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60)씨는 두 가지를 혐오한다. 나이키와 빨간색.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딸이 사입고 들어온 빨간색 티셔츠를 내버렸다. 몇 년 전 딸이 첫 월급 선물로 사온 나이키 운동화도 한 번 신어본 뒤 버렸다. 딸에게는 빨간색과 나이키가 싫다고만 해뒀다. 하지만 실은 혐오가 아니다. 이씨는 이 두 가지가 두렵다. 매일 밤, 자다가도 깰 정도로 공포스럽다.
공포스러운 빨간색과 나이키
1985년 1월, 이준호씨는 간첩 누명을 쓰고 서울 종로구 옥인동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이미 옆 방엔 어머니 배병희(84)씨도 끌려 들어와 있었다. 이씨는 그곳에서 39일간 갇혀 고문을 당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사내는 그를 계속 발로 차며 폭행했다. 이씨는 그 운동화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나이키 운동화’는 이씨를 ‘빨갱이’라고 불렀다. 눈에 불빛을 비춰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가 빨리 풀려나길 바란다면 부르는 대로 받아적으라 했다. 옆방의 어머니도 아들이 빨리 풀려나길 바라며 시키는 대로 했다. ‘모자간첩 사건’은 그렇게 조작됐다. 1986년 3월 아들 이씨는 징역 7년, 어머니 배씨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24년이 흘렀다. 지난 7월10일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이광범)는 이들 모자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건 수사가 개시된 1985년으로부터 24년, 법원으로부터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지 23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뒤늦게 무죄를 선고한 데에 대해서 참으로 마음 아프고 참담하다”는 심경을 밝혔다.
선고에 앞서 이준호씨도 ‘최후진술’을 꺼내 읽었다. A4용지 석 장 분량이었다.“국가가 한 번 간첩이라고 한 이상 아무리 바르고 곧게 살려고 해도 우리 가족은 간첩의 가족이고 대한민국의 불가촉천민입니다. 헌 누더기 같은, 그러나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억울한 덫을 벗겨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밤, 이 글을 컴퓨터로 받아치며 둘째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용을 불러주던 아버지도 울었다.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그와 함께 그의 고향 강화를 찾았다. 강화의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그는 “역시 이곳에 오니 기분이 이상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20여 년간, 그는 되도록이면 이곳에 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기억은 흐릿한 ‘그날’에 가닿는다. 1972년 3월, 이씨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 이씨의 집에는 조부모까지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한밤중에 검은 그림자가 자고 있는 그를 덮쳤다. 작은아버지 일행이라고 했다. 이씨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6·25 때 행방불명돼 이미 숨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의 갑작스런 방문에 집안에는 잠시 소란이 일었다. 작은아버지는 이씨의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한 뒤 30분 만에 집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가족을 전부 소집해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자고 당부하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서야 작은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왔음을 이씨는 알게 됐다.
시간은 흘러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우자동차에 취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씨가 집안의 가장이 됐다.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교회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여성과 결혼도 했다. 딸 둘을 낳았고 승진도 했다. “두 딸의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씨는 최후진술에서 “우리 가정의 행복은 1985년 1월11일, 어머니와 제가 끌려가던 그날 거기에 멈춰 있다”고 말했다. 강화의 옛 동네에 서서 그날을 떠올리는 이씨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모든 일은 너무 갑자기 벌어졌다.
1985년 1월11일 오후,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경찰이 어머니를 잡아갔다고 했다. 책상 위에 업무를 처리하던 서류를 그대로 펼쳐둔 채 사무실을 나섰다. 금방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회사와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경찰이라며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상황 설명을 잘 못하니 와서 좀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이씨 부부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서울역 앞에 나갔다. 그곳에서 경찰은 이씨 부인 김기숙씨에게 근처 다방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씨가 혼자 남겨지자 경찰이라던 이들은 이씨의 팔을 꺾고 목을 누른 뒤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차에서 내려 목이 눌린 채 계단을 올라갔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땐 사방이 환한 방이었다. 문이 어디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39일간의 감금이 시작됐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보초를 서던 젊은이가 읽고 있던 편지의 받는 이 주소란에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부국상사’라고 쓰여 있었다.
‘부국상사’에서의 39일그곳에서 조작된 이씨의 간첩 행각은 다채로웠다. 1972년 3월 간첩인 작은아버지를 만났고 이후 1974년 4월 강화도에 있는 해병대 대대본부의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그해 8월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나 탐지 기밀을 보고하고 조선노동당에 가입했으며, 1979년 10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의 규모와 생산장비, 군납 등 국가기밀을 탐지했고, 1981년 4월엔 예비군 훈련장의 기밀을 탐지했다는 죄목이었다. 이씨는 외아들이어서 면사무소에서 방위로 군복무를 하던 중 하루 동안 해병대 대대 훈련장에서 집체교육을 받은 게 전부였고, 대우중공업 인천공장은 취직 뒤 사내 교육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난 일도 없었다. 이씨는 “당시 내가 외국에 나간 적도 없고 회사와 집만 오가며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다른 죄를 더 만들지 못해 아쉬워하더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후 법정에서 “진술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머니 배씨에게도 간첩방조죄가 씌워졌다. 이씨는 이후 교도소에 수감된 7년 동안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 무죄임이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한번은 겨울이었는데 큼직한 딸기랑 통닭을 잔뜩 쌓아놓고 절 불러서는 전향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먹고 싶었지만 참았죠.” 0.75평짜리 독방 생활 7년 동안 그는 ‘독한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그 세월 동안 이씨의 부인 김기숙씨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편이 붙잡혀가던 날, 서울역 앞 다방에서 남편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전화를 걸어와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이후 그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았다. 수소문 끝에 이씨가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옮겨진 것을 알았다. 그 뒤 김씨는 딸들과 시할머니를 부양하며 한복 치마를 만드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낮에는 악착같이 일하고 밤이면 홀로 울었다.
재심 무죄판결 뒤 표지판 설치 알게 돼하루는 아이들이 와서 물었다. “엄마, 간첩이 뭐야? 애들이 우리 아빠 간첩이래.” 김씨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이사를 했다. 이후에도 남편이 간첩이란 소문을 들은 집주인이 갑자기 전셋값을 크게 올려달라고 해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가기도 했다.
이씨가 출소를 하고도 부부는 숨죽이며 살았다. 부부는 함께 공사장에 나갔다. 이씨는 다시 취직을 하고 싶었으나 주차관리직으로 취직했다가도 보름 만에 간첩임이 ‘발각’돼 욕을 먹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10여 년간의 ‘노가다’ 생활로 부인은 병을 얻었다. 요즘엔 폐렴을 앓고 있다. 이제는 이씨가 1t 트럭으로 화물을 운반하며 생계를 꾸린다. 이씨의 귀엔 이명이 들린다. 시력도 떨어졌다. 고문 후유증이려니 생각한다.
어머니 배씨는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자책의 늪에 빠져 있다. 당시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기로 한 사실을 자신이 친정에 가서 말한 게 화근이 되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괴롭다. 지금도 아들 볼 면목이 없다. 가슴에 한이 쌓인 어머니는 당시 일만 물어보면 끝없이 했던 말을 반복한다. “나는 그냥 죽은 줄 알았던 시동생이 안 죽었더라고 말한 것뿐인데….”
간첩이란 ‘붉은 낙인’은 천형이었다. 이씨는 “1년에 한 번씩 고향 강화도에 벌초하러 갈 때면 빨리 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동네 사람들의 눈길을, 내 몸을 저미는 칼날보다 더 아프게 느꼈다”고 말했다. 어쩌다 모임에라도 참석하면 서로 명함을 주고받던 손은 이씨 앞에서 멈췄다. 취직을 할 수도, 혼기가 찬 딸들의 중매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죽은 듯이 살아야만 했다.
자신과 가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이씨는 무죄임이 밝혀지기만을 기도했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2006년 말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2009년, 마침내 법원은 재심을 통해 그가 무죄임을 선고했다.
한데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기막힌 연락이 왔다. 강화에 사는 지인이 “이제 무죄판결도 났으니 여기 바닷가에 간첩 침투 지역이라고 써 있는 것 좀 떼라”는 연락을 해왔다. 해안가에 세워진 표지판에 ‘이곳은 고첩(고정간첩) 이준호가 간첩과 접선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이씨와 함께 간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노고산 해안에는 ‘과거 적 침투 사례’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 바로 옆에 있는 높이 1.5m, 폭 1m가량의 빨간색 표지판이었다. 빨간색에 이씨는 몸서리쳤다. 표지판에는 “이한수(이씨의 작은아버지) 침투…1974년 8월30일 23시…고첩 이준호 접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판에 적힌 날짜는 이씨가 작은아버지를 처음 본 날도 아니고, 두 번째 만난 것으로 ‘조작’된 날이었다. 이씨는 또 “접선 장소는 당시 강요된 진술서에도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를 집어 표지판을 세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8월7일 강화를 찾은 날 곧바로 철거확인 결과 이 표지판은 지난 5월에 만들어졌다. 표지판을 만든 해병대 제8733부대는 “지난 5월 강화도 남부 지역에 7개의 적 침투 사례 표지판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직접 표지판을 제작했다는 한 군인은 “군 내부의 간첩 관련 비밀자료를 받아 그걸 보고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 이 작업이 이뤄진 이유에 대해 상급부대 공보장교는 “올 초 군 재배치 뒤 새로 지역을 맡은 해당 부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이라며 “표지판 제작은 고등법원의 (무죄)판결 이전에 이뤄진 일이니 단순 실수로 봐달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작 규명 결정은 이미 2006년에 났지만 군은 모른다고 했다.
취재진과 이준호씨가 강화를 찾은 날인 8월7일 군은 해당 표지판을 곧바로 철거했다. 또한 군은 이씨에게 직접 연락해 확실히 확인하지 못하고 표지판을 설치한 점에 대해 사과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한지연 간사는 “조작 간첩 사건의 경우 무죄 선고가 나도 힘들게 살아온 시간을 보상받긴 어렵다”며 “한데 공안 분위기 조성을 위해 뒤늦게 이런 표지판까지 만들다니 이는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표지판을 보며 이씨는 차라리 “무죄라는 게 실감난다”고 했다. 이제 두렵지 않다고 했다.
강화=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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