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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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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놀음 사이 비정규직 싹쓸이 해고

공공부문부터 ‘무력시위’ 하듯 해고 잇따라…
‘고용 기간 제한’ 방식의 한계 직시하는 대안 마련해야
등록 2009-07-10 11:34 수정 2020-05-03 04:25

6월29일 한국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 여의도 본관 계단에서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해고 방침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며칠 전 열린 한국방송이사회는 비정규직 420명 중 331명을 자회사 소속으로 바꾸고, 89명은 계약을 해지했다. 6월 말로 계약이 만료되는 18명에게도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또 농협중앙회는 무기계약으로 전환 가능한 비정규직 3천 명가량을 대량 해고할 계획이다. 국토해양부 산하 한국도로공사·한국토지공사 등 28개 공기업에서 연말까지 순차적으로 1361명의 해고가 예정돼 있다. 보훈병원 23명, 인천공항 경비대 7명 등 공공부문 곳곳에서 비정규직 해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7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비정규직 구조조정에 반대하고 불성실 교섭 병원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7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비정규직 구조조정에 반대하고 불성실 교섭 병원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공공부문 10% 획일적 감축이 주범

이런 살풍경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노동부가 비정규직 고용 기간 제한 2년을 4년으로 연장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공공부문에서 앞장서 비정규직 대량 해고를 촉발하고 있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공공부문 선진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10% 획일적 정원 감축 방침이 비정규직과 하위 기능직의 해고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오히려 고용 기간제한을 4년으로 연장하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비정규직 계약 해지를 악용하고 있다는 혐의도 짙다. ‘그것 봐라! 기간제한 연장을 통해 비정규직 신분으로라도 좀더 고용을 유지하는 게 낫지 않으냐’는 식이다.

정부·여당 주장대로 기간 제한 연장을 한들 계약 해지 대상자들이 고용 연장의 혜택을 받지도 못한다. 4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4년 이내에 자유롭게 계약 기간을 정할 뿐이다.

2009년 3월 기준 기간제 노동자 230만 명 중에서 2년 이상 근속자는 50만여 명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대한상의 등 사용자단체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은 ‘비정규직 직원을 2년 뒤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냐’는 질문에 단지 10~15%만 ‘채용하겠다’고 답한다. 이를 놓고 보면, 계약 연장의 혜택을 받을 비정규직 노동자는 10~20% 수준인 5만~10만 명을 넘지 못할 것이다.

7월2일 한나라당이 추진해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과 합의를 이룬 1년6개월 법적용 유예안은 정부의 4년 연장안과 시행 시기에서 6개월 격차는 있을지라도 미치는 결과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비정규직 사용 기간 제한을 연장할수록 기업들은 정규직을 줄이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한다. 전체 노동자 평균 근속 기간이 4.3년인데, 정규직을 뽑는 기업이 예외처럼 여겨질 판이다. 이런 기간 제한 연장(또는 법적용 유예)의 부정적 결과는 노동시장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이미 포화상태라고 여겼던 비정규직 규모를 또 한 번 급팽창시킬 것이다.

정말 비정규직 처지를 생각한다면 긍정적 고용 유지의 효과는 극히 제한되고 부정적 결과는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일어날 기간 제한 연장이나 법적용 유예를 선택할 게 아니다. 당장 해고를 중단하라는 긴급 처방을 발표하는 것이 정부·여당의 책임 있는 자세이다.

그렇다고 비정규직법 제정을 주도한 민주당의 주장처럼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 참여정부가 만든 비정규직법의 기간 제한은 2년 이내에는 자유롭게 계약 기간을 정하고 2년 이상 계속 고용하면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게끔 하는 제도다. 물론 2년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라서 3개월·6개월·1년 등 2년 이내 단기계약직이 80%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는 변화가 없다.

2년 넘게 3년, 5년, 심지어 10여 년 비정규직으로 근무했다고 해서 당장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으로 2006년 이후 8만3천 명가량이, 또 은행·증권·보험·유통 분야에서 일부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정규직이 아니다. 주기적 해고에 직면하는 비정규직 신세를 간신히 면했을 뿐 처우에선 정규직에 비해 여전히 차별받는다.

앞문을 허술하게 세워 뒷문을 열어젖히다

더구나 고용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규모가 작은 기업이나 자회사로 떠넘겨 더 열악한 처지로 내모는 파견·용역·하청·도급 노동자 등 간접고용의 증가를 초래했다. 비정규직 활용의 기준이 될 앞문(기간 제한 방식의 선택)을 허술하게 세우며, 파견법 개정으로 뒷문을 더 크게 열어젖힌 꼴이다.

또 얼마 전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받은 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 사례와 화물연대 박종태 광주지부장의 자살로 다시 한 번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 특수고용노동자의 문제는 비정규직법의 틀 안에 담지도 않았다. 차별 시정 제도를 새로 만들었다고 자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지가 불안한 비정규직 개인이 목숨 같은 고용을 담보로 어렵게 차별 문제를 제기해봐야 이제껏 노동위원회에서 인정받은 비율은 10%가 안 되며, 그나마 고용계약은 이미 종료된 뒤의 일이었다.

현행대로 2년 기간 제한을 유지하든, 4년으로 연장하든, 1년6개월을 유예하는 조처를 취하든 대다수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처지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악한 간접고용으로 전환될 위험도 있다. 몇 년이든 간에 기간 제한의 틀 안에서 비정규직은 100만 명이 아니라 840만 명 대다수가 수시로 해고를 경험하게 된다. 비정규직 고용 연장을 빌미로 경영자단체와 사용자들이 원하는 기간 제한 연장을 꾀하는 정부·여당과,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시늉만 내며 비정규직의 마구잡이 활용에 면죄부만 부여해준 원형을 만든 민주당이 맞서 비정규직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2년, 4년 숫자 놀음만 하고 있는 사이 정작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근본적 논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절반이 넘는 노동자가 절반의 임금을 받고 있다’는 말로 집약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정말 있다면, 현행 비정규직법의 뼈대인 ‘기간 제한의 한계’를 직시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5년, 7년 이상 상시적으로 활용했던 비정규직은 ‘명실상부한 비정규직보호법’ 아래서는 바로 정규직이 되는 게 맞다. 이런 상식을 뒷받침하려면 ‘상시적인 일은 정규직으로,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인 일은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고용 기준을 세워야 한다.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방식이다. 사유 제한은 ‘혁명적 발상’이 아니라, ‘상식을 실천하는 대안’이다.

미국서 실패한 ‘고용 유연화’ 신화만 붙잡나

이와 함께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제대로 된 판단 기준과 절차를 갖춘 차별 시정 제도, 불법 파견을 엄단하고 간접고용으로 우회하는 길을 차단하는 간접고용 제한 조처, 비정규직을 많이 활용한 기업을 제재하고 정규직 활용에 주력한 기업에 상을 주는 정규직 전환 지원제도를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

7월2일 이명박 대통령은 ‘고용 유연화’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고용 유연화는 비정규직의 확대와 전 노동자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할 뿐이다. 이미 세계 1위의 비정규직 규모와 전세계 최악의 차별 구조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근본적 대책이 고용 유연화인가. 공공부문 정원 10% 감축 방침으로 비정규직을 사지로 내몰면서, 그 자리를 더 열악한 청년 인턴으로 채우는 해법을 확산하자는 것인가.

비정규직을 활용해서 기업이 비용 경쟁력을 높인다고 하지만, 그 대가로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고용 불안정과 생활 불안정의 늪에 빠지며, 결국 1등 시민과 2등 시민으로 양극 분해된 사회로 치닫게 된다. 이미 그 본산인 미국에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는 고용 유연화라는 신화의 끄트머리를 시대착오적으로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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