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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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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통일로 새겨진 92년의 삶



박진목 약전: 좌익과 우익 모두에 버림받고 번번이 간첩으로 의심받았지만
끈질기게 민족통일과 평화 역설한 독립운동가
등록 2010-08-05 22:14 수정 2020-05-03 04:26

특무대원들은 박진목을 나무에 묶었다. 새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성하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보였다. 낙동강 줄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박진목은 생각했다. 육군 특무대원들은 그를 지프차에 싣고 대구 달성군 화원유원지 뒷산으로 데려왔다. 차 한켠에는 가마니, 삽, 괭이가 있었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박진목의 눈을 가렸다. 박진목은 담배를 피우고 유언을 했다. “동족 간에 전쟁을 중지하고 서로가 위하는 민주주의 조국통일 만세.” 특무대원이 받아적었다. 전쟁이 마지막 광기를 향해 치닫던 1952년 5월15일, 새벽이었다. 총소리가 울렸다.
 
남로당에서 버려지고 이승만 정부에 쫓기는 신세

박진목은 지인들과 함께 1995년 남한산성 밑자락에 ‘민족 정기탑’을 세웠다. 주변의 돌을 손으로 날라 4년여에 걸쳐 쌓아올렸다. “지나는 등산객들이 잠시나마 민족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도록 작은 표지라도 만들자”는 뜻이었다. 탑 아래 ‘평화통일’ 비석의 글은 박진목이 직접 썼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박진목은 지인들과 함께 1995년 남한산성 밑자락에 ‘민족 정기탑’을 세웠다. 주변의 돌을 손으로 날라 4년여에 걸쳐 쌓아올렸다. “지나는 등산객들이 잠시나마 민족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도록 작은 표지라도 만들자”는 뜻이었다. 탑 아래 ‘평화통일’ 비석의 글은 박진목이 직접 썼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솟을대문 뒤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퍼지고,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 박씨 집안은 넷째아들을 얻었다. 1918년 8월13일, 수천 평 정원이 있는 고택에서 박진목은 태어났다. 어린 박진목은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 근처에서 광산을 운영하던 큰형 박시목이 그를 데려가 보살폈다. 형을 통해 여러 독립지사를 만나 세상 보는 눈을 넓혔다.

일본 상지대 철학과를 나온 큰형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됐다. 1943년, 형 시목이 동생 진목을 중국으로 불렀다. 20대의 박진목은 조선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를 잇는 연락책을 맡았다. 처음 중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닭을 잡아 진목에게 먹였다. 박씨 집안의 네 아들 모두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었다. 1944년 5월, 한국에 들어온 진목은 경찰에 붙잡혔다. 대구경찰서의 조선인 형사부장은 “부자, 형제, 숙질 모두 역적질을 하는 ‘비국민’ 집안”이라며 닦달했다. 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목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감옥의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함부로 얻어맞았다. 사형당하지 않고도 그저 죽었다. 1945년 6월 한 달 동안 대구형무소에서만 207명이 죽었다. 같은 운명이 되기 직전인 1945년 7월, 진목은 풀려나왔다. 닭을 잡아주시던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아들들이 몽땅 잡혀간 뒤 시름시름 앓았다. 광복군의 한반도 진공을 도모하던 큰형님도 세상을 떴다. 중국에서 붙잡혀 감옥에서 죽었다. 큰형님의 아들도 함께 죽었다. 진목에게 소중했던 어른들 모두 해방을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박진목은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민족계·좌익계가 두루 참여해 해방 이후 자치를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미군정은 못마땅했다. 건준을 해산시켰다. 박진목은 미군정에 반대한 남조선 노동당에 가입했다. 남로당 경북도당의 부장급 간부가 됐다. 남로당은 지하 활동을 벌였다. 당원들의 희생이 컸다. 잡혀가고 죽었다. 당 지도부가 무모하다고 박진목은 생각했다. 대중을 잘살게 하겠다는 당이 대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 지도부에 건의했고, 탄원했다. 그러다 남로당에서 쫓겨났다. 곧이어 이승만 정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모든 정파로부터 박진목은 버림받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다. 형무소에 갇혔던 두 동생이 풀려났다. 그들은 인민군의 진군에 환호했다. 진목은 생각이 달랐다. 동족을 죽이는 것이 영웅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들은 나중에 북으로 갔으나 소식이 끊겼다. 서울에 남아있던 진목은 인민군의 노력 동원에 끌려갔다. 미군 폭격을 무릅쓰고 다리를 놓고 길을 깔았다. 거리를 오가다 끌려왔을 뿐인 농투성이들이 폭격에 죽고, 굶주려 죽었다. 박진목은 살아남았다. 홀몸으로 가족을 찾아오다 한국군에게 붙잡혔다. 발가벗겨져 총살 직전까지 몰렸다. 딱히 죄도 묻지 않고 인민군 패잔병으로 몰았다. 어느 장교의 도움을 천운으로 받아 도망쳐나왔다.

보통 사람은 그쯤 했을 것이다. 좌익과 우익 모두 그를 떠났고, 악랄한 총질에 죽을 고비까지 여러 차례 넘겼다. 할 만큼 했다 여기고 지긋지긋한 일을 그만뒀을 것이다. 박진목은 멈추지 않았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과거 독립운동을 벌였던 민족계 최익환을 만났다. ‘종전 운동’을 벌이자고 합심했다. 같은 민족을 서로 죽이는 전쟁을 지금 당장 멈추게 하자고 뜻을 모았다. 시장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매일처럼 넘기는 전쟁통이었다. 다들 제 살길 찾기에 바빴다. 박진목을 뒷받침하는 조직 따윈 아예 없었다. 그는 낭만적이었으나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몸은 죽여도 마음까지는 뺏지 못할 것”

1951년 1월,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 대열에서 옛 남로당 동료를 만났다. 그를 설득해 이승엽을 소개받았다. 이승엽은 북한 내무상이었다. 서울 보성중학교 근처 이층집에서 이승엽을 만났다. 남북 간 종전 협상의 다리가 되겠다고 박진목은 그에게 역설했다. “미군의 신임장을 받아오라”고 이승엽은 말했다. 훗날 김일성은 이 만남을 근거로 박헌영·이승엽·이강국 등 남로당계를 ‘미국 스파이’로 몰아 숙청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진목은 “참으로 졸렬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북쪽 위정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평생 이승만과 김일성을 싫어했다.

1951년 여름, 미군이 다시 서울에 입성했다. 박진목은 미국 장교들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쩐 일인지 미군도 그를 도왔다. 1951년 7월, 미군 지프차를 타고 전선 지대로 갔다. 이어 북쪽의 안내로 평양에 들어갔다. 북한 사회안전성은 박진목이 첩자가 아닌지 취조했다. 남로당의 옛 동료가 그를 배신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40일 만에 다시 남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미군 수사기관이 그를 체포했다. 예정보다 북한 체류 기간이 길었던 것을 의심했다. 20여 일 동안 북한 간첩이 아닌지 조사받았다. 그래도 박진목은 겁먹지 않았다. 부산으로 피난간 정치인을 여럿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만남을 주선해줄 인물을 물색했다. 1952년 5월, 육군 특무대가 그를 체포했다. 전쟁 시기에 종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적 행위’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어느 특무대원이 그를 알은체했다. 일제 시절, 큰형 시목을 취조했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를 잡아 가뒀던 일제 순사가 이제 평화운동가를 잡아들이는 한국 특무대원이 돼 있었다.

“전쟁을 반대한 사람은 징역 살고, 전쟁해서 사람 죽인 사람은 훈장을 받는 세상, 나는 징역을 택하는 사람이 됐다”고 박진목은 훗날 자서전 (계몽사)에 적었지만, 그때만 해도 곧 죽을 목숨이었다. 특무대원들은 그를 야산에 데려가 눈을 가리고 ‘즉결 처분’에 들어갔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북에서 신익희, 조봉암에게 전하는 말이라도 없습디까? 아무리 봐도 간첩이 아닌 것 같아 살리고 싶어서 궁리하는 거요.” 눈을 가린 박진목에게 특무대원이 속삭였다. 더 할 말이 없다고, 몸은 죽여도 마음까지는 뺏지 못할 것이라고,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죽여달라고 박진목은 말했다. 총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까무러쳤다. 죽은 줄 알았다. 눈 가린 수건을 풀어주며 특무대원들은 낄낄대고 웃었다. “그저 슬펐다. 해서도 안 되고 당해서도 안 되는 일을 나는 당했다”고 박진목은 자서전에 적었다.

1953년 6월, 박진목은 감옥을 나왔다. 한 달여 뒤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박진목이 꿈꾸던 종전선언도, 평화협정도 아니었다. 전쟁을 잠시 중단했을 뿐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진보당의 조봉암과 사귀며 ‘혁신계의 연합’을 종용했다. 의 조용수와 만나며 그 창간을 조언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족건양회 등의 민간 통일단체를 만드는 데도 조력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박진목은 방첩대의 취조를 받았고, 혁명검찰부의 조사도 받았다. 번번이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그때마다 민족통일에 대한 열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군사정권은 그를 괴롭힐 수 있었으나, 죄를 물어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박진목은 가만있지 않았다. 훗날 군사정부에 의해 폐간되는 의 상임이사를 맡았고, 공보부가 결성 즉시 해산해버리긴 했으나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여러 인사와 함께 ‘민족정기회’도 결성했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3년엔 민족통일과 평화를 역설한 자서전까지 출간했다. 서울 YMCA 강당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당시 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생전의 그를 따랐던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은 “이병주·조동필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선생의 말이라면 기꺼이 응했다”고 말했다. “그 비결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박진목은 진보 운동에 도움되는 일을 스스로 찾아나섰지만, “남로당에 관계한 전력 때문에 누가 될 수 있다”며 일의 전면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다. 영향력은 지대했으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박진목(오른쪽)은 1970년대 남한산성 인근 임야를 사서 묘목을 키우며 살았다. 근처 움막집을 고쳐 단칸방에서 지냈다. 지금은 그의 막내아들이 방을 두 칸으로 넓혀 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박진목(오른쪽)은 1970년대 남한산성 인근 임야를 사서 묘목을 키우며 살았다. 근처 움막집을 고쳐 단칸방에서 지냈다. 지금은 그의 막내아들이 방을 두 칸으로 넓혀 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움막 생활 개의치 않고 독립유공 서훈 거절해

노년이 다가오자 박진목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밑자락에서 밭을 일구었다. 움막을 고쳐 살았다. 일제시대와 해방 정국, 그리고 전쟁 이후까지 생계를 해결한 것은 아내 이영숙이었다. 옛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 아내가 운영했던 ‘중원식당’은 민주화 인사들의 사랑방과 같았다. 나중에는 10평짜리 연립주택에서 말년을 맞았다. 그가 즐겨 사귄 이 가운데 명망가·재력가가 적지 않았지만, 비좁고 누추한 집에 사는 박진목이 오히려 그들에게 술과 밥을 샀다. “가난을 참은 것이 아니라,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지인들은 회고한다.

가난·이념·권력·전쟁은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다만 세월이 박진목에게 달려들었다. 지난 7월13일 저녁, 박진목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살. 생전의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독립운동의 목적인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훈장을 받느냐”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완강히 거부했다. 서훈을 받았다면 그의 죽음이나마 여러 언론이 기록했을 것이다.

박진목은 3남5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농사를 짓거나 작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지금은 특별한 직업이 없다. 다섯 딸 모두 남편과 일찍 사별하거나 이혼했다. 박진목이 밭을 일궜던 남한산성 밑자락에 막내아들이 산다. 단칸방의 움막은 지금 방 두 칸의 슬레이트 지붕집이 됐다. 오는 10월께 집 앞에 묘비를 꾸며 모실 것이라고 근처에 사는 큰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며느리를 불러다 ‘내가 곧 돈 구해서 줄게’ 하며 웃으셨다”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평생 아버지 심부름만 했다”는 큰아들은 선하게 웃었다. 독립운동가·평화운동가의 자손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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