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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목민관은 아전의 잔꾀를 알아본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 순직할 때까지 각 방의 수입·지출 챙기며 고을 살림살이를 훤히 파악
등록 2010-04-30 14:04 수정 2020-05-03 04:26
술에 취한 수령이 송사를 처리하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취중송사〉. 아버지 정재원의 부임지에서 생활하며 어진 목민관의 자세를 배운 정약용은 타락한 목민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창비 제공

술에 취한 수령이 송사를 처리하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취중송사〉. 아버지 정재원의 부임지에서 생활하며 어진 목민관의 자세를 배운 정약용은 타락한 목민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창비 제공

정약용은 익히 알려진 대로 대단한 저술가로, 18년의 유배 기간 중 수십 편의 저작을 남겼다. 정약용의 저술 중 는 48권으로, 가장 많은 권수를 갖는 저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약용 본인이 몸소 목민관으로 있던 것은 황해도 곡산부사 시절뿐이었다. 그럼에도 는 학자적 지식을 넘어 현실적 안목과 상황을 자세히 담고 있다.

<font color="#00847C">아버지가 남긴 작은 궤짝 </font>

정약용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의 부임지에서 함께 생활했다. 6살 되던 때 연천현감에 임명된 아버지와 생활했고, 15살에 혼인한 다음해에도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랐다. 이런 젊은 날의 경험이 정약용 자신의 목민관 경험인 것처럼 명확하고 또렷하게 남아 그 직임을 파악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추정하는 게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

는 목민관에 임명돼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퇴임해 물러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목차로 구성하고 있다. 12개 목을 두고 각 목에는 6개 조항을 두는 체제로 구성됐다. 그런데 마지막 12목인 ‘해관’(解官)의 여섯 조항 중 마지막 두 조항이 ‘은졸’(隱卒)과 ‘유애’(遺愛)이다. 은졸은 본래 임금이 죽은 공신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던 일을 말하는데, 에는 부임지에서 목민관이 운명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은졸은 오늘날로 보면 순직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유애란 송덕비와 선정비를 세워 떠난 목민관의 선정을 기리는 것을 말한다. 은졸 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부임지에서 몸이 죽어 맑은 향기가 더욱 강렬하며 아전과 백성이 슬퍼하고 상여를 붙잡고 소리 내어 곡하며 오래되어도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진 목민관의 최후이다.”

어진 목민관의 최후라 칭송한 은졸은 정약용에게 하나의 있음직한 가능성이 아닌, 직접 겪은 아픔이었다. 아버지 정재원이 63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진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정재원은 60살에 울산부사로 임명돼 울산부의 여러 폐단을 혁신한 목민관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다음해인 61살에 진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은졸한 것이다. 당시 홍문관 수찬으로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정약용을 비롯해 아들들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 한걸음에 달려간 진주 관아에서 정약용은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무엇을 마음에 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재원이 마지막까지 업무를 살피던 곳곳에는 관련 문서가 어지럽게 두서없이 놓여 있었다. 마침 머리맡 작은 궤짝에 종이 한 장이 있었는데, 각 방(房)의 수입·지출 내역이 일일이 조목조목 기록돼 있었다. 얼마나 자세했는지 문서를 보는 사람이 각기 보완하고 이에 따라 시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듯했다. 정재원이 마음을 다하고 죽을 때까지 세심했음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정약용은 이를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을 수 있었다.

목민관은 자칫 ‘손님’일 수 있었다. 고을에는 오래된 읍례(邑例·고을의 관례)가 있었고 아전은 주인처럼 고을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재원 역시 아전에게 속거나 농락당할 위기가 있었다. 정재원이 울산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정재원이 부임했을 때 울산부는 여러 폐단이 산적해 있었다. 조세로 걷어야 하는 미곡은 밀렸고 군병은 부족했다. 정재원은 미납된 조세를 완결했고 군병을 보충하는 데 전력해 성과를 내었다. 목민관은 국가의 공직자였기에 국가의 살림살이와 국방을 위한 제 몫의 일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핍한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듬어야 하는 그야말로 목민의 수장이었다. 이 때문에 정재원은 밀린 세금을 가족에게 대신 물리는 족징(族徵)이란 폐단 역시 엄금하려 했다.

울산부사 시절 정재원이 직접 쓴 간찰.

울산부사 시절 정재원이 직접 쓴 간찰.

<font color="#C21A8D">넓은 정보력과 정확한 분석력</font>

정재원은 검재리(檢災吏)에게 자신을 대신해 울산 각 고을의 재앙 정도와 형편을 조사해서 아뢰도록 했다. 검재리는 해마다 날씨와 바람 등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농사 수확물을 검사해 올바른 조세책을 펴기 위해 세운 자리였다. 검재리가 농사 형편이 어렵게 된 상황을 실제보다 과장해 보고하는 대목에는 그저 온화한 말로 응하던 정재원이었다. 하지만 검재리가 급기야 흉년이 심해서 국가에 낼 세금 격인 전총(田總)을 줄여서 아뢰려 하자, 정재원은 엄하게 판결해 검재리를 물리쳤다. 곁에서 보던 아들들이 물으니 웃으며 말하기를 “뭐 그리 새롭거나 신기할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비의 혜택과 농사 형편에 대한 보고를 통해 어느 동 어느 리에서 김매기를 했는지, 모심기를 했는지와 자세한 형편을 내가 훤히 파악하고 있는데, 아전이 어찌 감히 나를 속이겠는가”라고 했다.

상관된 자로서 본인보다 업무에 밝은 아랫사람을 부릴 일이 자주 생긴다. 그러나 상관은 넓은 정보력과 정확한 분석력을 갖추어야 한다. 정재원은 자칫 아전의 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도리어 아전의 보고를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아전의 잔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991900">조선시대 목민관의 부임행차</font>
<font color="#008ABD">부임길부터 향리들 농간</font>

신임 수령이 부임하는 행차는 중 변사또가 남원부사로 부임하는 행렬을 묘사한 부분에 자세히 그려졌다. 변사또는 그를 모시러 온 이방 등 신영(新迎) 하인들을 거느리고 남원에 부임했는데, 행렬을 따르는 취악대와 여러 관속으로 행차는 천둥·번개처럼 요란하고 구름처럼 높았다고 한다. 실제 수령의 부임행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수령의 부임행차는 단지 고을 초입에서 관아에 이르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수령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신임 수령이 관아 건물에 도착하기까지 ‘부임의례’라고 불러야 할 만큼 복잡하고 긴 의례 절차를 밟아야 했다. 부임 절차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임명돼 임금을 직접 뵙고 인사를 올리는 사은숙배(謝恩肅拜), 서울 경내에서 여러 선배 관직자들을 찾아 하직 인사하는 사조(辭朝), 서울에서 부임지까지의 여정과 관아 입성 등이 그것이다.
수령에 임명된 자가 지방에 있는 경우, 임명장을 전해 받은 뒤 서둘러 한양으로 올라와야 했다. 물론 사은숙배가 생략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은 다스릴 고을의 소식을 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은숙배 때 임금이 간혹 “수령칠사(守令七事)가 무엇인가” 하고 하문했다. 수령칠사란 수령이 맡은 중요한 업무를 일곱 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그 각각이 수령의 인사고과 항목이기도 했다. 하늘같이 어렵고 높은 임금을 뵌 자리는 그저 있기만 해도 땀이 흘러 등을 적실 정도였다. 황망하게 주저하다 대답을 못하는 신임 수령이 실록이나 일기에서 자주 발견된다.
사은숙배가 끝나도 신임관은 즉시 부임지로 출발할 수 없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과 육조의 관직자를 일일이 찾아 하직 인사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졌다. 인사권과 추천권을 갖는 중앙 관료들에게 신임 관원이 인사를 올리는 자리이자, 지방직 임명자가 행정 일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두루 인사를 하는 사이 부임지로부터 신임 수령을 모셔갈 여러 관속이 서울에 도착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향리를 포함한 관속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수령이 향리를 어떻게 제압하느냐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정도가 정해질 정도였다. 향리와 수령의 소리 없는 알력 다툼은 부임지로 행차하는 여정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에도 거론될 만큼 향리들은 부임 여정에서 빈번하게 농간을 부렸다. “길을 갈 때에 미신으로 꺼리는 곳이라 하여 바른 길을 버리고 딴 길로 돌아서 가려고 하거든 마땅히 바른 길로 가서 간사한 말을 깨뜨리도록 해야 한다.” 책에 거론된 내용은 그저 지침서의 일반적인 당부가 아니었다. 향리들은 고을에 임박하면 “이곳은 도적들이 횡행하여 위험한 곳입니다” 하며 코앞에 있는 고을을 뒤로한 채 멀리 돌아갈 것을 청했다. 혹은 “이곳을 지났던 이전 수령은 모두 횡사하셨습니다”라고 하며 이슬을 맞으며 들에서 묵을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향리들의 농간은 금기와 관련돼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이었기에 신임관은 쉽게 동요했다. 이럴 때 거듭 되새겨야 할 것은 “장중하고 화평하며 간결하고 과묵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하여야 한다”는 글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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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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