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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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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 보수 늘리고, 사외이사 줄이고

대기업들 3월 주주총회 상정 안건 살펴보니… 성과 독차지·투명성 결여·오너 체제 강화 비판 나와
등록 2010-03-11 11:23 수정 2020-05-03 04:26

3월은 주총의 계절이다. 12월에 결산을 하는 법인은 3월 주주총회를 통해 1년 동안의 장사를 평가받고 새로운 등기임원을 뽑는다. 현대자동차 등 95개 기업은 3월12일, 삼성전자·LG전자 등 330개 기업은 19일, 코오롱·아시아나항공 등 156개 기업은 26일 주총을 연다.
그런데 올해 주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위기는 끝났다’는 듯 임원 보수를 듬뿍 올려주는 대신 경영 효율성을 높인다는 이름으로 사외이사는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임원 보수 높이기’와 ‘사외이사 줄이기’는 곧 기업 투명성 결여 문제로 이어진다.

3월 주총 시즌을 맞아 대기업들은 임원 보수를 높이고 사외이사는 줄이고 있다. ‘임원 보수 높이기’와 ‘사외이사 줄이기’는 기업 투명성 결여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주총 모습. 연합 이상학 기자

3월 주총 시즌을 맞아 대기업들은 임원 보수를 높이고 사외이사는 줄이고 있다. ‘임원 보수 높이기’와 ‘사외이사 줄이기’는 기업 투명성 결여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주총 모습. 연합 이상학 기자

위기는 끝이라는 뜻?

올해 기업들은 임원 보수총액을 올리는 안건을 잇따라 주총에 상정시키고 있다. 임원이 받는 보수에는 급여·성과금·퇴직금 등이 포함된다. 임원 보수는 주총에서 승인된 보수총액 내에서 지급되는데, 개개인의 보수 결정 과정에서 대기업 총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포스코는 올해 임원 보수총액을 60억원에서 70억원으로 올렸다. KT는 2009년 45억원을 올해 65억원으로 올리는 안건을 주총에 상정했다. SK㈜는 10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높일 예정이다. 이밖에 한국전력공사, 동국제강, 신한금융지주, 한라공조, SKC 등이 임원 보수를 상향 조정한다. 보수총액을 올리지 않는 기업들도 사외이사를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임원 급여 수준을 높이고 있다.

임원 보수 인상을 바로보는 외부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기업 실적이 좋아진 건 기업 경영자를 포함한 임원뿐만 아니라 직원들과 비정규직, 하청업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혜택을 임원들이 냉큼 차지한다는 비판이다. 지난해 시민단체 ‘함께하는시민행동’이 28개 주요 대기업 사내이사 보수를 우리나라 전체 임금노동자의 보수와 비교한 결과를 보면, 그 격차는 38.6배에 이르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수준에 견주면 무려 63.7배나 된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임원들의 보수를 삭감하거나 동결한 데서 점차 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항변한다. KT는 “지난해 금융위기에다 새로 취임한 이석채 회장이 강도 높은 긴축 경영에 나서면서 임원들이 상여금을 반납하고 보수도 10% 정도 내렸다. 경쟁사 대비 임원 급여가 적은 편이어서 정상 수준으로 복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임원 보수를 놓고 주총장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13일 주총을 앞두고 등기이사 9명의 보수총액을 전년 350억원에서 550억원으로 57%나 높였다. 반면 배당금은 전년 주당 7500원에서 5천원으로 줄였다. 주주들은 “실적이 좋지 않아 배당을 줄이는 상황에서 임원 보수만 늘렸다”고 반발했다. 한 주주는 주총장에서 “도요타의 임원들 보수가 10억원인 데 비해 삼성전자 임원 보수는 너무 많다”며 “지난해 삼성전자가 도요타보다 더 장사를 잘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당시 삼성은 “퇴진한 이건희 전 회장, 이학수 고문, 윤종용 상임고문, 김인주 상담역과 임기가 만료되는 최도석 사장 등 5명의 퇴직금이 반영됐다”고 부랴부랴 해명했다.

일본, 임원 보수 내역 공개 추진 중
사내이사 1인당 평균 보수 상위 5개 기업/하위 5개 기업

사내이사 1인당 평균 보수 상위 5개 기업/하위 5개 기업

임원 보수 논란의 이면에는 투명성 결여 문제가 웅크리고 있다. 개별 이사들에게 지급된 보수가 공개되지 않는데다 보수를 결정하는 합리적인 절차나 과정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이시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감독원의 기업공시 서식에 따라 작성하는 사업보고서에는 보수 지급 기준, 성과 연동, 상여금 포함 여부 등이 통일된 기준으로 기재돼 있지 않아 임원 보수의 비교 파악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 상장사들은 전체 임원에게 지급할 보수총액을 공시하고 있지만 각 임원이 어느 정도 보수를 받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보수 공개에 반대한다. 능력에 따라 성과급을 받는 민간 기업의 임원 보수가 개별적으로 공개될 경우 회사 내 불필요한 갈등이 유발될 수 있고 사내 위화감만 불러온다는 것이다. 적게 받는 사람은 사기가 떨어지고, 많이 받는 사람은 특혜를 받고 있다는 마녀사냥식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는 이유도 편다. 기업 성과를 내기 위해 우수 인재를 영입해 성과에 맞는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수를 공개할 경우 효율성 있는 인사관리가 불가능해진다는 논리도 나온다.

임원 보수 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뒤 세계적으로 임원 보수의 적정성에 대한 의문이 일고 있다. 지난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합병된 메릴린치는 합병 직전 주요 임원 10명에게 무려 2억900만달러를 지급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금융위기를 초래해놓고 기업 실적에 관계없이 회사 임원들이 탐욕스럽게 챙겼다는 비판이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임원 보수 총액만 공시했던 일본 기업들은 4월부터 1억엔(약 13억원)을 넘는 임원들의 연봉을 개인별로 공개한다. 일본 금융청이 금융상품거래법의 시행령을 개정해 기업정보 공개를 강화하기로 방침을 변경한 데 따른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임원 보수를 유가증권보고서에 임의로 기재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미국은 이미 시가총액 7억달러(약 8천억원) 이상 상장기업의 보수 상위 임원 5명에 대한 보수 현황과 과거 3년 동안의 보수 내역 등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올해 주총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외이사 줄이기’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23일 주주총회 공고 공시에서 2009년 5명이던 사외이사를 4명으로 줄인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2009년에도 사외이사 수를 7명에서 5명으로 줄였다. 신한금융지주의 사외이사는 기존 12명에서 8명으로 감축됐다. LG디스플레이는 5명에서 4명으로 줄였고, 포스코·삼성중공업·동국제강·대한통운·태광산업·휴켐스 등도 사외이사를 줄였다.

그동안 모범적인 사외이사제를 운영해왔다는 SK그룹마저도 사외이사를 줄여 논란을 빚고 있다. SK그룹은 2004년 소버린자산운용과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일하는 이사회’를 만들겠다며 사외이사 비율을 과반수로 늘려 이사회의 투명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높여 세계 일류 수준의 이사회 중심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70%에 이르는 사외이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최 회장의 대표이사 지위를 박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내이사의 독단이 아닌 ‘시스템’으로 기업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SK에너지는 지난 2월 열린 이사회에서 전체 사외이사 수를 기존 6명에서 5명으로 줄였다.

사외이사제는 외환위기 뒤인 1998년 방만한 경영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시민단체의 지적에 따라 ‘상장기업은 이사의 4분의 1’(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 또는 금융사는 2분의 1)을 의무적으로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증권거래법에 규정하면서 도입됐다. 3년 만에 이 규정은 코스닥 등록법인에까지 확대됐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줄이는 것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오너 경영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사외이사 등 이사 수를 줄여 조직을 슬림화하면 의사 결정 속도가 빨라지고, 금융위기 뒤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줄여 조직 슬림화” 주장하지만

하지만 오너 전횡을 견제하는 ‘시어머니’ 구실을 해야 할 사외이사를 줄이는 데 비판 여론이 만만찮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면서 회사의 의사결정을 견제·감시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경영진과 대주주의 전횡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장은 “사외이사제는 경영진이나 대주주들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을 제어하는 장치였다. 최근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줄이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등에 없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도외시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는 기업의 투명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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