가했다. 요구사항은 항상 비슷했다. ‘김문기 족벌 경영 반대’였다.
“강의실 의자를 들어내 수업을 거부하고, 대신 본관에 몰려가 점거 농성하고…. 학기의 시작과 끝이 ‘족벌재단 퇴진’이었어요.” 그 무렵 학생운동권에 기승을 부리던 ‘NL-PD’ 정파 다툼조차 상지대에선 힘을 잃었다.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김문기에 대해선 아무 차이가 없었거든요.” 옛 생각이 나는 듯 진씨는 살짝 웃었다. “차이라고 해봐야, 이사장실 점거 뒤에 사무실 집기를 밖으로 뺄 거냐 말 거냐를 두고 논쟁한 정도?”
그것을 ‘정상적인 대학 생활’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역시 정상적이지 않았다. 1993년 4월, 검찰은 김문기 당시 이사장을 구속했다. 현직 국회의원이던 그는 공금횡령과 부정입학 등의 혐의로 기소됐고, 이듬해인 3월 대법원은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공금횡령에 대해선 무죄, 부정입학은 유죄를 인정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좌파들이 부패 비리로 나를 몰아세워 쫓아냈지만, 1995년 사면·복권으로 그 혐의를 모두 벗었다”고 주장한다. 사면·복권이 과거의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고, 대법원까지 항소했음에도 부정입학 혐의를 인정받았으며, 여당 3선 의원의 유력 정치인에게 이례적으로 실형까지 선고한 일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
<font color="#008ABD">김문기 이후 민주대학 17년</font>다만 진씨가 보기에도 상지대 구성원들이 김씨를 ‘쫓아내려 했던’ 것은 맞다. 진씨가 총학생회장을 맡았던 1991년, 열악한 학내 식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학생회 자치 식당을 만든 적이 있다. “학내 식당에선 1년 내내 카레밥과 자장밥이 나왔어요. 하는 수 없이 학생들은 모두 시내로 나가 밥을 먹었죠.” 그러나 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마련한 식당을 포클레인을 동원해 부숴버렸다.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도 유명하다. 1986년 강사 채용에 1천만원을 요구한 비리가 밝혀져 김씨가 궁지에 몰렸다. 그해 10월14일 밤 본관 앞에 “김일성 수령님”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이 뿌려졌다. 훗날 학생과 직원의 양심선언과 경찰 조사 결과, 불온 유인물이 학교 쪽 교직원들에 의해 제작·살포됐음이 드러났다. 학교가 학생들을 ‘빨갱이’로 엮으려 했던 것이다.
김씨는 이런 일에 직접 개입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사장으로 취임한 1978년 이후 10여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사회를 열지 않았다. 교수·교직원·학생 등은 물론 다른 이사진까지 배제하고 사실상 혼자서 학교를 운영한 셈이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김씨의 책임을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 구성원 다수가 그를 반대한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김씨가 구속된 1993년 이후, 진씨가 일하는 상지대는 거대한 허물 벗기를 도모했다. 이돈명·변형윤·한완상·강만길·김성훈 등 법조계와 학계의 명망가들이 이사장과 총장에 취임했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두고, 녹색 패러다임에 입각한 새로운 청사진을 만들어 대학을 혁신했다. 1996년 교직원이 되어 입학 업무를 맡아봤던 진씨는 “‘이제 상지대는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니다’라고 고등학교 진학 교사들이 평가할 때마다 뿌듯했다”고 말한다. 1992년 114명이던 교수 인원은 2010년 현재 360여 명으로 늘었고, 재학생도 1500여 명에서 8천여 명으로 늘었다.
가장 큰 혁신은 민주적이고 투명한 대학 운영에 있다. 교수협의회·교직원노조·총학생회·총동문회 등이 총장 후보를 추천하고 이사회에서 승인받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매년 대학 본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총학생회가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내년 등록금을 책정하고, 이와 연동해 교수·교직원의 임금을 책정한다. 결산 자료는 투명하게 공개한다. 상지대 홈페이지에 가면, 예·결산 자료는 물론 이사회 회의록까지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씨는 “이런 대학은 한국 어디에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말 그대로 ‘민주대학’이다. 진씨는 “궁극적으로는 시민·지역사회에 뿌리를 두고 개방적으로 운영되는 ‘시민대학’을 지향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이사회 구성을 다수가 바라고 있었다”고 말한다.
<font color="#A341B1">“이사진의 학교 출입을 막을 겁니다”</font>사분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은 그런 꿈을 비웃고 있다. 김 전 이사장이 통치한 15년과 구성원들이 공동 운영한 17년을 맞바꾸려 하고 있다. 진씨는 “이명박 정부가 교육비리를 척결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상지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김씨가 복귀한다면 어찌 될까. “그것으로 파국입니다. 우리는 이사회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사진의 학교 출입을 막을 겁니다.” 요즘 8천여 명 상지대 학생 가운데 3천여 명이 김씨의 재단 복귀 반대 집회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있다. 상지대는 지금 30년 전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개인의 대학’이 아닌 ‘모두의 대학’을 만들어보겠다며 마음을 모았던 교수·교직원·학생들의 성취도 가뭇없이 사라지게 생겼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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