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형사상 명예훼손죄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한 인권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5년 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20개월 동안 168개국에서 명예훼손죄로 구금된 사람은 146명뿐이다(한국은 이 조사에서 빠졌다). 이들 국가에서 명예훼손죄로 구금되는 사람은 1년에 한 사람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미국의 경우 2004년 현재 50개 주 가운데 15개 주가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주에서 제기되는 명예훼손 형사사건을 모두 합해도 1년에 약 2건에 머물 정도로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형사상 명예훼손죄 폐지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뉴질랜드(1992), 가나(2001), 스리랑카(2002), 멕시코(2007) 등이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2004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관련 보고서를 출간한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스토니아·그루지야·우크라이나·몰도바 등이 명예훼손 형사처벌제도 자체를 폐지했고, 프랑스·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등이 명예훼손죄로 구금하는 제도를 폐지했다.
2006년 유럽인권재판소는 우크라이나 총리를 비판한 기자를 우크라이나 검찰이 형사처벌한 것을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유죄판결을 번복했다. 유럽인권재판소의 결정은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에 대해 구속력을 가진다. 이후 유럽인권재판소는 언론인들이 정부나 유력 정치인을 비판했다가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받은 여러 사례들을 검토했고, 대부분의 사건에서 회원국 법원의 결정을 번복했다. 오스트리아 법원 결정만 해도 세 차례 번복이 이뤄졌는데, 형벌이 과도해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특히 거의 모든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명예훼손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과도한 형벌이라고 결정했다.
이들 국가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이유가 있다. 각국 정부가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체제 유지’를 위해 남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나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압하기 위해 남용할 수 있다. 더욱이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도리어 국민의 세금을 써가며 검찰을 동원해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미국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저 유명한 연방대법원의 ‘ 대 설리번’ 판결(1964)은 허위의 주장으로 공직자에 대한 평판을 저하시켰다 하더라도 그 주장이 허위임을 알고 있었거나 허위일 가능성을 무모하게 무시한 경우에만 명예훼손이 성립됨을 선포했다.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 판결(1964)은 이런 잣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법을 위헌 처분했다. 이후 뉴욕·캘리포니아·일리노이·텍사스주 등 많은 주에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이 위헌 처분되거나 주의회에 의해 자발적으로 폐기됐다. 이렇게 된 이유도 유럽과 같다.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권력자가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으로 언론인 구금하는 건 후진국들이런 흐름은 유럽과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4년 ‘아메리카인권협약’에 가입한 중남미 국가들은 언론인들이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서 명예훼손죄로 처벌되는 것에 대해 인권협약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했다. 현재 명예훼손과 관련해 언론인들이 구금되는 나라는 대부분 러시아·몽골·카자흐스탄·브라질·베네수엘라·카메룬·케냐·버마·타이·인도네시아·예멘·오만·아프가니스탄 등 개발도상국 또는 후진국들이다.
선진국 가운데는 스페인이 거의 유일한데, 지난 2003년 바스크 독립주의자가 국왕을 ‘고문의 괴수’라고 칭한 것을 형사처벌해 ‘오명’을 뒤집어썼다. 권력자가 검찰을 동원해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타격을 가하는 치욕을 이제 한국도 뒤집어쓰려는가.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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