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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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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는 유족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에서 ‘조카’ 제외…
피해 12만 건 중 70%에 위로금 주지 않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
등록 2010-08-12 22:27 수정 2020-05-03 04:26

“김정환을 특별법 제17조에 의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함.”
단 한 문장이었다. 통지서를 받아든 김주명(61)씨의 눈에 물이 고였다. 2010년 5월26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삼촌인 김정환씨를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로 인정했다. 유품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삼촌의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조카인 김씨가 뛰어다닌 지 2년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하지만 뒷장을 확인한 김씨는 눈을 의심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심의·결정 통지서’ 뒷장에는 희생자 위로금 신청 안내가 붙어 있었다. 강제동원 중 사망자·행방불명자 유족에게 지급되는 위로금은 2천만원. 그런데 안내서에 명시된 ‘유족 범위와 순위’가 ‘① 배우자 및 자녀 ② 부모 ③ 손자녀 ④ 형제자매(조카 제외)’였다. 애당초 조카인 김씨는 유족에서 제외된 사람이었다.
짝짝이 고무신 신고 징용 간 삼촌

김주명씨가 삼촌이 강제징용을 떠나던 아침 풍경을 설명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주명씨가 삼촌이 강제징용을 떠나던 아침 풍경을 설명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삼촌은 스무 살이던 1941년 일본에 끌려갔다. 당시 3남1녀 중 장남이던 김씨의 아버지는 결혼한 뒤에도 동생들을 돌봤다. 징용을 간 삼촌은 막내였다. 막내를 보내고 아버지는 애태웠다. 2년 뒤, 다행히 삼촌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삼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밭일을 했다.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김씨의 아버지인 김한길씨에게 강제동원 명령이 떨어졌다. 삼촌이 나섰다.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는 형님 대신 총각인 내가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넷째아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삼촌 얼굴을 한 번 보며 괴로워했다. 며칠 뒤엔 홀로 장에 가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사왔다.

스물두 살의 삼촌은 그렇게 두 번째 징용길에 올랐다. 끌려가던 날 아침, 삼촌은 식사 준비를 돕기 위해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마을 이장이 문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오늘이 가는 날이니 아침 먹고 면사무소로 나오라”는 통보였다. 아버지는 삼촌에게 새로 산 검정 고무신을 내밀었다. 삼촌은 “내가 새 신 신어서 뭣하냐”며 툇마루 아래 흙먼지 묻은 헌신을 뒤적여 짝짝이로 신고는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해방이 돼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농사일도 내팽개친 채 서울역으로, 부산역으로 삼촌을 찾아다녔다. 6개월 만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김정환이 1945년 2월에 일하다 추락하여 중태”라는 내용이었다. 보낸 이가 누군지, 관련 내용을 확인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1960년에 눈을 감으면서도 아버지는 막내동생을 걱정했다. “어떻게든 수소문을 해봐라. 살아 있으면 어디에 후손이라도 있지 않겠느냐.” 큰아들에게 편지를 맡기고는 힘겹게 눈을 감았다. 7남1녀 중 여섯째로 1948년에 태어난 김주명씨에겐 모두 ‘옛날이야기’ 같은 일이다. 199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2003년에는 큰형님이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유언처럼 삼촌의 이야기를 남겼다.

삼촌을 위해 진상규명을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2008년 6월이었다. 당시 뇌경색을 앓은 뒤 광주에서 요양 중이던 김씨는 광주시청을 지나다가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신청기간’이라는 펼침막을 발견했다. 그날로 시청을 찾았다. 알고 보니 신청 마감일인 6월30일을 보름여 앞둔 시점이었다.

광주시청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접수 담당 직원은 그에게 “강제동원을 같이 갔던 사람 중에 생존자가 있느냐, 부모·형제 중에 살아 계시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삼촌이 살아 계셨으면 90살이 넘었고 3남1녀 중 막내인데 부모·형제 중 누가 살아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담당 직원은 “조카도 접수가 가능하다”며 호적등본과 제적부, 가족관계증명서 등의 서류를 요구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광주시청에 전화로 물었더니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위원회’ 연락처를 알려줬다. 몇 차례 전화한 끝에 2009년 11월 “당시 상황에 대한 증거가 더 필요하니 인우보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미혼으로 끌려가 직계 후손은 없는데…

이미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탓에 남은 증거란 없었다. 삼촌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담은 ‘마지막 편지’조차 1973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죽전리에 있던 고향집이 저수지 조성 사업으로 수몰되면서 사라졌다. 마을에 모여살던 30여 가구도 뿔뿔이 흩어져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지난 2월에야 수소문 끝에 당시 이장의 아들인 송동석씨를 찾았다. 여든이 넘어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송씨는 김씨 가족을 기억했다. “김정환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고도 못 돌아온 걸 생생히 기억한다”며 위원회에 가서 증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뒤 위원회는 송씨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것으로 절차를 마무리했다.

3월22일에는 위원회의 이름이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로 바뀌었다. 김씨는 “위원회에서 연락이 없자 인우보증이 부족한가 싶어 계속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지난 5월 김씨에게 통지서를 보내기까지 위원회가 벌인 조사 활동은 어떤 것일까? 위원회가 작성한 ‘심의조서’를 보면 정작 강제동원 피해사실을 결정한 근거는 ‘제적부’의 사망 기록이다. 위원회는 “김정환은 제적부상 ‘1945년 11월5일 우후 5시 일본 조취현 미자시 서정 ○번지(牛後 5時 日本 鳥取縣 米子市 西町 ○番地)에서 사망’의 기록이 있다”고 밝혀 적었다. 이에 김씨와 송씨의 진술이 더해져 김씨의 삼촌은 1943년 일본 돗토리현에 소재한 작업장에 강제동원됐다가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 이에 대해 위원회 관계자는 “(제적부 내용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 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에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지만 위원회 내부의 여러 절차가 있다 보니 2년여의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조카 제외’를 명시한 유족 범위는 뭘까? 올해 3월22일에 제정된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유족 범위를 ‘배우자 및 자녀, 부모, 손자녀, 형제자매’로 제한한다. ‘조카 제외’를 명시한 것은 위원회의 선택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애초 법률상으로도 유족 범위에서 조카는 제외돼 있지만 워낙 조카들이 강제동원 피해 심의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아 혼선을 피하기 위해 ‘조카 제외’를 명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혼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가 없는데다, 부모나 형제자매도 생존한 경우가 많지 않아 조카가 진상규명을 신청하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조카가 유족 범위에서 제외됨에 따라 어렵게 삼촌의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도 위로금을 수령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7월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된 12만4472명 중 유족이나 피해 당사자가 위로금을 받은 경우는 3만8703건(31.1%)에 불과하다. 위원회 관계자는 “애초부터 법 취지 자체가 피해자 보상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위로금 지원이다 보니 위로금 지급이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상임대표는 “현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만들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위원회’를 없앨 수는 없으니 이름만 바꾼 채 미온적으로 운영하는 듯하다”며 “피해자에 대한 조사나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과거사 문제를 걸림돌로 취급하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 우롱하는 위원회”

김씨는 15년 전 충남 홍성의 아버지 묘 옆에 삼촌의 묘를 꾸몄다. 무덤에는 삼촌이 쓰던 물건과 함께 새 고무신 한 켤레를 넣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약소국의 국민으로 살면서 피와 뼈와 살을 뺏긴 사람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가 통탄스럽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먼저 나서서 조사하지도 않고 강제동원 피해 신고인만 고생시키더니 결국 이제 와서는 유족이 아니라니…. 이건 피해자 가족을 우롱하는 겁니다.” 늙은 조카는 젊은 삼촌 생각에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wy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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